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훔쳐간 자리(9)
결론적으로 그토록 저택을 부숴댔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너스는 카테리안느의 가주가 가져야 할 인장 반지를 찾지 못했다.
“……없습니다.”
“2층에도 없습니다.”
“3층에도…….”
저택은 여기저기 벽에 구멍이 나고 대리석 바닥이 깨지고 들려 엉망이었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기사와 고용인들에게서 온통 못 찾았다는 이야기뿐이자, 라이너스가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아아아악! 너네! 제대로 찾은 건 맞아?!”
“저……정말입니다! 모두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없었습니다!”
아까 라이너스에게 목을 베일 뻔했던 기사가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 무능한 것들……! 집안을 이렇게 때려 부숴 엉망으로 만들고도 고작 그 인장 반지 하나를 찾질 못해!”
그 대답에 라이너스가 발을 쾅쾅 구르며 주변을 휙휙 사납게 둘러봤다.
기사와 고용인들로서는 대단히 억울한 이야기였다.
이 대저택을 때려 부수라고 한 것은 라이너스였고, 집안이 엉망인 것은 그에 따른 결과물이었으니까.
고용인들과 기사들은 난처해하며 어쩔 줄 모르고, 라이너스는 화를 다스리지 못해 난리를 치고 있을 때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알렉산드로가 라이너스를 불렀다.
“라이너스.”
현재의 라이너스에게는 알렉산드로가 매우 아쉬운 탓인지, 라이너스는 곧바로 난리치던 것을 멈추고 알렉산드로의 부름에 뒤를 돌아봤다.
“가주의 인장 반지를 새로 만들 방법이 있다. 해 보겠나?”
알렉산드로의 말에 라이너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솔직히 라이너스라고 해서 어머니가 쓸데없이 고집부리며 숨겨 둔 카테리안느 가주의 인장 반지를 찾기보다, 차라리 새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가주들의 인장 반지는 황실에서 직접 공인한 것으로, 보통은 다시 만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가 방법이 있다고 하니 라이너스로서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 저택을 태워.”
라이너스의 질문에 알렉산드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거침없이 말했다.
“……지금, 뭐라고…….”
“카테리안느 저택을 모조리 전소시키라고.”
그로 인해 어이가 없어진 것은 라이너스였다.
아무리 방금 집안을 엉망으로 때려 부쉈다고 하지만, 이건 돈을 들여 복구하면 며칠 이내로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저택을 전소시키게 되면 말이 달라진다.
말 그대로 저택에 새겨진 카테리안느의 유구한 역사가 홀라당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불의의 사고가 나서 가주의 인장 반지가 못 쓸 지경이 되면, 황제는 가주가 새로운 반지를 만드는 것을 허락해 주게 되어 있다.”
알렉산드로는 차분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그에게는 남 일이었으니 카테리안느 저택이 전부 타 버리든 말든 알 바 아니었으니까.
“저택이 불의의 사고로 타 버리면, 그 안의 반지도 녹아 사라질 테니 어쩔 수 없이 새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알렉산드로는 제 생각이 제법 마음에 든 듯이 미소했다.
그는 오히려 진즉에 이 방법을 권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그리고 언뜻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던 라이너스가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은 반쯤 돌아 있었다.
마치, 카테리안느 공작 위를 계승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는 것처럼.
하긴, 라이너스의 인간성은 가주 자리 따위를 위해 스스로 제 아버지를 해했을 때부터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런데 라이너스.”
알렉산드로가 순간 고용인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서늘한 뱀 같은 시선에 고용인들은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인장 반지를 찾지 못한 사실이나- 카테리안느 공작부인을 가둬 놨던 것 등, 알아서는 안 될 사실을 아는 자들이 너무 많단 말이지.”
알렉산드로가 시선을 거두고 저택의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가 현관을 안쪽에서 굳게 걸어 잠갔다.
마치, 누구도 못 나가게 하려는 것처럼.
“이 일을 아는 눈과 귀가 너무 많을 필요는 없지 않나?”
알렉산드로의 시선이 다시 고용인들을 향했다.
그 순간 고용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도……도련님, 살려 주십시…… 어억!”
하인이 라이너스의 발치에 매달려 목숨을 구걸하는 말을 온전히 내뱉기 전에, 기사들 틈에 섞여 있던 황실 2기사단의 남자가 하인을 베었다.
“아아아악!”
“꺅!”
덜렁, 떨어진 하인의 머리를 본 고용인들이 모조리 덜덜 떨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어떻게든 살고 싶어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의 기사들이 금세 카테리안느의 고용인들을 둘러쌌다.
“눈과 귀가 많으면, 입도 많은 법이지.”
알렉산드로가 라이너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 툭 두들겼다.
알렉산드로와 시선을 마주한 라이너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도련님 제발…… 으억!”
“컥!”
황실 제 2기사단의 기사들은 그 순간에도 카테리안느의 고용인들을 베어 넘겼다.
카테리안느 저택에서 일해 온 고용인들은 모두 오랫동안 저택을 위해 헌신해 온 이들이었다.
즉, 어린 날부터 라이너스가 봐 온 이들이란 의미였다.
“라이너스.”
“무엇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러나 알렉산드로가 한 번 더 라이너스를 채근하자, 라이너스는 고용인들에게서 돌아서 자신의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라이너스의 기사들 또한 카테리안느 저택에 오래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저택의 고용인들과 안면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크헉……!”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아까 라이너스가 목에 검을 들이댔던 기사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너희도 움직여.”
그 기사를 본받으라는 듯, 라이너스가 음산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명령했다.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기사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검에 어제는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오늘은 아침 인사를 나누었던 고용인들이 스러졌다.
곧, 카테리안느 저택은 피 비린내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 피 비린내조차 금세 사라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것을 엄청난 화마가 집어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
“큰일 났습니다……! 카테리안느 저택에 불이 났다고 합니다!”
카테리안느 저택은 수도의 한복판에 존재하는 대저택이었다.
그러니 그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불길은 대체로 수도의 전역에서 보였다.
힐켄테데의 기사 또한 그것을 발견하고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에게로 달려왔다.
“그게 무슨……!”
방금 전에야 막 침대에 누웠던 오벨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테리안느 저택이 불에 타다니!
아무리 카테리안느가 지금 엉망이라고는 하지만, 그곳에 불을 낼 간 큰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
“예!”
에크하르트가 기사에게 곧바로 명령했다.
기사가 제 주인의 명을 받들어 곧바로 다시 방을 나섰다.
오벨리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채 제 입을 틀어막았다.
“라이너스는…… 둘째 오빠는, 무사…… 한 건가?”
오벨리아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오빠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아무리 라이너스를 미워한다고 해도,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한 남매였다.
반사적으로 안위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때아닌 놀라운 소식에 오벨리아는 손끝이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을 가져올 거다.”
그런 오벨리아의 손을 에크하르트가 잡아주었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라이너스가 죽으면, 대가를 치른 것일 테니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오벨리아가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기분이 깔끔하지 못하고 감정이 뒤죽박죽이었다.
라이너스도 오벨리아가 해야 할 복수의 대상이었다.
남매의 아버지인 카테리안느 공작을 죽인 순간, 라이너스는 혈육의 정 따위 저버린 것이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싱숭생숭한 것이 오벨리아는 스스로 납득할 수 없었다.
꼭, 복수를 하겠다는 제 다짐이 그것뿐인 것만 같았다.
“인간은 체스 말처럼 흑백으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자신을 보라는 듯 오벨리아의 손을 끌어당겼다.
“네가 왜 라이너스 카테리안느의 배신으로 아파했겠나. 그만큼 그와 함께했던 추억과 시간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에크하르트는 그저 온기를 나눠주는 것뿐인 듯이, 담백하게 오벨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은 그의 체구만큼이나 대단히도 커서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오벨리아의 손을 감쌌다.
“끝이 어쨌든 추억과 시간을 공유한 자가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데 기분이 이상한 것이 당연하지.”
“……라이너스는 아버지를 죽였어.”
오벨리아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다시 한번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자가 네게 잘해 주었던 기억이 네 안에서 싹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에크하르트의 말에 오벨리아는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어떻게 인간의 마음이 딱 하나로 정의된단 말인가.
오벨리아는 라이너스가 미웠다.
미우면서도 한때는- 제 오빠이기에 애정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가 감정을 애써 다스리는 동안, 그는 내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동안 에크하르트의 명령을 수행하러 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가 완전히 진정되었음을 깨달았으나, 굳이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게 좀, 이상합니다.”
에크하르트가 기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기사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꺼냈다.
“무엇이?”
“……라이너스 카테리안느는 무사합니다.”
기사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벨리아는 안도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오빠를 제 손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사실에 입이 써졌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라이너스의 기사들도 무사한데…… 카테리안느의 고용인들은 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사가 덧붙인 말이 오벨리아를 경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카테리안느의 고용인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