54화. 훔쳐간 자리(4)
“후회?”
알렉산드로가 더욱 싸늘한 눈이 되어 라이너스를 노려봤다.
알렉산드로가 비소를 입에 매달았다.
“일리어스 카테리안느가 아닌 너를 공작으로 만들려던 게 후회라면 가장 큰 후회겠지.”
알렉산드로의 입에서 일리어스와 자신을 비교하는 말이 나오자, 라이너스의 입에서 분노에 찬 노후가 터져 나왔다.
“폐하!”
라이너스는 더 이상 눈앞의 상대가 황제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 듯 이어 소리쳤다.
“그러면 폐하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착각하시나 봅니다!”
라이너스의 표정부터 목소리까지, 방금 알렉산드로가 그랬던 것을 되돌려 주려는 것처럼 빈정거림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제 여동생에게 기생하여 여기까지 올라오셨으면서요!”
“닥쳐!”
쨍그랑!
알렉산드로가 유리컵을 라이너스에게 집어 던졌다.
그러나 라이너스가 그것을 피한 덕에 애먼 유리컵은 벽에 맞고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누가 누구에게 기생해?! 어디서 그딴 망발을……!”
알렉산드로는 어깨를 들썩이며 씨근덕거렸다.
알렉산드로가 라이너스를 삿대질하며 선언했다.
“앞으로 한 달 안으로 공작 위에 못 오르면, 황실 2기사단은 카테리안느 저택에서 철수시킬 거다! 무능한 놈에게 내 기사들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그제야 라이너스의 안색이 달라졌다.
“폐하, 이건 말이 다르십……!”
“말을 못 지킨 건 네가 먼저이니, 내가 말을 바꾼다고 해서 문제일 건 없겠지!”
알렉산드로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급해진 라이너스를 보니 그제야 오벨리아에게 기생했다는 소리를 듣고 구겨졌던 자존심이 나아지는 거 같았다.
그러게 까불길 왜 까분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제가 카테리안느 공작이 된 뒤에 폐하께도 좋을 게 없으실 텐데요?”
라이너스가 표정을 돌처럼 굳힌 채 알렉산드로를 노려봤다.
제 2기사단이 카테리안느 저택에서 완전히 물러나면, 라이너스를 따르는 기사들만으로는 저택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 또한 그것을 알면서도 기사단으로 협박한다는 건, 라이너스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다.
“카테리안느 공작이 된 뒤에나 말해.”
알렉산드로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마치 이제는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이 되리라 믿지도 않는 것처럼.
“……두고 보십시오.”
라이너스는 굴욕적인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돌아섰다.
8년간 헌신한 제 여동생을 버렸을 때부터 알아봤으나, 역시 저런 인간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라이너스는 처음으로 제 2기사단이 아닌 제 스스로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품고 황제의 집무실을 나와 문이 닫혔을 때, 문 뒤에 숨어 있던 여자가 라이너스에게 말을 걸어 왔다.
“라이너스 오빠.”
아그네스였다.
***
오벨리아는 처음부터 엘라이스트에서 모여드는 정보들을 밖으로 유출시킬 생각 따위 없었다.
메이트리스와 전혀 다른 곳을 만들겠다고 한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엘라이스트는 1층을 제외하고는 전부 개별적인 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서버가 손님이 가진 번호표에 새겨진 점자를 손으로 읽어내 그들을 각자의 룸으로 안내했다.
그리하여 안내를 맡은 서버가 엘라이스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외워야 하는 엘라이스트의 건물 구조뿐이었다.
티를 끓이고 디저트를 내가는 서버들 역시 룸 안의 귀족이 처음부터 누구인지 모른 채로 그들을 모셨다.
그들은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손을 넣어 손끝의 감각으로 테이블을 세팅하고 차를 따라낼 뿐이었다.
그러니 엘라이스트는 애초에 서버들이 정보를 물어다 옮기는 것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그 정보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부터 모르는 데다, 손님들이 종을 울려 부르지 않는 이상 서버들은 룸 밖에서 대기해야만 했으니 들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것은 귀족들에게 대단히 큰 이점으로 작용하여, 그들이 꾸준히 엘라이스트를 찾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오벨리아는 아무것도 얻을 게 없었다.
귀족들에게 내오는 티와 티푸드는 그 재료부터가 모두 최고급이었고, 티룸의 장관을 유지하는 데만 해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엘라이스트의 수익은 고스란히 엘라이스트의 유지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었다.
오벨리아가 이렇게 손해를 감수하며 일부러 이런 구조를 만든 이유가 있었다.
처음부터 오벨리아는 티룸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소문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엘라이스트가 문을 연 첫날 이후, 엘라이스트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하루에 단 30명으로 제한되었다.
그래서 30명의 구성은 꽤 자주 바꾸고는 했는데, 오벨리아는 이 점을 노렸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위한 공간인 2, 3층과 달리 1층은 교류를 위한 공간이었다.
30명 중에 은근슬쩍 오벨리아의 사람을 끼워 넣어 1층의 귀족들과 교류하는 척 소문을 흘리도록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카테리안느 가문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지 않나요?”
엘라이스트는 1층 손님들에게 모두 가면을 나누어 줬는데, 이 가면은 하루마다 매일 폐기되고 새로 들어와 바뀌므로 가면으로 누군가를 특정하기는 힘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무늬 없는 흰 가면을 쓴 여자에게로 쏠렸다.
여자의 말은 사실 귀족들이 모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정확히 건드렸다.
“그렇잖아요. 그 카테리안느에서 돌아가신 카테리안느 공작님의 장례식조차 가족장으로 단출하게 해 버리고…….”
익명성이라는 것은 놀랍도록 인간을 솔직하고 무모해지게 만든다.
누군가 여자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긴, 이상하긴 해요. 보통 장례식에서 다음 대 가주를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잖아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연이어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카테리안느는 무언가를 숨기듯이 공작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쭉 저택의 대문을 걸어 잠그고 있죠.”
“공작 부인이 충격으로 쓰러지셔서 아프다고는 하지만…….”
“사실 갑자기 카테리안느의 첫째 영식이 실종되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수군거림이 어느덧 1층 전체를 가득 채웠다.
그때 다시 하얀 가면을 쓴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다 같이 파티 초대장을 보내 보면 어떨까요? 공작 부인께서 그저 충격을 받으셨던 거라면, 어디 한군데에는 나타나시겠죠.”
“그게 아니라면요……?”
“공작님이 돌아가시고 첫째 영식이 행방불명됐으며 심지어 황태자비 전하까지 돌아가셨는데 유일하게 멀쩡한 사람이 있잖아요?”
여자의 말에 모두가 숨을 삼켰다.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을 뿐, 여자의 말은 분명히 라이너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면 차기 카테리안느 공작이 될지도 모를 사람이기에 언급에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있었고, 서로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었으니까.
“좋아요, 한번 해 보죠.”
누군가 여자의 말에 긍정했다.
모두가 눈을 빛냈다.
기실 다들 궁금했던 것이다.
그 고고하던 카테리안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하여 다음날부터 카테리안느 저택에는 무수한 초대장이 쌓이게 되었다.
***
“은행 쪽으로 알아보니 에스더 백작이 라이너스 카테리안느와 거래한 내역이 있더군.”
“……에스더 백작이 돈을 받았다고?”
오벨리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에스더 백작은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부당하게 이윤을 챙기는 행위를 싫어했다.
오죽하면 자신의 아들이 일리어스와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대가로 한 영애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받았는데, 그 행동이 꼴 보기 싫다며 백작은 아들을 변방 영지로 쫓아내 버렸다.
만약 에스더 백작이 그런 식으로 돈을 챙기고자 했다면, 진즉에 그럴 수도 있었을 터였다.
카테리안느와 어떻게든 얽혀 보려는 자들이 주로 카테리안느의 가신들에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너무 이상해. 에스더 백작은 그동안 절대 뒷돈은 챙기지 않던 사람이야. 그런데 인제 와서, 그것도 뻔하게 기록이 남을 은행을 통해 라이너스에게서 돈을 가져간 거지……?”
오벨리아는 황궁뿐 아니라 카테리안느의 모든 가신과 고용인들에 대해서도 세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상 에스더 백작의 횡보로는 너무 이상했다.
백작이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 받은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알아오라고 했는데, 카테리안느의 다른 원로들에게 보내졌더군.”
에크하르트가 돈을 받은 원로들의 이름 목록을 내밀었다.
그 목록을 살펴보던 오벨리아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
라이너스는 곤란에 빠져 있었다.
고위 귀족들이 짜기라도 한 듯이 카테리안느 저택에 연이어 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공작 부인의 건강이 아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초대장을 전부 거절하고 있었으나, 언제까지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라이너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초대장이 밀려드는데 공작 부인이 공식 석상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이너스가 애초에 공고한 위치에 있는 적법한 후계자였다면 모르겠지만, 현재 카테리안느의 정치계 인맥들은 전부 죽은 공작과 일리어스를 통해 만들어진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라이너스에 대해 의심을 품고 그를 적대한다면, 라이너스의 정치 인생은 상당히 곤란해질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어떻게든 한 번쯤은 공작 부인이 초대장에 응해야만 했다.
“어머니를 감시할 사람이 필요한데….”
라이너스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공작 부인을 저택 밖으로 내보내는 순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감시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카테리안느에는 사교계에 나설 여성이 공작 부인 외에 이제 없었으므로, 공작 부인에게 붙일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문득 특정인의 이름이 라이너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