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68화 (68/136)

68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7)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건 도박이었다.

사일러스는 지금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면목이 없는 듯 오벨리아와 두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괜찮아.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실 때부터, 그것에 해독약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오히려 이렇게 시도라도 해볼 수 있게 알아와 준 그대에게 고마워.”

오벨리아가 담담하게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수그린 사일러스를 달랬다.

이건 그가 미안해할 문제가 아니었다.

“내게 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겠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다른 독을 잘못 먹었다가 너무 빨리 스러지면, 그간 오벨리아의 복수 계획은 모두 허사가 되는 셈이었다.

“…너무 늦게 답을 주시면 안 됩니다. 날이 갈수록 몸이 안 좋아지고 계시는지라, 가루다의 불씨를 이용하여 치료를 한다고 해도 그조차 통하지 않는 날이 오실 수도 있습니다.”

“알겠네.”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진찰을 받으며 사일러스와 대화를 좀 더 나누었으나, 더는 다른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

황후를 간택하기 전에, 황후 후보들을 위한 연회가 황궁에서 열렸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북부에서도 그렇듯 다정한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며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것이 알렉산드로의 심기를 거슬렀다.

왜냐하면, 아그네스가 아무리 싫어해도 결국 엘라사나 로이안이 황후 간택 후보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는 서로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대방이 야속하여 매일을 다툴 지경이었고, 하루도 서로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더없이 사이가 좋아 보이니, 알렉산드로의 심기가 꼬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알렉산드로가 문득 오벨리아에게 다가간 것은.

“대공, 대공비.”

그 순간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 모두 표정이 굳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은 저 미친놈이 서로가 언제 가까웠다고 뜬금없이 다가와 자신들을 부르는지, 해괴한 것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쨌든 알렉산드로는 현재 황제였으므로,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과 달리 허리를 숙이지 않고 가볍게 목례만 하자, 이번에는 알렉산드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황제에게 건네는 인사에 각도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법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황제가 허리를 덜 굽혔다는 것을 이유로 예의가 없다 지적한다면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귀족은 황제에게 괜히 꼬투리를 잡히기 전에 알아서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황제가 그렇게 대할 수 없는 상대가 이 제국에 딱 둘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힐켄테데와 카테리안느였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태도는 그 점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알렉산드로는 대단히 거슬렸다.

황제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주, 많이.

“내가 대공비에게 춤을 청할까 하는데.”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에게 손을 내민 것은 그래서 든 반발심이었을지도 몰랐다.

그저 그는 자신이 황제이기에 춤을 거절할 수 없을 그녀가 보고 싶었다.

“…폐하께서요?”

역시나 오벨리아의 얼굴빛은 좋지 않아 보였다.

물론, 사교계에서 오랜 세월을 버텨온 그녀의 표정은 겉으로는 태연해 보였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오벨리아와 함께 해온 세월이 있기에 알렉산드로의 눈에는 보였을 뿐이었다.

“영광입니다.”

어쨌든 아무리 힐켄테데의 대공비라고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황제가 내민 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에게 티끌만큼 닿는 것조차 역겹고 치가 떨리게 싫다고 생각하든 말든, 그녀의 손이 알렉산드로의 손 위에 얹어졌다.

그 순간, 알렉산드로는 움찔하며 에크하르트의 쪽을 쳐다봤다.

에크하르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알렉산드로를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알렉산드로만을 노린 기세는 그의 등골을 쭈뼛쭈뼛 서게 만들었다.

알렉산드로가 확 미간을 찌푸렸다.

에크하르트의 행동에 일순 위협을 느꼈던 게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알렉산드로는 이를 악문 채 붙잡고 있던 오벨리아의 손을 순간적으로 확 끌어당겼다.

어차피 지금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건 대공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아…!”

그 힘에 몸이 앞으로 쏠리자, 오벨리아에게서 작은 비명이 흘렀다.

탁.

그러나 그녀를 바로 세우는 것은 알렉산드로보다 에크하르트가 더 빨랐다.

오벨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아 받쳐 든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안정적으로 제게 기대게 만들었다.

“전하, 제 아내를 조심히 대해주십시오.”

에크하르트가 굳은 눈으로 알렉산드로를 쳐다봤다.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그것은 분명 경고였다.

“하… 그러지.”

알렉산드로의 입매가 비틀렸다.

‘제 아내.’

그 단어가 어쩐지 아주 대단히 거슬렸다.

그가 쉽게 그러겠노라 대답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를 에크하르트에게서 떼어놓고 싶었다.

“에크하르트, 난 괜찮아.”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돌아보며 제 허리에 감긴 그의 팔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녀의 말에 굳건히 있던 팔이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풀어졌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곧바로 오벨리아의 곁에서 물러나지 않은 채 물었다.

“정말로, 괜찮겠나?”

에크하르트는 마치 알렉산드로에게 닿는 것조차 혐오하던 오벨리아를 아는 것처럼 물었다.

그는 그녀가 괜찮지 않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건강을 핑계로 연회장에서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다.

본디 아무리 대공이라도 황제를 그렇게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에크하르트는 충분히 수습할 자신이 있었다.

“진짜 괜찮아.”

그러나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바람대로 그의 뒤에 숨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에크하르트가 느릿하게 그녀를 완전히 놓아주었다.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알렉산드로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가지. 춤 한 번 추려다가 날 새겠군.”

결국 알렉산드로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오벨리아를 재촉하여 플로어로 향했다.

그녀가 알렉산드로와 함께 걸어가는 동안에도, 에크하르트의 시선은 쭉 오벨리아를 향해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순간 에크하르트의 시선에서 그녀를 가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무슨 수작이야?”

그러나 알렉산드로와 마주보자마자, 오벨리아가 추궁하듯 물은 탓에 그의 주의는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무엇이?”

어차피 오벨리아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었고, 알렉산드로 또한 그녀의 정체를 알았다.

대화 소리쯤이야 오케스트라의 연주 소리에 묻힐 테니, 오벨리아든 알렉산드로든 굳이 말투를 고를 필요가 없었다.

“왜 나한테 춤을 신청하냐고.”

오벨리아의 눈빛이 숫제 미친놈을 보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회의 주인공으로써 뒤늦게 등장한 아그네스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오벨리아와 알렉산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그네스가 조금만 있으면 올 걸 알면서도 굳이 왜 나한테 이래? 혹시 멀쩡한 부인 두고 다른 사람이랑 놀아나는 게 네 취향인가?”

단언컨대 오벨리아도 아그네스의 편을 들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아그네스가 좋다고 자신의 뒤통수를 치더니, 그렇게 해서 옆에 둔 여자가 보고 있는데도 자신과 뻔뻔히 춤을 추는 알렉산드로의 작태가 더 어이없을 뿐이었다.

“글쎄.”

알렉산드로의 대답은 성의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운 놈이 미운 짓만 골라하니 오벨리아는 이 춤곡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처음에는 알렉산드로가 무슨 꿍꿍이로 춤을 신청하는지 알아내려 했는데, 지금은 그냥 맞닿아 있는 게 역겨워서 빨리 떨어지고만 싶었다.

“그보다- 힐켄테데 대공이랑은 언제 그렇게 가까워진 거지?”

오벨리아의 질문에는 대충 대답한 주제에,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라는 듯 알렉산드로가 그녀를 집요하게 쳐다봤다.

“미친놈. 너 따위가 무슨 상관인데?”

아, 정말이지 짜증이 치밀었다.

“네가 나한테 뭐라고? 너, 이제 아무것도 아니잖아.”

오벨리아는 그것을 숨기지 않고 경멸의 말을 내뱉었다.

8년.

그녀가 알렉산드로를 위해 산 나날이 무려 8년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가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려버렸다.

알아차린 스스로가 너무 싫을 지경으로.

오벨리아는 당장이라도 알렉산드로에게 붙잡힌 손을 쳐내버리고 싶었다.

맞닿은 면으로부터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타인과 함께 있으니 제 것을 뺏긴 듯 불쾌한 모양이었다.

알렉산드로나 라이너스나 정말로 싫었다.

저들이 버린 주제에, 저들이 언제고 마음대로 주울 수 있는 물건 취급을 하는 게.

“저자도 알고 있나? 네가 나를 위해서 그의 집안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의 속을 뒤집어놓길 멈추지 않았다.

“내가 힐켄테데의 모든 이들을 죽였고, 네가 그것을 은폐했는데- 그래도 너와 있는 게 괜찮다던가?”

알렉산드로의 말에 오벨리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자신이 에크하르트에게 저지른 죄악이 그녀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볼수록 알렉산드로의 입매는 더더욱 뒤틀렸다.

에크하르트라는 이름이 오벨리아를 뒤흔들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순간, 알렉산드로는 에크하르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오벨리아가 곁에 있을 때는 그래도 나름 갈무리를 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살기등등한 에크하르트의 두 눈이 알렉산드로를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는 보란 듯이 상체를 기울여 오벨리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무슨 짓…!”

오벨리아가 치를 떨며 알렉산드로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속삭임이 그녀의 귀에 닿는 것이 더 빨랐다.

“오벨리아, 너 설마- 힐켄테데 대공을 마음에 뒀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