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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55화 (55/136)

55화. 훔쳐간 자리(5)

황제의 정부, 아그네스가 이멜리언 가에서 대규모의 파티를 열기로 했다.

그 소식은 곧 수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자리에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 쓰레기 같은……!”

그래서 오벨리아는 분노했다.

생각해 보라.

죽은 줄 알고 있을 딸의 자리를 꿰찬 여자의 파티에 공작 부인을 밀어 넣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한 번 패륜을 저지르더니 두 번도 거침없어진 라이너스 카테리안느 외에 더 있겠는가!

“진정해라, 그러다가 또 열이 날 거다.”

에크하르트가 분노로 가득 차 어쩔 줄 모르는 오벨리아를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가 카테리안느 저택을 지키는 황실 2기사단의 수를 늘렸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일부러 어머니가 저택을 한 번쯤은 벗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래야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에게 접근하여 탈출 게획을 짜든, 혹은 아예 중간에서 빼돌리든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아무리 어머니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지만, 라이너스가 이딴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의원이 흥분하면 좋지 않다고 했어. 이번에 반드시 네 어머니를 구할 테니까, 일단 지금은 화를 가라앉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손에 차가운 물이 든 잔을 쥐여 주었다.

그는 그녀가 알렉산드로를 만나 열이 들끓은 이후 시종일관 오벨리아의 몸 상태에 예민하게 굴었다.

고작 열이 났을 뿐이지만, 오벨리아가 고작 열 하나에도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이 에크하르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그의 말이 귓가에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건 오벨리아가 아프기 때문도 있었다.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질 때마다, 그녀의 이성은 흔들렸고 감정은 격해졌다.

한 달 전보다, 일주일 전보다, 어제보다 더 그랬다.

시한부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는 삶.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이번에 어머니가 저택에서 나오실 때 어머니를 구해 와야 해.”

오벨리아가 초조하게 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에크하르트가 돌연 오벨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에크하르트가 눈으로 오벨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라이너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또 다시 열이 오르진 않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시선과 마주하자, 그녀의 이성이 강제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일어나. 뭘 그렇게까지 해. 그냥 말해도 되잖아.”

그리하여 오벨리아는 당황했다.

겨우 눈을 마주치기 위해서 그녀의 앞에 무릎 꿇은 남자 때문에 어쩔 줄을 몰랐다.

“진정하게 만들기에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그쯤이야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오벨리아가 채근하자 그가 담담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 저번부터 너무 심각하게 구는데- 열이 난다고 사람은 죽지 않아.”

오벨리아의 시선이 에크하르트의 시선과 어긋났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이렇게 해 주었을 사람이다.

동정심일 뿐이다.

그녀는 애써 그것을 속으로 되새겼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계는 변함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안도와 함께 어느 한구석이 따끔한 게 느껴졌으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너는 다르지 않나.”

오벨리아의 말은 에크하르트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가 시녀를 불러 약을 가지고 들어오게 했다.

에크하르트는 독의 해독약을 구하지 못한 대신, 몸에 좋은 것들이라면 모조리 오벨리아를 위해 찾아 들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본적인 체력이라도 받쳐 주면 독에서 몸이 더 오래 버티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마시고 자.”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시녀가 가져온 잔을 건넸다.

대륙에 얼마 없는 하얀 사슴의 뿔을 고아 만든 것으로 웬만한 병은 기운을 차려 털고 일어나게 한다는 명약 중 하나였다.

“……이런 거 먹어도 소용없는 거 알잖아.”

오벨리아가 잔을 받아들며 한숨을 삼켰다.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날 때 조금 낫기는 했으나 딱 그 정도였다.

스스로의 몸이 어떤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바실리스크의 독에 한 번 침식된 그녀의 몸은 아무리 좋은 약을 가져다 부어도 밑 빠진 둑처럼 다시 독 기운에 지고는 했다.

오벨리아는 고작 아침에 조금 더 잘 일어나기 위해서 이런 천금 같은 명약들을 계속해서 쏟아 붓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널 살릴 거라고 하지 않았나.”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잔을 협탁 위에 내려놓고 에크하르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끝없는 도돌이표 같다고 생각했다.

에크하르트는 그녀를 살릴 수 있다고 자꾸만 우기고, 오벨리아는 불가능하다고 현실을 말하는 그런 도돌이표.

“시간 낭비하지 마.”

그래서 오벨리아는 진심으로 에크하르트에게 충고했다.

평생을 미워해도 모자랄 사람을 동정하고 가엾게 여길 줄 아는 남자였다.

그가 자신 때문에 쓸모없는 일에 힘을 기울이지 않기를 바랐다.

온갖 노력을 다해도 되돌아오거나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8년간의 헌신이 모두 허사가 되어 본 오벨리아가 가장 잘 알았다.

“……시간 낭비?”

그러나 오늘따라 오벨리아의 말이 에크하르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넌……!”

에크하르트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여 목소리를 높였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벨리아가 열에 취해 잠이 들었던 날, 뜨거웠던 손과 그게 1년도 안 되어 식을 거라고 알려 주던 의원의 말.

그로 인한 잔상들이 에크하르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떻게 제 목숨을 가지고 그렇게 말해. 넌 살고 싶지도 않은 건가?”

에크하르트가 따지듯이 물었다.

제 앞에 다가올 죽음을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오벨리아의 모습이 거슬렸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그랬다.

이 세상에 이토록 많은 것이 존재하는데, 그녀를 이 땅 위에 붙들어 놓을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 너무나…….

너무나, 참을 수 없었다.

“난 안 되는 일에 매달리지 않아.”

오벨리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또 다시 흥분한 것은 에크하르트뿐이었다.

오벨리아의 목숨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녀의 반응은 한없이 침착했다.

물론 오벨리아도 일리어스와 에드먼드를 다시 만났을 때는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 있기를 잘했다는 것과 앞으로도 살아가고 싶다는 건 다른 궤를 그리는 것이었다.

“복수만 하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전히?”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상기되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살아 있는 목숨이야.”

오벨리아에게 여전히 스스로의 목숨은 소모품이었다.

에크하르트의 앞에서 바실리스크의 독을 스스로 마시던 날과 똑같이.

그로부터도 꽤 많은 날이 지났는데, 그녀는 바뀌지 않았다.

에크하르트는 이토록이나 바뀌어 버렸는데.

그게 그를 더는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네가 그러니까……! 자꾸 그러니까, 내가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않나!”

에크하르트의 외침에 순간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오벨리아의 두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가끔 이렇게 나올 때마다, 나는 무서워.’

그 얼굴을 보며 에크하르트는 다시 오벨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입술을 꾹 깨문 채 잘근잘근 씹어댔다.

이전에는 에크하르트에게 없던 버릇이었다.

그가 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마른세수를 몇 번이고 반복하던 에크하르트가 마침내 두 손을 내리고 오벨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렇게 신경 썼을 거라는 말, 거짓말이야.”

에크하르트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 마음이 동정심이든 연민이든, 그녀는 그에게 남다른 존재였다.

때로는 오벨리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문득 문득 머릿속을 파고들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그래, 딱 그만큼 그랬다.

무섭다.

오벨리아의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답을 들을 수 없었으므로 에크하르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쨌든 무섭다고 했으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셈이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이기적인 사람임을 깨달았다.

오벨리아를 배려하느라 그녀에게 아무것도 관여하지 못하고 마냥 두고 보느니, 오벨리아의 두려움은 모른 척 한 채 그녀의 삶에 끼어들고 싶었다.

“그러니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마셔. 어차피 이런 걸 구하는 것쯤이야 힐켄테데에 대단한 일도 아니고.”

에크하르트가 협탁 위의 잔을 다시 오벨리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네 말대로 시간 낭비하는 건 좋지 않지. 그러니 괜히 신경 쓸 시간에 마음 편하게 다른 일 하는 게 낫지 않겠어?”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말이 정말 이상한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는 이런 식으로 그녀를 챙기느라 들어가는 시간에 대한 계산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오벨리아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잔을 놓쳤다.

“……! 괜찮나?”

잔이 떨어질 뻔한 것을 에크하르트가 재빠르게 받아 챘다.

그것을 도로 협탁 위에 올려놓은 그가 오벨리아를 살폈다.

혹시 어딘가 아파서 손에 힘이 풀린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오벨리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 당신은 어쩌면…… 무의식 중에 동정심과 연민을 다른 감정으로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에크하르트가 진심으로 원수 같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을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괜찮아.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잔을 놓친 거뿐이야.”

오벨리아가 돌연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했다.

그녀가 잔을 집어 들어 약을 마셨다.

동정, 연민.

그런 감정들이 에크하르트를 헷갈리게 한다면 오벨리아가 해 줘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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