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5)
선황제가 에크하르트를 그저 선의로 구했을 리 없었다.
‘그자를 살려 두어라. 그러면 분명 나중에 그자에게 지워 둔 빚을 받아낼 날이 있을 테니까.’
분명 선황제는 에크하르트에게 무언가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만약 선황제가 힐켄테데에게 받아낼 것이 있었다면, 선황은 에크하르트가 아니라 전대 힐켄테데 대공을 살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추측하길, 혹시 에크하르트가 신성 제국과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론체스터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굳이 어디서 무얼 필요로 하겠는가.
물론, 이것은 단순히 오벨리아의 추측일 뿐이었다.
아직 아무 증거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에크하르트를 내보낸 것이기도 했다.
그의 속을 괜한 말로 휘젓고 싶지 않았다.
“체임벌린 신관, 그대에게 하고 싶은 부탁이 있어.”
오벨리아는 한때 황실 사람이었기에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리고 그녀가 알기로 체임벌린은 늘 한결같이 중립파를 표방해 왔다.
즉, 에크하르트가 어느 가문의 사람일지라도 목숨을 위협당하거나 그럴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그대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기 어렵다고 하니 더는 캐묻지 않겠어. 다만- 닮았다고 한 사람과 에크하르트의 관계를 조사해 줘.”
사일러스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그제야 오벨리아가 자신에게 이것저것 물었던 이유를 짐작했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대공 전하께서 그분의 핏줄이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일러스의 목소리가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듣기라도 할 것처럼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였다.
“나도 확신할 수 없어. 그렇지만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정황이 있어서 그래.”
사일러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면 직접 조사하도록 하죠.”
잠시 고심하던 사일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대공비 전하께서는 이 일을 반드시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약속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일러스의 얼굴이 심각했다.
그 표정에 오벨리아는 이 일이 어쩌면 단순히 신성 제국의 고위 귀족가, 정도로 끝나지 않을 무거운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 절대 내 입이 열릴 일은 없을 거야.”
오벨리아가 굳게 약속했다.
어쩌면, 에크하르트에게 아주 작은 빚 하나쯤은 갚고 떠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
알렉산드로는 오늘 회의에서 황후 간택에 참여할 후보들과 함께 황비 또한 뽑겠다고 선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시종이 달려와 다급하게 말을 전했다.
“황제 폐하, 신성 제국에서 사신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의 계획은 당연히 실현될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가 휙 에크하르트의 쪽을 돌아봤다.
갑작스러운 신성 제국 사신의 방문이라니!
이런 수작을 부릴 상대는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들라 해라.”
그러나 사신이 찾아왔다는데, 막 즉위한 황제로서 내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알렉산드로가 이를 아득 갈며 허락을 내렸다.
“론체스터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사일러스 체임벌린 백작이라고 합니다.”
사일러스가 웃는 낯으로 알렉산드로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알렉산드로는 방해 받은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인자한 낯을 꾸며냈다.
“론체스터 제국에 온 것을 환영하네. 준비가 미흡하여 혹시 손님을 맞이하는 데 부족함이 있을까 살짝 염려되는군.”
제국의 황궁에 손님을 맞이할 무언가가 부족할 리가 없었다.
알렉산드로의 말은 사일러스가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들이닥쳤다는 말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불쑥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반갑게 맞이해 주신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알렉산드로에게 대응하듯 사일러스의 말에도 가시가 있었다.
누가 봐도 알렉산드로의 반응은 반가운 상대를 대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일러스는 굳이 은혜까지 들먹여가며 알렉산드로가 자신을 대단히 반긴 것처럼 말한 것이다.
“……그래, 그대가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야 고맙지.”
알렉산드로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불쑥 찾아온 사일러스가 탐탁지 않아도, 신성 제국의 사신을 이 이상으로 면박을 줄 수는 없었다.
“한데 신성 제국에서 어쩐 일로 론체스터를 찾은 것이지?”
“얼마 전, 론체스터의 황제 폐하께서 새로운 반려를 맞이하려 하신다는 사실을 교황 폐하께서 전해 들으셨습니다.”
알렉산드로가 움찔했다.
라이너스가 교리를 어기고 황비를 들이자고 했던 그 날의 일이 교황의 귀에 들어갔다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제 폐하께서 오랜 반려를 잃으신 일에 대해 상심이 깊으실 거라고 교황 폐하께서 얼마나 걱정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알렉산드로가 일그러지는 표정을 애써 무표정으로 갈무리했다.
그러니까 사일러스의 말은 오래 헌신한 황태자비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황후를 맞이하려 든다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황후 폐하를 맞아들이신다니 교황 폐하께서 특히 기쁘셨나 봅니다.”
알렉산드로가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건 말건 사일러스는 능청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를 보내신 겁니다. 론체스터의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맞이하시는 것에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이, 제가 바로 그 자리에서 증인이 되어 드리려고요.”
황족과 귀족의 결혼에는 신관이 증인을 서는 것이 관례였다.
신이 축복하는 결혼.
겉보기 치레에 불과했으나 명예와 체면을 소중하게 여기는 귀족들에게는 필수적이었다.
“……고맙군.”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얼핏 들으면 정말로 교황이 알렉산드로를 위한 것처럼 보일지 몰랐다.
증인이 될 만한 신관은 신성 제국에 따로 요청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으니, 겉으로는 좋아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이 일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
‘오벨리아……!’
아득, 알렉산드로의 잇새로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벨리아가 황후와 황비를 둘 다 두려는 그의 속내를 눈치챈 것이 틀림없었다.
신성 제국에서 결혼의 증인으로 온 신관이 황후를 인정한 자리에서 곧바로 황비를 부정해 보라.
누가 그 사람을 황비로 대하겠는가.
이렇게 되면 황후와 황비를 동시에 들여서 남들이 반발할 틈도 없게 만들겠다는 계획은 허사가 되는 셈이었다.
적어도 황비는 신성 제국의 신관이 론체스터 제국을 떠난 뒤에 맞아야, 신관에게 거부당한 결혼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그대가 온 것은 매우 반가우나, 회의 중이어서 말이야.”
알렉산드로가 사일러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사일러스를 더 보고 있다가는 속이 터져 폭발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이런, 제가 중요한 때에 훼방을 놓았군요. 폐하의 말씀대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미 할 말을 다했기에 사일러스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사일러스가 회의실을 나가자마자, 에크하르트가 한 손을 들었다.
“……힐켄테데 대공,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저도 황후 간택 후보를 추천하려 합니다.”
회의가 재개되자마자 준비된 듯 꺼내진 에크하르트의 말에 알렉산드로는 그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방법이 없었기에, 알렉산드로는 결국 에크하르트의 말을 얌전히 듣는 수밖에 없었다.
“엘라사나 로이안 영애를 황후 간택의 후보로 추천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에크하르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알렉산드로의 얼굴은 참을 수 없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알라사나 로이안.
그녀는 현재 사교계 내에서 아그네스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황후 간택 경연을 치를 후보는 총 세 사람으로 결정되었다.
로이안 후작가의 엘라사나, 이멜리언 백작가의 아그네스, 몬티어스 백작가의 비비안나가 그 후보였다.
그로 인해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의 방으로 오자마자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알렉……! 어쩌자고 엘라사나 로이안을 황후 후보로 올린 거야! 그년이 나를 얼마나 멸시하는지 몰라서 그래?!”
카테리안느 공작가에 아그네스를 입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스더 백작이 오벨리아의 명령에 의해 라이너스의 편을 들고 있다고 해도, 카테리안느의 수많은 가신과 원로들의 동의를 받는 데에만도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그 외에도 처리해야 할 게 수없이 많아 아그네스의 입적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사교계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는 엘라사나가 황후 후보에 오르게 되었으니, 아그네스의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정한 게 아니야.”
알렉산드로가 짜증을 삼키며 말했다.
에크하르트가 엘라사나를 추천하자마자, 다른 귀족들 또한 기다렸다는 듯이 추천했다.
그럴 만도 했다.
로이안 후작가는 현재 귀족파의 수장이었다.
그들을 따르는 귀족들이 줄줄이 동의하고 나서니 알렉산드로로서도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었다.
“알렉, 너는 맨날 안 된다, 어쩔 수 없다, 그런 말만 하지……! 황제가 되면 뭐든 해 줄 거라며! 대체 네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아그네스는 엘라사나가 어지간히 싫은 모양인지 길길이 날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의 인내심은 쉽게 한계에 달했다.
“닥쳐! 이제 그만 좀 해!”
그렇지 않아도 오벨리아에게 크게 한 방을 먹어 열이 뻗쳐 있던 알렉산드로였다.
그래도 엘라사나가 황후 후보에 추대된 것이 미안하여 찾아왔는데, 그는 괜히 아그네스를 보러 왔다고 후회했다.
“이미 정해진 일이야, 넌 조용히 경연이나 준비해!”
알렉산드로가 제멋대로 명령하고는 아그네스의 방을 나가 버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녀는 두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 떨었다.
“역시…… 난 널 온전히 못 믿겠어, 알렉산드로.”
아그네스가 다급히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