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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71화 (71/136)

71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10)

체임벌린 신관과 마주하자마자, 오벨리아는 본론을 꺼냈다.

“치료하지 않겠어.”

“……결심을 굳히셨군요.”

오벨리아의 말이 워낙 단호하여, 사일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기껏 제시한 방법이 사실 치료 방법이라고 말하기에도 뭐 했기에, 강요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사일러스를 무언가 찜찜하게 만들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하지 않으시려는 건지 제가 여쭤도 되겠습니까?”

“체임벌린 신관이 에크하르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사일러스의 입이 다물렸다.

오벨리아가 끝까지 모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알고 있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일러스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약속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에크하르트가 애초에 날 치료하기 위해 데려왔다는 거 알아. 그러니 당연히 말하지 않기는 힘들겠지.”

오벨리아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건 사일러스를 통해 에크하르트의 귀에 모조리 들어갈 것임을 알면서도 하는 말이었다.

“난 이왕이면 그대가 에크하르트에게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

오벨리아는 아마도 사일러스가 그녀를 치료할 여부에 관하여 아직 에크하르트에게 말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그와 대화를 나눠 본 바, 사일러스는 상당히 좋은 의원이었다.

아무리 에크하르트가 사일러스를 데려왔다지만, 환자가 아직 결정하지도 않은 내용을 굳이 전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대공 전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어째서 굳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다행히도 오벨리아의 예상대로 들어맞았다.

그녀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치료를 받는다고 해도 오히려 더 빨리 죽을 수도 있어. 그 치료를 받다가, 만약 내가 더 빠르게 죽으면…… 에크하르트는 가지지 않아도 될 죄책감을 느끼게 될 거야.”

물론, 그저 에크하르트를 생각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살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자라날 헛된 마음.

오벨리아는 그것이 싹도 트지 못하도록 짓밟아 버려야 했다.

“제가 거짓을 말할 수 없다면요?”

“그건 그대의 선택이니,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

그렇지만 오벨리아는 사일러스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대로만 전해도, 에크하르트 또한 쉬이 결정하지 못할 터였다.

사일러스가 제안한 치료는, 치료라는 명목으로 또 다른 독을 마셔야 하는 일이니까.

그럼에도 불가능하다고 말해 달라고 한 이유는 에크하르트가 자꾸만 그녀를 살릴 방법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신성 제국의 신관에게까지 답이 없다면, 사실상 대륙 위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니 에크하르트도 포기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만약에, 대공 전하께 방법이 없다고 말씀드려도 포기하지 않으시면요?”

오벨리아가 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쩌면, 사일러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라면 겨우 그 정도로 포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글쎄…….”

오벨리아가 말끝을 흐렸다.

당신은 왜 나를 포기하질 않을까?

괜한 생각이 싹을 튼다.

죄책감.

어쩌면 그 외에도 다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말이지 괜한 생각.

“그러면…… 하,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오벨리아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도저히 모르겠다.

당신의 다정에서 벗어날 방법을.

살면서 무언가 어려운 게 없었던 그녀였거늘, 늘 에크하르트만은 달랐다.

“……우선은 대공비 전하의 뜻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사일러스의 말에 오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말을 꺼내 봤을 뿐, 정말로 그가 제 말을 들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사일러스가 오벨리아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시선이 굳건했다.

마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만큼.

“제가 꼭 치료 방법을 찾아 올 테니, 대공비 전하께서는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오벨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가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공 전하께서 처음 제게 치료를 부탁하실 때, 그러시더군요.”

오벨리아에게는 삶에 매달리고자 하는 그런 절박함이 없었다.

그녀를 이루던 모든 것은 냉궁이 전소하던 날 전부 함께 타 버렸다.

에크하르트는 이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살고 싶어지게 도와달라고요.”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절대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솔직히 의원들이 아니고서야, 정신적인 고통은 노력으로 극복하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특히나 귀족들은 그들의 체면을 생각하여 정신적으로 병이 들었다고 하면 쉬쉬하는 경우가 더욱 많았다.

그래서 사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이용만 할 생각이었다면, 그는 그녀의 정신적인 고통을 모른 척해야만 했다.

힐켄테데의 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더라.

그 소문이 퍼지는 순간, 기껏 완벽히 만든 그의 정통성이 다시 위협받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이제 억울할 지경이었다.

에크하르트가 자꾸만 이런 식으로 구는데, 어떻게 자신이 그에게 마냥 무관심하게 굴 수 있단 말인가.

“대공비 전하께서 왜 살고 싶어 하지 않으시는지, 저는 완벽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만.”

이미 오벨리아의 복잡한 속을 사일러스가 더욱 뒤흔들어 놓았다.

“적어도 대공 전하께서는 진심으로 대공비 전하께서 살아가시길 바라십니다.”

살아지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생을 연명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나아가는 것.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다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도저히 지금 드러나 있을 제 민낯을 내보일 수 없었다.

“……이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어요.”

결국 이후 오벨리아가 내뱉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현재로서는 대공비 전하를 살릴 방도가 없습니다.”

사일러스는 오벨리아와 약속한대로 에크하르트에게 말했다.

어차피 오벨리아를 살릴 방법을 찾고, 에크하르트가 누구의 핏줄인지 확인하려면 사일러스가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확정된 일이었다.

그래서 사일러스는 일단 이렇게 말해 둔 뒤에,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서 치료 방법을 좀 더 찾아볼 예정이었다.

“……단, 하나도, 없다고?”

그러나 오벨리아도, 사일러스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에크하르트의 반응이었다.

늘 굳건한 성 같던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끊겼다.

사일러스가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철옹성처럼 변함없던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마치 자신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무언가 방법이 있겠지.”

조금 전 흔들렸던 것과 달리, 사일러스의 말을 부정하는 에크하르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단호했다.

일견 그렇지 않으면 절대 안 될 것처럼.

“더 찾아 봐라. 필요한 재화와 인력이 얼마든지 상관없으니.”

아, 사일러스는 오벨리아가 걱정하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그녀의 걱정은 진실에 비해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벨리안은 에크하르트가 자신이 죽은 후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러나, 지금 저 남자의 얼굴이 어딜 보아서 단순한 죄책감밖에 되지 못한단 말인가!

“대공 전하, 그게…….”

순간, 사일러스는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직 조금 더 치료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고 에크하르트에게 말해서 어쩔 생각이던가.

사일러스는 저명한 의원이었기에 냉정하게 판단하여 오벨리아의 상태가 어떤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설령 오벨리아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해도, 현재 몸 상태로 본다면 남들보다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은 물론이요, 그 생이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만큼 길지는 못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치료법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표정을 하는 에크하르트에게 희망 고문일지도 모를 행동을 해도 될지, 사일러스는 판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오벨리아의 말대로 일찌감치 희망을 버리는 것이 혹여나 홀로 남게 될 에크하르트를 돕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게?’ 역시, 아직 무언가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있는 건가?”

그러나 겨우 운을 뗐을 뿐인 말에 에크하르트가 눈에 띄게 반응이 달라졌을 때, 사일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그간 의원으로서 사람을 무수히 상대해 온 사일러스는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관계가 상당히 꼬여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았다.

타인 간의 관계에 끼어드는 것은 오히려 그 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이 되기도 했다.

사일러스는 꼬여 있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자신이 말을 보탠다고 하여 그것이 풀리리라 보장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결국 사일러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숙여 에크하르트를 외면했다.

순간적으로 에크하르트가 휘청거렸다.

“……대공 전하!”

사일러스가 놀라 움찔했으나, 뛰어난 기사인 에크하르트는 금세 균형을 잡아 바로 섰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두 눈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간 수고했다.”

에크하르트가 돌연 말했다.

“그대가 세상의 모든 치료법을 알 수는 없지. 하지만 누군가는 바실리스크의 독을 해독할 방법을 알 거다. 그러니까…….”

에크하르트는 사일러스를 보내고 당장이라도 세계 각국의 모든 의원과 약사들을 불러 모을 듯이 중얼거렸다.

대륙 위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들이 되는 것이 신관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다른 자들을 찾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면 다른 신관이라던가…….”

그러나 사일러스는 에크하르트의 중얼거림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에크하르트가 다른 자를 찾는 것은 그저, 그가 들은 현실을 어떻게든 부정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뿐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행동이 오판이 아니었을까.

사일러스는 또 다시 갈등했다.

그러나 사일러스에게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전하!”

그 순간 에크하르트가 자신의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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