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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57화 (57/136)

57화. 훔쳐간 자리(7)

오벨리아는 에스더 백작에게 보석상과 디자이너가 드나들던 근처 방들을 잘 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아그네스의 연회가 있는 날, 분명 라이너스가 마차 여러 대를 동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로나 라이너스도 바보가 아닐진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을 구하기에는 그녀가 외출하게 된 파티 날이 최적이라는 것을 모를 턱이 없었다.

특히나 연회장을 오가는 길에는 수도 한복판에서 범죄자의 행렬을 감시할 때처럼 기사들을 잔뜩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더욱이 수가 필요할 터였다.

만약 라이너스가 마차를 여러 대 준비한다면, 오벨리아는 어머니가 타고 있는 마차를 정확히 맞춰야만 했다.

만약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있지 않은 마차를 습격했다가 그 마차를 지키던 기사들이 신호탄이라도 터트리면 공작 부인을 구해내는 건 다음 번에는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감시하다가 그 근처에서 가장 적은 인원이 움직일 때, 그때 내게 신호를 줘.’

오벨리아가 아는 라이너스에게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녀는 제 둘째 오빠가 어머니를 가장 적은 인원들과 조용하게 이동하게 할 것이리라 추측했다.

그리고 아그네스의 연회 당일, 마침내 에스더 백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와 움직이기로 했다.

아직 일리어스는 라이너스의 기사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됐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내가 생각한 마차에 계셔야 할 텐데.’

마차가 지나갈 길에 에크하르트와 매복하면서 오벨리아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라이너스는 이미 전에 두 대의 마차를 먼저 출발시켰다.

만약 그 앞의 마차 중 하나에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있다면, 오늘의 계획은 오벨리아의 잘못된 판단으로 허사가 되는 셈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고 했잖나.”

불안해하는 오벨리아에게 에크하르트가 속닥였다.

그녀는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으나, 제대로 듣지 못한 척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인지 그게 어색할 틈 없이 마차가 그들이 매복한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에크하르트가 힐켄테데의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기사들이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마차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일반 귀족가라면 몰라도, 카테리안느의 기사들 또한 대단히 고된 훈련을 이겨낸 뛰어난 자들이었다.

마차를 두고 힐켄테데와 카테리안느 기사들의 대치가 길게 이어졌다.

“꽉 잡아라.”

그 상황을 두고 보던 에크하르트가 돌연 오벨리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녀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그가 칼날이 정신없이 오가는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오벨리아가 첨예하게 왔다 갔다 하는 날들에 놀라 에크하르트에게 바짝 붙어 안겼다.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안고 길을 뚫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키가 큰 에크하르트의 건장한 몸이 날렵하게 카테리안느의 기사들 사이를 파고들고, 힐켄테데의 기사들은 그런 자신들의 주인을 도왔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안지 않은 반대 손으로 검을 들고 제게 달려드는 자들을 상대했다.

힐켄테데의 기사들에게 제법 잘 맞서 싸우던 카테리안느의 기사들도 에크하르트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의 활약으로, 드디어 그녀는 마차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네 얼굴을 확인해야만 공작 부인이 안심하고 우리와 함께 가실 테니까.”

에크하르트가 그제야 오벨리아를 안고 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마차 앞에 도달한 그녀에게 조금 전의 일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벨리아가 마차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문을 열려는 그녀를 막았다.

“왜 그래?”

“내가 열겠다.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에크하르트는 혹시라도 마차 안에 공작 부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있어서 문을 열면 공격을 가할까 염려했다.

그런 경우라면 대처를 할 수 있는 자신이 마차의 문을 여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오벨리아도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의 문이 열렸을 때.

“……오벨리아, 내 딸…… 살아 있었구나.”

그 안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오벨리아의 어머니,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있었다.

***

대신전의 연회장 안에 있는 카테리안느라고는 라이너스뿐이었다.

파티의 손님들이 수군수군했다.

“오늘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께서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설마, 저 정부가 우리를 속인 건가요?”

그 수군거림이 귀에 들어올수록 아그네스와 알렉산드로의 표정은 더욱 싸늘하게 굳어갔다.

손님 중에는 황제의 정부 따위가 여는 연회가 아니라, 칩거하던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복귀 무대를 기대하여 온 자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정작 공작 부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라이너스의 표정은 점차 굳어가고 있으니 다른 귀족들도 슬슬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파티에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알렉산드로가 라이너스에게 성큼성큼 걸어 다가갔다.

알렉산드로의 입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애써 소리를 죽인 채로 터져 나왔다.

“……올 겁니다. 마차를 여러 대 준비했다 보니, 시간 차이를 두고 오느라 조금 늦는 걸 거예요.”

라이너스의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그의 안색은 누가 봐도 좋지 않았다.

아마 라이너스도 알고 있을 터였다.

문제가 없었다면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진작 도착했을 것이었다.

이건 늦어도 너무 늦었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음을 말하듯이.

“오늘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오지 않는다면, 둘 다 각오해야 할 거야.”

알렉산드로가 라이너스를 노려보다가 아그네스를 홱 돌아봤다.

알렉산드로는 이 사태를 만들어 군중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을 듣게 만든 두 사람에게 분노했다.

“……라이너스 오빠 말대로,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알렉. 응?”

아그네스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알렉산드로의 팔에 팔짱을 끼고 교태를 떨었다.

탁.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그런 그녀의 팔을 단호하게 쳐냈다.

“엉겨 붙지 말고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안 오면 어떻게 할지나 생각해.”

그 싸늘한 말에 아그네스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엉겨 붙다니!

아그네스는 순간 자신이 뒷골목의 하찮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알렉산드로가 불쾌한 기분을 드러내듯 라이너스와 아그네스에게서 거리를 두고 섰다.

그녀가 드레스 자락을 꽉 구겨 쥐었다.

아그네스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라이너스 오빠! 오빠 때문에 나만 난감해지게 생겼잖아요!”

아그네스가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도록 라이너스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녀의 잔뜩 성난 목소리는 분명히 라이너스에게 따지고 있었다.

“입 다물어.”

그러나 라이너스가 살벌한 눈으로 쳐다보자, 아그네스는 금세 움츠러들었다.

“어딜 너 따위가 나한테 따지고 들어.”

라이너스가 눈에 불을 켜고 아그네스를 쏘아봤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틀어진 것 같아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런데 아직 황후도 되지 못한, 백작가의 수양딸이자 황제의 정부 따위가 제게 따박따박 쏘아대니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다.

“뭐……뭐!”

아그네스가 기가 막혀서 얼굴을 붉히며 라이너스를 삿대질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사교계에 나설 때 감시해 줄 사람이 없다며 도와달래서 도와줬더니, 일을 망쳐놓고는 지금 누구에게 성질을 부린단 말인가!

그러나 라이너스는 아그네스의 어이없음과 그에 따른 분노 따위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아그네스에게서 고개를 홱 돌린 채로, 뚫어져라 연회장의 문을 쳐다봤다.

마치 그렇게 하면 시종이 문을 열고, 그 사이로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라이너스와 아그네스, 알렉산드로의 바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날, 연회가 끝날 때까지 연회장에서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볼 수 없었다.

***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로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을 모시고 온 뒤에, 에크하르트는 모녀 간의 대화를 위하여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오벨리아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한참을 서로의 손만 잡고 있었다.

그간 각자 겪은 일이 너무 많은지라, 할 말은 많은데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너무나 어려웠다.

“……미안하다.”

그리고 그 한참의 침묵 끝에,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제 딸에게 사과했다.

“라이너스가 가문을 잇는 것에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 알았는데도 너희에게 말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일이 이 지경까지 온 것 같구나. 나만 아니었다면, 네가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그간 생활이 편하지만은 않았는지, 오벨리아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그런데도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얼굴에는 회한과 후회, 그리고 무엇보다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 얼굴을 본 오벨리아가 울컥했다.

“어머니, 어머니가 저한테 왜 미안해요…….”

자식 셋 중 누구도 고르지 못한 부모를 어떻게 책망하겠는가.

오벨리아는 그저 어머니의 얼굴에 저런 그늘을 만든 제 둘째 오빠가 지독히도 미웠다.

“우리 딸,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오벨리아를 끌어안았다.

공작 부인의 목소리에 어느덧 울음기가 묻어났다.

딸의 온기가 닿으니, 그제야 딸이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부유한 후작가의 딸로 자라, 권세 높은 카테리안느의 안주인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곱지 않은 적이 없는 공작 부인의 손은 마음고생으로 말라 이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또 다시 아무 말도 없이 오벨리아를 끌어안고 있던 공작 부인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비아, 너…… 이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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