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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63화 (63/136)

63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2)

회의가 마무리되자 귀족들 대다수가 전의를 잃었다.

카테리안느가 아그네스를 황후로 밀어붙이겠다는데, 괜히 카테리안느와 맞설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차라리 여식을 간택에 내보내지 않는 게 나았다.

그러나 오벨리아만큼은 달랐다.

그녀의 안에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테리안느의 가신들이나 원로들과 협의가 되었을 리 없어.”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로 돌아오자마자,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에게 말했다.

아직은 라이너스의 말을 뒤집을 기회가 있었다.

“일리어스 오빠를 입적할 때도 반대가 엄청났다고 들었어. 그런데 심지어 평민인 아그네스를 카테리안느에 들이는 일을 가신들과 원로들이 승낙할 리가 없지.”

“……아그네스 이멜리언이 평민이라고?”

에크하르트가 순간 멈칫했다.

그가 조사해 봤던 대로라면 대외적으로 아그네스는 망국의 왕녀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이멜리언 백작가에서 아그네스를 흔쾌히 받아 준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오벨리아의 부탁이었어도 이멜리언 백작은 떨떠름하게 반응했을 것이었다.

“그래. 아그네스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한 거야. 다만 증거가 없어서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지만.”

아그네스가 제국의 귀족으로 편입된 지도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알렉산드로와 부정한 짓을 저지를 때도 그에게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으니, 아그네스가 얼마나 철저히 그 사실을 은폐했는지 알 법했다.

오벨리아나 에크하르트야 사실 평민이 귀족이 된다고 해서 불만이나 편견을 갖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사람이냐와 관계없이, 귀족 사회는 대단히 폐쇄적이었다.

특히나 계층 간의 이동에는 더더욱 예민했다.

같은 귀족의 작위가 오르는 것도 경계하는 판에, 평민이 카테리안느의 이름을 달고 황후가 되려 한다니.

절대 용납될 리가 없었다.

“오벨리아,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잠시 생각을 하던 에크하르트가 뜸을 들이며 말을 꺼냈다.

“아그네스가 카테리안느의 이름을 갖게 두는 건, 네게 너무 잔인한 일인가?”

오벨리아가 멈칫했다.

아그네스 카테리안느라니.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라이너스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그네스를 카테리안느로 들이기로 선언했다.

그가 스스로는 물릴 수 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입적은 가주 혼자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카테리안느의 가신들과 원로들이 모두 반대하고 든다면 아그네스의 입적은 요원한 일이었다.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의 친자라고 할지라도 공식적인 계승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가문 내에서 그 지지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너스를 지지하는 가신들이나 원로들은 라이너스가 전 카테리안느 공작을 해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전 카테리안느 공작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라이너스 홀로 이루기에는 지나치게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라이너스는 아마 알렉산드로 외에도 누군가와 작당을 했을 터였다.

그렇게 라이너스와 작당까지 한 가신과 원로들이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라이너스를 따르겠는가?

그에게 원하는 것이 있음이라.

결국 서로 이용하는 것이니 그 또한 온전한 라이너스의 지지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라이너스는 카테리안느 공작이 되긴 했어도 사실상 불완전한 상태였다.

그러니 가신들과 원로들이 사전에 일언반구도 없이 그가 멋대로 정한 입적을 거부하는 것쯤은 가능했다.

그런데도 아그네스가 카테리안느가 되어야만 한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때가 되면, 라이너스와 아그네스를 동시에 몰락시키자는 거지?”

오벨리아가 확신을 가지고 물었다.

에크하르트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민을 왕녀로 속였다.’ 그 사실을 들킨 시점에 일리어스 카테리안느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단번에 끌어내릴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아그네스가 카테리안느에서 내쳐질 것은 당연한 거고.”

“그런 아그네스를 황후의 자리에 올린 알렉산드로에게도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황제라는 낙인이 찍히겠지.”

“그래, 아그네스 이멜리언의 아이도 황태자가 되기 쉽지 않을 거다. 평민 소생, 그것도 신분을 속인 거짓말쟁이의 아이라고 다들 반대할 테니까.”

이건 일종의 도박이었다.

아그네스가 평민이었다는 증거만 찾으면 아주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아그네스와 라이너스, 그리고 알렉산드로 모두에게 날개를 달아 주게 되는 셈이었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감히 카테리안느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생각할 시간을 줘, 에크하르트.”

그러나 오벨리아는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면 라이너스와 아그네스를 단번에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알렉산드로에게도 대단한 치명타가 되는 셈이었다.

앞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는 오벨리아에게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의 지위가 굳건해지고 나면, 사실 그가 전 황태자비를 어떻게 했든 그것은 결국 조용히 묻힐 일이 될 터였다.

애초에 시간을 길게 끌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가 함께 알렉산드로를 끌어내리기로 했지만, 알렉산드로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키기에는 지난한 과정들이 필요할 터였다.

게다가 자고로, 가장 높이 올랐을 때 추락해야 가장 크게 망가지는 법이었다.

그들이 모든 것을 가졌다고 여겼을 때 절벽으로 밀어 버리는 것.

그것보다 완벽한 복수는 없었다.

“나는 제안을 했을 뿐, 네 뜻에 따르겠다.”

에크하르트는 기꺼이 선택권을 오벨리아의 손에 온전히 들려주었다.

“카테리안느를 가장 사랑하는 건 너니까.”

사랑하는 것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라는 건 분명히 잔인한 제안이었다.

그러니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가 선택권을 가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오벨리아의 시선은 그 속이 대단히 복잡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하든, 두 사람은 돌파구를 찾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

에크하르트는 고민에 빠졌다.

오벨리아의 삶이 1년도 남지 않았다는 의원의 말을 들은 이후로, 그는 단 한 순간도 그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힐켄테데의 권력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가문인 로메네스와 접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성 제국이 르 카르디에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에 반해, 교황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다섯 가문은 대단히 폐쇄적이었다.

그들의 폐쇄성이 어느 정도였냐면, 지금껏 그들의 혈통에는 자국이 아닌 외국인의 피가 섞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지는 신성 제국의 북쪽, 북동쪽, 북서쪽, 남동쪽, 남서쪽에 각각 존재했는데, 영지민들이 아니면 그 영지에 출입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외부인을 영지민으로 쉬이 받아 주지도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그 영지 내에서도 대대로 아는 이들끼리 결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다섯 가문은 르 카르디에의 교리를 전파하는 것 외에 굳이 외부와 교류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힐켄테데라고 한들 쉬이 접촉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신성 제국과 연줄이 닿은 자가 필요한데.”

에크하르트가 고민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는 신성 제국과 힐켄테데를 연결해 줄 사람을 알고 있었다.

신성 제국은 나라의 권력을 손에 쥔 다섯 가문이 저런 식으로 외부를 배척하다 보니, 나라 내의 분위기 자체가 신도에 대한 예의는 다하되 외국인과 친근히 지내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수년간 신성 제국에서 유학하고, 그곳에서 배척받지 않고도 잘만 어울린 사람.

에드먼드 이프넌트.

오벨리아의 소꿉친구는 에크하르트가 원하는 일을 해 주기에 아주 적격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넘어야 할 난관이 있었으니, 오벨리아가 시한부라는 사실을 에드먼드가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현재 일리어스와 에드먼드에게 자신이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신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에드먼드에게 도움을 요청하자고 한다면 오벨리아는 분명히 반대할 터였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에 회의적이었으니까.

그러므로 에크하르트는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오벨리아의 의중을 거스르고, 에드먼드에게 비밀을 발설할지 결정해야만 했다.

그건 에크하르트가 스스로의 말을 어기는 일이었다.

애초에 오벨리아에게 말할지 말지 결정하라고 먼저 이야기한 것은 그였으므로.

에크하르트는 한참을 고뇌했다.

그리고 곧 그는 자신의 그림자 기사를 불러들였다.

“……이프넌트 후작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은데.”

결국, 에크하르트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일을 하기로 했다.

“특히, 대공비는 절대 몰라야 한다.”

에크하르트는 끝내 자신의 말을 스스로 어겼다.

***

“선황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선황제의 시종장은 언제나 할 말이 있을 때만 알렉산드로를 찾아오고는 했다.

선황제와 알렉산드로가 애초에 그리 살가운 부자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는 선황제의 시종장이 자신을 찾아오는 게 전혀 달갑지 않았다.

“……선황께서 날 왜 부르시는 거지?”

그래서일까, 알렉산드로는 처음으로 선황제의 부름에 곧바로 긍정을 표하지 않고 시종장에게 질문을 건넸다.

“저로서는 폐하의 의중을 알 수 없습니다.”

폐하.

그 단어가 마치 시종장은 여전히 알렉산드로가 아닌 선황을 황제로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의 속에서 분노가 순간 치밀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선황의 시종장에게 여전히 감히 화낼 수가 없었다.

“……알겠다, 가지.”

결국 알렉산드로는 속에서 치미는 감정을 꾹 내리눌러 삼키고 시종장을 따라 선황제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의 안에서는 반발감이 들끓었다.

현 황제는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여전히 황제인 것처럼 구는 제 생물학적 아버지가 매우 탐탁지 않았다.

만약 그가 선황제보다 힘이 있었다면, 절대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황제에게 도착했을 때, 선황제는 좋지 않은 알렉산드로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 없다는 듯이 본론을 말했다.

“황비를 들여라, 알렉산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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