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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56화 (56/136)

56화. 훔쳐간 자리(6)

그 후로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구해다 주는 약을 마다하지 않고 꼬박꼬박 모두 받아 마셨다.

그 덕인지 그녀의 안색은 한결 나아진 듯했다.

물론, 꾸며낸 거짓이었지만.

울컥.

오벨리아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자 곧바로 피가 속에서 역류했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몇 번 방 안을 울렸다.

그녀는 피에 젖은 손수건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손수건은 잿가루가 되었다.

그래, 오벨리아는 괜찮은 척을 하기로 했다.

에크하르트가 동정과 연민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착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쩌면 그게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

티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벨리아는 가게 관리에 충실한 주인 흉내를 다했다.

그리하여 3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붉은 새의 깃털로 만든 제법 화려한 가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가면을 빤히 보던 오벨리아가 지배인을 불렀다.

“저 손님을 3층 0번 룸으로 안내해.”

“예, 오벨리아 님.”

오벨리아의 명령을 따른 지배인의 지시를 받은 서버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붉은 가면의 손님과 서버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오벨리아의 예상대로, 붉은 가면은 쉬이 서버를 따라 위층으로 향했다.

그것을 본 오벨리아 또한 0번 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0번 룸은 손님들에게도 개방되지 않는, 벽 안쪽 공간의 룸이었다.

그곳을 아는 자는 엘라이스트의 지배인과 오벨리아뿐이었다.

그녀가 0번 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붉은 가면이 그제야 오벨리아를 돌아봤다.

“이렇게 오랜만에 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아가씨.”

붉은 가면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더없이 정중한 인사를 한 그자가 드디어 붉은 가면을 벗었다.

“오랜만이야, 에스더 백작.”

가면의 주인공은 오벨리아가 짐작한 대로 에스더 백작이었다.

***

“오벨리아 님이시라면 제 신호를 알아 차려 주실 줄 알았습니다.”

“백작이 수고해 준 덕분이지. 라이너스에게 돈을 받은 거, 유통책 역할을 해 준 거잖아.”

라이너스가 매수한 원로들에게 돈을 건네주는 역할.

그것을 에스더 백작이 맡았기 때문에 그녀가 라이너스에게 돈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에스더 백작은 그 돈을 원로들에게 주는 과정에서 일부러 기록을 남김으로써, 라이너스에게 대가를 받고 협조한 원로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 놓았다.

라이너스는 자금이 세탁되는 줄 알았겠지만, 실상은 에스더 백작에게 속은 셈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에스더 백작이 언젠가 엘라이스트를 찾아오리라 확신했다.

에스더 백작의 행동들은 일리어스나 오벨리아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벨리아는 힐켄테데의 성만 달았을 뿐,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써 가며 대놓고 알렉산드로와 대치했다.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찌어찌 똑같이 생긴 사람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에스더 백작은 카테리안느와 라이너스, 그리고 알렉산드로 사이에 얽힌 일을 알고 있었으니, 오벨리아가 카테리안느의 그 오벨리아임을 쉬이 알아차렸을 터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에스더 백작. 혹시 어머니께서 카테리안느 저택 내 어디에 구금되어 계신지 알고 있어?”

에스더 백작의 수를 읽고 나서 백작을 다시 만나기까지, 오벨리아가 계속해서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희망은 곧바로 좌절되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라이너스 님과 그분의 직속 호위들하고만 알고 계십니다.”

에스더 백작이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카테리안느 저택은 황성을 제외하고 수도에서 가장 드넓은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방만 수십 개가 넘었으니, 사람을 숨기고자 하면 못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 라이너스가 작정하고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을 숨겼다면 다른 이들이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 혹시 보석상이나 의상실 디자이너들이 유독 드나드는 방 같은 건 없었나?”

카테리안느 공작이 죽고, 오벨리아가 황궁을 빠져나와 힐켄테데가 된 지도 몇 달이었다.

그 몇 달 동안 공작 부인은 구금당해 있었으니 드레스나 보석 등을 따로 맞추지 못했을 터였다.

사교계는 유행이 휙휙 지나가는 곳이었다.

사교계의 유행은 길어야 한두 달이었다.

그런데 몇 달이나 칩거해 있다가 파티에 가는 것이니,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에게 유행에 어울리는 옷이 있을 리 없었다.

무려 카테리안느의 안주인이다.

그런 사람이 유행에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온다면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릴 것이었다.

그러니 라이너스는 제 어머니의 차림새만큼은 완벽하도록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귀족들은 기성복은 취급하지도 않는 대다가, 그들의 옷은 정확히 치수를 재지 않고는 만들 수 없을 만큼 섬세했다.

그러니 오벨리아는 제 어머니가 보석상이나 디자이너들을 만났으리라 유추했다.

“……있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에스더 백작이 문득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백작 또한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거취를 알아내기 위하여 항상 저택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보석상이나 디자이너인지는 모르겠지만, 카테리안느 저택 내부의 고용인들로 보이지 않는 외부인들이 며칠 드나들었지요.”

에스더 백작의 말에 오벨리아의 두 눈에 빛이 났다.

“아마 그 근처에 어머니를 가둬 놓았을 거야.”

“그런데…… 거기가, 공작 부인께서 사용하실 만한 방들은 아니었는데요.”

에스더 백작이 흐린 안색으로 말했다.

“1층이었거든요.”

오벨리아가 찻잔을 꽉 쥐었다.

1층은 가장 많은 이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1층에는 고용인들의 숙소가 있었고 저택을 방문한 외부인들이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보석상이나 디자이너가 마치 고용인인 척하고 돌아다녀도 에스더 백작처럼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외부인임을 알아차릴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평소 카테리안느 공작 내외가 저택 4층 전체를 사용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1층의 방은 정말이지 공작 부인에게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어머니를 그딴 곳에 모셔 놓다니.”

오벨리아가 이를 악문 채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카테리안느 저택이고 고용인들의 숙소조차 평민들은 상상도 못할 좋은 방이라지만, 그건 고용인들의 기준일 뿐 공작 부인에게는 아니었다.

아마도 그간 계속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머무는 방을 바꿨을 테지만, 그런 곳에서 시간을 보냈을 어머니의 기분이 얼마나 암담했을지 오벨리아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을 더 돕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벨리아의 분노에 에스더 백작이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대가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어. 지금까지 해 준 것으로 충분해. 그대에게 정말 고마워. 카테리안느가 은혜를 입었어.”

그러나 오벨리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감사를 표했다.

라이너스가 죽일 놈이었지, 현재 카테리안느 저택의 최고 권력자인 그를 상대로 공작 부인을 구할 수 없었던 에스더 백작의 탓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미안한데…… 혹시 무리한 부탁이겠지만 하나만 더 들어줄 수 있을까.”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오벨리아의 말에 에스더 백작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아그네스가 주최하는 파티 당일, 알렉산드로는 아직도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처음 그녀가 파티를 연다는 소식을 세간에 알리기까지 그에게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벌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으로 또 다시 두 사람이 매우 시끄럽게 다퉜음은 당연한 일이었고.

“……굳이 파티를 꼭 해야겠어?”

알렉산드로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이제 아그네스의 배는 어느 정도 눈에 띨 정도로 불러 온 채였다.

그나마 라인이 없는 드레스를 입어 가렸다지만, 이미 아이를 낳아 본 귀부인들은 유심히 보면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아이가 사생아로 태어나지 않으려면, 아그네스가 황후가 아닌 상태로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됐다.

그렇지 않아도 선황의 반대로 차일피일 시간만 흘러가서, 이제는 아그네스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후에 아이를 출산할 때 황실 별장 같은 곳으로 보내 출산일을 속여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아이의 존재를 발각 당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겠다니, 알렉산드로로서는 정말이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잖아. 지금 당장 연회장으로 가야 하는데, 인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라이너스 오빠를 돕는 일인걸.”

아그네스가 최대한 사근사근한 어투로 알렉산드로를 달랬다.

“그리고 라이너스 오빠를 돕는 일이 알렉을 돕는 일이고. 라이너스 오빠가 제대로 카테리안느 공작으로 자리 잡아야, 알렉을 정계에서 제대로 도와줄 거 아냐.”

아그네스도 욱하는 성질이 있어 지난번에는 알렉산드로와 다투고 말았지만, 파티에 함께 파트너로 나가야 하는 판에 얼굴을 구기고 나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그네스는 아직 여전히 그녀의 권력이 오로지 황제의 애정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번뿐이야. 다음에도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절대 그 장단에 어울려 주지 않을 테니까.”

알렉산드로가 결국 한숨을 쉬며 아그네스에게 한 팔을 내어 주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이렇게까지 사근사근하게 나오는데, 제 아이를 밴 여자에게 더 매정하게 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고마워, 알렉.”

아그네스가 화사하게 웃으며 알렉산드로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간만에 다정한 기색을 풍기며 이멜리언 백작의 이름으로, 그렇지만 실은 알렉산드로가 특별히 마련해 준 대신전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연회장으로 들어선 순간, 아그네스와 알렉산드로의 얼굴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주최자인 아그네스였다.

보통은 손님들은 그 파티의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와 있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연회장 안에는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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