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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72화 (72/136)

72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11)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현재로서는 대공비 전하를 살릴 방도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에크하르트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는 떠올릴 수 없었다.

그냥, 그대로 머리가 텅 비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텅 빈 것이 머리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어딘가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아, 그래.

단언컨대 그것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확신이 드는 순간 에크하르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대공 전하!”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사일러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제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에크하르트가 성큼성큼 걸어서 향한 곳은 오벨리아의 방이었다.

똑똑똑, 똑똑, 똑똑똑.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방에 우뚝 멈춰섰다.

그녀의 방문을 노크하는 손길이 다급했다.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놀란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그전에 없던 에크하르트의 행동에 관한 의아함이 그녀의 표정에 가득했다.

“들어, 가도 되나.”

에크하르트는 어쩐지 목이 멨다.

그리하여 그의 목소리가 다시 뚝, 뚝 끊겼다.

“일단 들어와.”

오벨리아가 재빠르게 문에서 비켜섰다.

에크하르트가 평소와 달리 아주 많이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어쩐지 위태롭다고 느꼈다.

그래서 에크하르트가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오벨리아는 방문을 굳게 닫았다.

지금 그의 모습을 누군가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문을 닫고 난 후, 오벨리아가 곧바로 에크하르트에게 물었다.

그녀의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걱정이 담겼다.

그러나 오벨리아의 물음에도 에크하르트는 한참을 대답이 없었다.

그 무거운 침묵 끝에 그의 말은 상당히 뜬금없는 것이었다.

“……오벨리아, 신성 제국에 가자.”

“무슨 소리야?”

오벨리아에게서 의아함을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여기서 치료 방법을 찾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거 같아. 네 치료를 위해서라면 신성 제국에 가는 편이…….”

에크하르트가 말을 쉬지도 않고 늘어놓았다.

그는 어딘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에크하르트!”

오벨리아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에크하르트의 말을 끊어냈다.

그러자 어딘가 허공을 배회하는 듯했던 그의 시선이 그제야 그녀에게로 향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당신이랑 내가 지금 어떻게 신성 제국으로 가.”

현재 그들은 한참 알렉산드로와 대치 중이었다.

게다가 아직 아그네스의 일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신성 제국으로 떠나버리면, 남은 일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선은 네가 낫고, 복수는 그 후에 해도 돼. 그러니까…….”

“에크하르트, 당신 왜 그래?”

오벨리아가 드물게 에크하르트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왜 이런 걸로 갑자기 우기고 그래. 우린 신성 제국에 못 가. 여기서 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

“……못 가면?”

에크하르트가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오벨리아의 말을 끊어냈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너는 죽는데?”

아, 사일러스가 말을 전했구나.

에크하르트의 말에 오벨리아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에크하르트, 알다시피 난 원래 죽을 목…….”

그러나 오벨리아가 모르는 것도 있었다.

“죽는다고 하지 마!”

예컨대…… 에크하르트에게 마지막 희망조차 없다는 사일러스의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그런 것 말이다.

“당신…….”

오벨리아가 흠칫하며 놀라 에크하르트를 쳐다봤다.

그의 어두운 눈매가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넌, 대체 왜 그렇게 죽는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지?”

반쯤 숙여 있던 에크하르트의 고개가 휙 들렸다.

그의 시선이 어느덧 직선적으로 오벨리아를 향해 있었다.

“나는, 네가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순간, 에크하르트가 격앙된 목소리를 터트렸다.

그러나 채 말을 다 끝맺기 전에, 그의 말이 끊겼다.

에크하르트의 두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죽는다고, 할, 때마다…….”

에크하르트의 중얼거림은 형편없이 뚝뚝 끊겨 나왔다.

오벨리아가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논할 때마다 그가 어떤 기분이었냐고?

발밑이 꺼지고, 누군가 그대로 위에서 그를 처박아 숨조차 쉴 수 없는 곳에 묻어 버리는 듯했다.

숨조차 쉴 수 없어서.

그래서 자꾸만 몸이 굳고, 말을 잃고…….

거기까지 떠올린 에크하르트가 두 눈이 커진 채 오벨리아를 쳐다봤다.

“오벨리아, 나는…….”

때로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어느 날에는 태풍을 불러온다고 한다.

오벨리아는 자신이 가장 원하면서 동시에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비가 날갯짓했음을 깨달았다.

“말하지 마.”

오벨리아가 찰나에 반사적으로 에크하르트의 말을 막았다.

그가 말을 꺼내는 순간, 서로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변하게 되리라는 점을 직감한 탓이었다.

“에크하르트, 지금 당신 뭔가 크게 착각하는 거야. 나한테 미안하고, 내가 가엾고. 그래서 그런 거야.”

이번에는 오벨리아가 말을 마구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자꾸만 꺼낼수록 에크하르트는 도리어 차분해지고 있음을, 오벨리아는 다급하여 눈치채지 못했다.

“당신, 지금 헷갈리는 것뿐이야. 사람의 감정은 워낙 다양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

“오벨리아, 나는 네가…….”

에크하르트가 돌연 오벨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녀의 말이 갑자기 뚝 멎었다.

겁먹은 아이 같은 오벨리아의 두 눈이 그에게 콕 박혔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여자가 겁을 먹지 않을, 그래서 도망가지 않을 그런 말.

그는 말을 고르고 골라 겨우 꺼내놓았다.

“살아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했다.

간절한 마음은 아무리 숨기고 숨겨도 결국 제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었으니까.

“제발…… 살아 줘,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손등에 이마를 대며 간절하게 빌었다.

그가 침음했다.

아, 얼마나 오만했던가.

이런 마음을 죄책감이라고.

이런 마음을 동정심과 연민이라고.

어떻게 그런 식으로밖에 모를 수 있었던가.

에크하르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사그라지지 않을 마음을 무엇 하러 그토록 열심히, 최선을 다해 부정했던가.

“미안해, 네가 원하는 대로 오직 복수만 바라보지 못해서.”

에크하르트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그는 오벨리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게 바라는 온 것은 복수라고 생각했다.

사사로운 감정에 복수를 그르치지 말라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에크하르트는 지금 자신의 감정 때문에 모든 것을 뒤로하고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도저히, 네 손의 온기가 싸늘히 식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어서…….”

에크하르트의 목이 턱 막혔다.

오벨리아가 어떻게 될지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 숨통을 졸라오는 기분이었다.

아, 정말이지 그는…….

“나는…… 네 죽음을 견딜 자신이 없어, 오벨리아.”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석었던가.

에크하르트는 지금 당장이라도 오벨리아에게 무릎 꿇고 빌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제발 살아 달라고.

네가 살기 위해 모든 걸 다해 줄 테니, 살려고 해 달라고.

그냥 죽으려고 하지 말라고.

그 모든 말이 에크하르트의 속에서 엉켜 들었다.

오벨리아의 손을 멋대로 잡은 것.

그게 그가 그녀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무례였다.

에크하르트는 더 이상 오벨리아에게 더 닿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여 멀어질 수도 없었다.

탁.

그 순간, 그녀가 자신의 손을 그의 손안에서 빼냈다.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 해…….”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동시에 그녀가 휙 돌아섰다.

오벨리아가 뛰다시피 방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오벨리아, 잠깐…….”

에크하르트가 반사적으로 그녀를 쫓듯 앞으로 다가갔다.

“거기!”

그것을 느낀 듯이 오벨리아가 소리쳤다.

“거기 있어, 절대, 따라오지 마.”

에크하르트의 온몸이 그대로 굳었다.

방금 자신이 쏟아낸 감정들이 오벨리아가 바라는 것이었는가?

아니.

그의 안에서 절망적인 답이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달칵.

오벨리아가 방문을 열고 제 방을 벗어났다.

***

오벨리아는 도망쳤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도망쳤다.

만약 지금 에크하르트와 얼굴을 마주했다가는, 제 안에 든 감정들을 고스란히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벨리아는 다짜고짜 뛰었고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정신없이 걸어 어딘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정원의 한가운데였다.

그 중앙에 있는 분수대에 비춘 오벨리아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오벨리아의 표정이 곧장 일그러졌다.

‘……에크하르트가 날 좋아해.’

그 사실이 오벨리아의 심장을 쥐고 흔들었다.

동요한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표정, 그녀는 그게 너무 싫었다.

‘염치도 없지.’

그 얼굴이 지금껏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에게 어떤 감정을 바라왔는지 적나라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

“쿨럭……!”

그 순간이었다.

오벨리아에게서 격한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몸이 고통에 의해 앞으로 굽어들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겨우 분수대를 붙잡아 지탱한 오벨리아가 천천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우욱……!”

오벨리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손가락 틈새로 붉은 피가 기어코 비어져 나와 그녀의 가는 손목을 타고 뚝뚝 흘렀다.

그러고도 오벨리아의 기침은 멈출 줄을 몰랐고 그럴 때마다 따뜻한 생의 증거가 그녀의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

한참을 기침하던 오벨리아가 몸을 일으키던 찰나, 그녀의 손에 묻어 있던 피가 분수대의 맑은 물에 떨어졌다.

물에 곧바로 붉은색이 퍼졌다.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시고 죽게 된다면, 어느 날엔가 피를 모조리 토하며 죽을 거라고 했다.

붉게 물든 분수대처럼, 어느 날엔가는 저 많은 붉은색이 고스란히 오벨리아의 피로 채워질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재차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피를 쏟아서일까.

오벨리아의 얼굴이 어느덧 창백하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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