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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69화 (69/136)

69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8)

오벨리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알렉산드로가 그새를 틈타 오벨리아의 허리에 감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저자한테 그런 짓을 해 놓고?”

오벨리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에크하르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주제를 알아야지, 오벨리아.”

귓가에 속삭여지는 알렉산드로의 목소리는 끔찍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오벨리아는 그의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사랑.

그게 사랑인가?

사랑은 아니었다.

오벨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에크하르트에게 흔들리는 이 마음은 사랑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로를 마음에 담았을 때처럼 맹목적이지도 않고, 에크하르트가 없으면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알렉산드로의 말대로 감히, 주제에, 에크하르트에게 흔들리는 이 이기적인 마음이 어떻게 사랑이란 말인가.

이런 건 사랑일 수가 없었다.

아마도, 아무도 곁에 없으니 누구라도 붙잡고 싶은 그런 철저한 이기심이리라.

오벨리아는 그대로 굳어 버린 밀랍 인형처럼 숨만 쉬었다.

제 이기심이 스스로를 짓눌렀다.

“오벨리아.”

알렉산드로의 팔이 뱀처럼 오벨리아의 허리에 얽혔다.

그 오벨리아 카테리안느가 에크하르트 때문에 이토록 흔들리다니.

알렉산드로는 표정이 온통 찌푸려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속이 끓었다.

제 손에 죽음을 맞이할 뻔한 그 날까지, 자신을 사랑하여 저를 맹목적으로 믿던 여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몇 달 사이에 다른 사내에게 그 마음이 흔들리다니.

8년을 제 것으로 살았다.

알렉산드로는 제 것을 빼앗기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너를 살려 줄 수도 있어.”

“……뭐?”

생각에 빠져 있던 오벨리아의 두 눈이 마침내 알렉산드로를 향했다.

그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알렉산드로의 착각이었다.

오벨리아는 그의 헛소리에 정신이 확 든 것뿐이었으니까.

“네가 지금이라도 힐켄테데 대공을 등지겠다고 한다면…….”

하지만 알렉산드로는 그런 오벨리아의 기색을 읽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너 이제 개 짖는 소리도 하니?”

물론,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의 말을 더는 들어주지 않았다.

헛소리해도 수준이란 게 있었다.

그의 말은 지금, 그녀더러 에크하르트를 배신하고 다시 황실 쪽에 붙으란 말이 아니던가.

뒷말을 더 들으면 귀만 더럽힐 헛소리였다.

“그 사이 말이 험해졌네, 안 좋은 것만 배우고 다니는군.”

오벨리아가 단번에 제 말을 부정하자, 알렉산드로의 표정이 도로 굳었다.

그의 어투가 마치 정말로 잘못한 아이를 혼내는 듯 훈계조였다.

“하…… 그럼 너를 여기서 어떻게 더 곱게 대해? 내가 여기서 너를 찢어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

오벨리아는 춤을 추며 몸을 돌리는 순간을 이용하여 제 허리에 감긴 알렉산드로의 팔을 홱 떼어냈다.

“감히 나한테 손대지도 마. 소름 끼치니까.”

한때, 오벨리아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름도 바꾸고, 전혀 다른 사람인 척 알렉산드로에게 접근하여 그의 약점을 캐내어 볼까.

그와의 사이에서 있는 추억을 상기시켜서 동요하게 만들어 볼까.

그러나 그녀는 금방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알렉산드로는 바보가 아니다.

그의 경계심은 드높았다.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의 경계심을 낮추느라 자신의 시한부 삶을 모조리 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나 증오하는데, 어떻게 그 앞에서 살랑거리며 웃겠느냔 말이다.

“앞으로는 이딴 개수작 부리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폐하.”

드디어 춤이 끝났다.

오벨리아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거든요.”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에게서 홱 등을 돌렸다.

그의 반응 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오벨리아.”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건넸다.

오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에크하르트의 손을 붙잡았다.

아, 어쩐지…… 이제야 제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빳빳하게 굳었던 그녀의 어깨에 힘이 풀렸다.

그제야 오벨리아는 자신이 잔뜩 긴장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렉산드로와의 신경전이 꽤 많은 심력을 소모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연회에 있을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돌아갈까?”

에크하르트의 시선이 차분히 오벨리아를 살폈다.

그녀는 그가 제 피곤함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감이 좋고 배려심이 넘쳐나는 남자였다.

“어차피 아그네스 이멜리언도 아까 돌아가 버렸고.”

에크하르트의 말에 오벨리아가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제게 다가오는 그에게 시선이 팔려, 아그네스가 더는 연회장에 없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언제 사라진…….”

아그네스는 황후 후보 중 하나였고 이 연회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사라지다니.

에크하르트에게 그것에 관해 물으려던 오벨리아가 순간 멈칫했다.

‘……진짜로, 몰랐어.’

드레스 자락을 쥔 오벨리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알렉산드로와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완전히 지쳐 버렸다.

그런데 에크하르트를 보자마자, 오직 그만이 그녀의 시야에 남았다.

오벨리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러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순간 경고등이 그녀의 머릿속을 울려댔다.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에크하르트에게 붙잡힌 손을 홱 빼냈다.

“……오벨리아? 어디 아픈 건가?”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행동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떨리는 손과 달라진 행동.

충분히 이상하다고 여길 만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녀를 살펴보려는 듯 가까이 다가섰다.

“거기……!”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다급히 주변을 힐끔거렸다.

다행히도 오벨리아를 힐끔대는 이들이 없는 것을 보니, 순간적으로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거기 있어,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다급히 목소리를 낮춰 말을 덧붙였다.

에크하르트는 순순히 그녀의 말대로 멈춰 섰으나, 오벨리아는 안심할 수 없었다.

“안 잡아 줘도 돼. 나 혼자서도 걸을 수 있으니까.”

오벨리아가 바쁘게 걸음을 서둘렀다.

그녀는 일부러 에크하르트를 휙 지나쳐 연회장을 나섰다.

뒤에 남은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갑자기 싸늘해진 오벨리아의 행동이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왜 갑자기 그러냐고, 당장 그녀를 불러 세울 수는 없었다.

이곳은 보는 사람들이 많은 황실이었으니까.

결국 에크하르트는 마차에 돌아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벨리아가 한 번을 뒤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에크하르트를 인식하여 오벨리아와 가까이하는 알렉산드로를 본 순간, 아그네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연회장을 박차고 나왔다.

와장창!

“아아악! 어떻게 내 앞에서…….”

아그네스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신경질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장식장 위의 꽃병을 집어 들어 내동댕이쳤다.

오벨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아가며 꼭 붙어 있던 알렉산드로가 그녀의 머릿속에 선명했다.

애초에 황후 후보 중에 아그네스와 가장 먼저 춤을 추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래야만 그녀가 누구보다 유력한 황후 후보임을 모든 귀족에게 인지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알렉산드로는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는 깡그리 잊어버린 채로 오벨리아와 첫 춤을 추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한테 이런 치욕을 겪게 해?!”

쾅! 쿵! 와르륵.

아그네스는 온 방 안을 날뛰며 이것저것 집어던졌다.

황제의 정부가 황제에게 버림 받은 것이냐며 수군수군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잊히질 않았다.

원래는 황후 후보에 오를 수도 없었던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의 총애를 얻어 황후 후보가 되었다.

그게 귀족들의 인식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을 방 안을 때려 부수고도 아그네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에게서 떨어져 나간 후, 오벨리아를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아그네스를 더더욱 화나게 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리고 노크 소리도 없이,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의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그네스는 현재 황제의 정부일 뿐이었으니 공식적으로 궁을 하사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그네스는 황제 궁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그녀가 개인적으로 데리고 있던 시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알렉산드로의 사람이었다.

그 탓인지 아무도 알렉산드로의 방문을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너를 위한 연회인데, 주인공인 네가 사라지면…….”

황궁의 고용인들조차도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은 아그네스의 분노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그녀가 대뜸 알렉산드로의 말을 끊어 버렸다.

“내가 주인공이기는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애초에 네가 바라서 연회까지 열어 줬는데, 넌 대체 뭐가 불만인데!”

목소리를 높이는 아그네스의 행동에 알렉산드로가 확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굳이 이렇게 황후 후보들을 위한 연회를 열 필요도 없었다.

아그네스가 자신만이 황후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 달라며 요구하지만 않았어도, 굳이 이 정도 일로 이토록 화려한 연회를 벌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알렉산드로는 기껏 요구를 들어주었더니 화를 내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내가 주인공이라면서 그년이랑 첫 춤을 춰서 모두 망쳐 버린 게 누구인데!”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그네스도 지지 않았다.

오벨리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실은 아그네스가 늘 불안해했던 일이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왜, 인제 와서 그년에게 미련이라도 있어?!”

아그네스가 바람 피운 남편을 추궁하듯이 소리쳤다.

춤을 추는 동안 끊임없이 어떤 대화를 나눴던 오벨리아와 알렉산드로.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오벨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의 등.

그 모든 것들이 아그네스를 미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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