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62화 (62/136)

62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1)

라이너스가 말하자마자 에드워드가 단박에 반박했다.

“론체스터 역사에 여태껏 황비라는 건 없었습니다!”

교황청이 정한 유일신 르 카르디에를 국교로 믿는 론체스터에서는 황제라 할지라도 그 정실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니 론체스터에는 당연히 황비라는 지위가 없었다.

“맞습니다, 폐하. 황비 자리는 르 카르디에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 야만스러운 나라에서나 있는 것입니다.”

이어 다른 귀족들도 입을 열었다.

교황청이 인정하는 이 대륙의 신은 르 카르디에뿐이었다.

대륙 대다수의 나라가 르 카르디에를 믿었고, 그렇지 않은 나라를 배척했다.

교리에 따르면 르 카르디에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미신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껏 르 카르디에를 믿어 온 나라들은 미신을 믿는 다른 나라에는 이름조차 붙이지 않고 야만족이라 통틀어 일컬었다, 교황청을 둔 신성 제국의 영향이 대륙 위에서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역대 론체스터의 황제들도 신성 제국과는 무조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마지막으로 교황에게 축사를 받지 못하면 반쪽짜리에 불과한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황청에서도 승낙할 리가 없습니다.”

“신성 제국에서 곱게 보지 않을 겁니다.”

“카테리안느 공작께서는 조금 더 신중하실 필요가 있으실 것 같군요.”

당연하게도 귀족들은 모조리 반대하고 나섰다.

그중에는 카테리안느 공작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비난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라이너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아버지가 카테리안느 공작으로 있었을 때는 찍소리도 못했던 것들이 제게는 저런 반응을 보이니 심사가 뒤틀렸다.

“넬슨 자작, 왜 그렇게 교황청의 승낙에 절절매는지 모르겠군요.”

라이너스가 제 말에 토를 단 사람 중 한 명을 콕 집어 말했다.

“우리가 신성 제국의 속국입니까?”

론체스터 제국과 신성 제국은 같은 제국이었다.

사실, 그렇게 따지자면 라이너스의 말대로 신성 제국에서 전파하는 교리에 꼭 절절매야 할 강제성은 없었다.

“네빌 백작, 신성 제국에서 곱게 보든, 안 보든……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라이너스의 말에 네빌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백작을 특정 지어 말한 탓에, 그 앞에다 홀로 대놓고 신성 제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 전 황태자비 전하의 사후, 폐하의 옆자리가 빈 지도 벌써 몇 달이 흘렀습니다.”

모두가 일시적으로 조용해진 틈을 타서 라이너스가 연극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벨리아가 마치 진짜 죽기라도 한 것처럼 참으로 뻔뻔한 태도였다.

“아무리 황후 폐하의 자리를 쉬이 정할 수 없다지만, 황제 폐하께서 정무로 쉴 새 없이 바쁘신데 언제까지고 황궁의 내정까지 신경 쓰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현재 황실에는 황태후도 황후도 없어 황궁의 내정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그로 인해 알렉산드로의 업무가 더욱 과중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다들 아그네스 이멜리언 영애가 황후에 오르는 것까지는 반대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영애가 폐하를 보필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으니 황비 자리에라도 올려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자는 겁니다.”

라이너스의 시선이 슬쩍 다시 한 번 오벨리아를 향했다.

역시나, 조금 전 있었던 일로 심사가 뒤틀려 그녀에게 보고 들으란 듯하는 행동인 모양이었다.

“카테리안느 공작은 참 일을 이상하게 만드는군.”

라이너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오벨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왜 꼭 후보가 아그네스 이멜리언이어야 하지?”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를 향해 돌아섰다.

심사가 뒤틀려서 한 행동이라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라이너스에게 직접 느끼게 해 줄 참이었다.

어쩌면 라이너스가 말을 꺼낼 타이밍을 만들어 준 게 기회였다.

보통 대공비가 정치판에 참여할 일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이곳은 공식적으로는 정치와 무관한 임명식 축하 자리일 뿐이었다.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에게 예를 차리는 태도로 고했다.

“폐하, 충심으로 진언을 올리는 바, 이제 그만 황후 폐하를 맞이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오벨리아의 말에 알렉산드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일부러 라이너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가 언제 황후의 자리에 올려 줄 거냐고 매일 따지고 드는 것에 질린 터였다.

그래서 라이너스의 주장대로 황비 자리라도 줄 수 있다면 아그네스의 입을 일시적으로나마 닫게 할 수 있으니 좋을 거라고 여겼다.

라이너스의 주장이 귀족들에 의해 반려 당하더라도, 대충 황비 자리라도 주려고 노력했다는 식으로 도리어 큰소리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돌연 오벨리아가 황후를 맞이하라고 발언한 것이다.

“전 황태자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황후 자리를 비워 두는 게…….”

“이상하군요, 얼마 전까지 폐하께서는 아그네스 이멜리언 영애를 황후 자리에 올리고 싶어 하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알렉산드로의 되지도 않는 변명을 에크하르트가 가볍게 막아 버렸다.

이를 악무느라 알렉산드로의 턱이 단단히 굳었다.

“황비란 애초에 없던 자리가 아닙니까.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들어갈 내탕금부터 궁과 시녀들의 배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 정하고 논의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오벨리아가 차분히 황비의 자리를 만들 때 생길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그렇게 인력을 소비하고 국고를 소모하느니, 차라리 언젠가 해야 할 황후 간택을 하시는 게 맞다고 사료됩니다.”

“대공비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황후 폐하를 간택하시옵소서, 폐하.”

데이비스 후작과 버트란드 백작이 기다렸다는 듯이 오벨리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황후 간택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명망과 역사가 있는 가문이었으며, 동시에 알렉산드로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식을 데리고 있었다.

후작과 백작이 먼저 입을 떼자, 다른 귀족들도 앞 다투어 황후 간택에 동의를 표했다.

황후로 보낼 만한 여식이 있는 가문의 귀족도, 그들을 지지하여 황후 가문에 줄을 대고 싶은 귀족도 모두가 한마음 한통속이었다.

난감해진 알렉산드로가 홱 라이너스를 노려봤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라는 의미였다.

아그네스가 황후 간택에 참여하여 당당하게 경연에 이길 수 있을 만한 실력이 있었더라면, 알렉산드로도 황후 간택을 하라는 선황의 의견에 번거롭게 맞서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겨우 몇 년 전에 제국의 귀족이 된 사람이었고, 여전히 사교계에서는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황후 간택에 참여할 영애들은 전부 날 때부터 제국의 귀족으로 엄격하게 키워져 사교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린다 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가 일반적인 귀족 영애들과 달랐기에 그녀를 사랑한 것이지만, 이럴 때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멜리언 백작.”

라이너스가 돌연 이멜리언 백작을 불렀다.

이멜리언 백작은 정계에서 이름이 드높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카테리안느의 친척 가문인 만큼 빠지는 가문은 아니었기에 이 자리에 있었다.

“예, 카테리안느 공작님.”

“이멜리언 영애를 카테리안느로 입적시킬까 하는데, 괜찮겠소?”

라이너스의 말에 순간 알현실 안에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카테리안느 공작으로서 한 발언이었다.

한 마디로 뒤늦게 물릴 수 없다는 말이었다.

“저희 딸을 카테리안느 공작가에서 받아주신다면, 저희야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멜리언 백작이 재빠르게 허리를 숙여 라이너스의 말에 긍정했다.

애초에 오벨리아에 의해 이멜리언 백작가로 입양된 딸이었다.

백작가는 나름 딸을 챙겼으나, 아그네스는 백작가에 만족하지 못했고 백작 내외는 그런 딸을 깊이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와 아그네스가 카테리안느로 가는 것에 아쉬움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간 아그네스를 돌본 것을 카테리안느와 알렉산드로에게 인정받는다면, 그야말로 백작가의 이득이었다.

“내 의견에 동의해 줘서 고맙네, 이멜리언 백작.”

라이너스가 다시 오벨리아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굳어 있었다.

감히, 감히 누구를 카테리안느에 들이겠다 하는가.

오벨리아는 살벌해질 것만 같은 표정을 애써 무표정으로 감추었다.

“폐하, 저희 카테리안느 또한 황후 간택에 찬성하는 바입니다.”

라이너스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알렉산드로를 향해 돌아섰다.

오벨리아는 자신을 카테리안느 공작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노라 했으나, 아무리 그런들 지금 당장 카테리안느의 실권을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라이너스의 안에 오만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이멜리언 영애의 입적 처리가 완료되는 대로, 저희 카테리안느 가문 또한 황후 간택 경연에 참여할까 합니다.”

경연은 기본적으로 간택에 참여하는 영애들의 실력이 중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가문이 엇비슷하게 좋았기 때문이다.

“……카테리안느가 기어코 다시 황후를 배출하려 하는군.”

누군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제 간택 과정에서 경연에 참여할 영애들의 실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오벨리아는 가문뿐 아니라 명성과 실력 모두를 갖추었기에 간택 과정도 필요 없이 황자비가 되었다지만, 아그네스의 경우에는 달랐다.

황제가 사랑하는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의 이름 뒤에 달린 카테리안느라는 위대한 성.

그 두 가지가 아그네스에게 날개를 달아 그녀를 황후의 자리에 올려 줄 터였다.

라이너스가 내놓은 제안은 알렉산드로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도 충분했다.

알렉산드로는 간만에 대단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선언했다.

“좋다, 이달 내로 황후 간택을 시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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