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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73화 (73/136)

73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12)

죽는다.

지금까지 오벨리아에게 그 사실은 그다지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냉궁을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복수라는 사념으로 움직이는 시체.

그게 오벨리아였다.

‘나는…… 네 죽음을 견딜 자신이 없어, 오벨리아.’

그렇지만 때로는 어떤 말 한마디가 세상을 뒤집어 버리기도 하는 법이었다.

에크하르트가 그 말을 한순간, 오벨리아의 세상은 변해 버렸다.

그녀는 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고 제 몸에 열기가 빠르게 오르는 것을 체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건 죽은 사람은 겪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아아…….”

오벨리아가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죽는다.

이 사실이 인제 와서 두려웠다.

이 사실이 인제 와서 거부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스스로 인지한 진실은 그녀를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살고 싶다.

그렇게 깨달은 사실에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부정하고 부정해도 소용없었다.

오벨리아는 하필 이 죽음의 끝에서 살고 싶었다.

그 사실에 홀로 놀란 듯 그녀는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풀썩.

약해진 몸은 그것만으로도 핑 머리가 돌아,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야했지만.

“……안 돼.”

오벨리아의 손이 잔디를 그러쥐었다.

눈을 감으니 그 앞에 에크하르트의 모습이 선연했다.

오벨리아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그녀보다 더욱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던 그가.

그래서는 안 됐다.

오벨리아가 없어도 에크하르트는 행복해질 수 있어야 했으니까.

당신이 내게 마음을 두었다.

그 사실은 오벨리아의 귓가에 심장 박동을 들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마음을 꺾어야만 했다.

그 마음이 끝내 잔혹한 이별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미안해…… 미안해.”

오벨리아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울음조차 토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잔인한 존재이기만 하구나.

그 사실이…… 그녀에게서 울 자격조차 앗아갔다.

아, 당신과 행복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당신과 내가 우리가 되는 순간 그 끝은 비극이라.

그래서 그녀는 차마 그와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오벨리아의 두 눈이 어떤 결심으로 결연하게, 그러나 어둡게 가라앉았다.

***

그 후,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 사이 미묘한 냉전이 지속되었다.

그가 말을 걸려고 하면 그녀가 들으려 하지 않은 탓이었다.

“힐켄테데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그 와중에 레베카가 북부에서 수도의 힐켄테데 타운하우스로 돌연 찾아왔다.

자신에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보며 에크하르트가 표정을 굳혔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내가 일전에 분명히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경고했던 거 같은데.”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이상, 일전에도 그랬으나 앞으로는 더더욱 누구에게도 여지를 줄 생각 따위 없었다.

특히나 대공비가 있는 곳에 허락도 없이, 대공비 후보로 거론되던 사람이 찾아오다니.

오벨리아에게 딱 오해를 사기 좋은 상황이 아닌가.

그 생각에 그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게 아니라……! 대공비 전하께서 부르신 거예요.”

움찔한 레베카가 빠르게 외쳤다.

사교계에서 얻은 정보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녀가 알던 것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레베카는 한참 사교계에서의 활동에 재미를 붙인 터였다.

사교계는 잠깐 떠나 있기만 해도 그 세태가 휙휙 바뀌는 터라, 그녀도 오벨리아의 요청이 아니었으면 굳이 북부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가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그런 소리를 오벨리아에게서 들은 적이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무례를 사과하지.”

오벨리아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러니 레베카가 괜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닐 터라, 에크하르트는 순순히 그녀에게 사과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어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던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크하르트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왠지 예전과 조금 달랐다.

일전에는 마치 그를 향한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칠 것처럼 굴었다면 지금은 아니랄까.

그래서 오히려 에크하르트는 이전보다 레베카를 대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에필로나 영애, 달라졌군.”

“겪어 보니 생각보다 세상의 전부가 대공 전하는 아니시더라고요. 제 인생을 결혼 하나에 매달기에는 너무 아까워졌달까요.”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알았다.

이는 오벨리아가 만들어낸 변화라는 걸.

“그래서 말인데, 저 대공 전하 포기하려고요. 물론 전하께서는 제가 그러든 말든 상관없으시겠지만.”

레베카는 아쉬움 하나 없이 후련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에크하르트가 알아 주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저 스스로, 오랜 짝사랑에 안녕을 고하는 행위였을 뿐이니까.

“대공비 전하는 어디 계세요?”

레베카는 이제 에크하르트보다 오벨리아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공비 전하의 시녀에게 물어보니, 저를 이쪽으로 안내해 줘서…….”

순간,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간 어떤 가정 때문이었다.

“에필로나 영애, 혹시 오벨리아가 그대에게 연락을 취한 게 언제지?”

“……4일 전이었어요. 대공비 전하께서 급하게 와 달라고 하셔서, 별다른 준비도 없이 급하게 왔고요.”

에크하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턱이 딱딱하게 굳었으나, 그는 애써 그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 심호흡했다.

4일 전이라면, 그가 오벨리아에게 매달려 속내를 털어놓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대공비 전하와 대공 전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죠?”

레베카가 눈치 좋게 말을 꺼냈다.

북부의 사교계에서 경험을 쌓다 보니 자연스레 생겨난 눈치였다.

에크하르트에게는 말도 없이 레베카를 부른 것이나, 오벨리아가 불렀는데 레베카를 오벨리아가 아닌 그에게 데려온 것이나 모두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를 노리듯이.

레베카도 그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거 정말 진심인데, 저는 절대 대공비 전하와 대공 전하 사이에 낄 생각도 없고 끼이기도 싫어요.”

레베카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나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러니까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두 분이 먼저 하실 이야기가 있으실 것 같네요.”

레베카는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먼저 뒤돌았다.

어차피 에크하르트가 자신의 말대로 할 것을 알고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도 그런 레베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가 뒤를 돌자마자, 에크하르트 또한 등을 돌려 오벨리아의 방으로 향했으니까.

***

“에필로나 영애를 불렀더군.”

오벨리아를 마주하자마자, 에크하르트가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사교계에서 아그네스 쪽에 붙일 인사가 없어서.”

오벨리아는 마치 별다른 의도가 없는 양,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찾아온 이유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척하는 오벨리아를 그가 나직이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에크하르트를 돌아보지 않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4일 내내, 오벨리아는 이런 식이었다.

“나를 좀 봐.”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손에서 부드럽게 서류를 뺏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곧바로 그것을 도로 가져갔다.

“바빠.”

오벨리아의 싸늘한 태도에 에크하르트는 잠시 말을 잃었다.

마음을 자각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상대의 작은 태도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것.

그녀의 싸늘함이 그의 모든 것을 얼려 버린 듯 일순 숨조차 멈추었듯이.

“……오벨리아,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 수 있다는 거 알아. 강요할 생각도 없다.”

결국 에크하르트는 저를 상대도 해주지 않는 오벨리아를 상대로, 홀로 고해하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에크하르트의 뛰어난 동체 시력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오벨리아의 얼굴이 무표정했기에, 그는 좀처럼 그녀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아마도 오벨리아의 표정보다는 에크하르트의 마음 탓일 것이다.

마음에 둔 사람의 생각을 읽기란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렇지만 내 마음이 부담스럽다고 다른 사람을 내 옆에 붙이려고 하지는 말아 줘.”

에크하르트가 호소했다.

오벨리아가 레베카를 굳이 다급하게 수도에 불러 온 이유.

그것은 그를 좋아하는 레베카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애석하게도 에크하르트는 그 점을 정확히 알아차려 버렸다.

“……그럼 마음을 접어.”

오벨리아는 일부러 에크하르트를 쳐다보지 않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그녀나 그나 온갖 암투와 계략에서 버텨 왔으니 속내를 읽는데 특화된 이들이었다.

오벨리아는 그에게 제 마음을 읽힐까 봐 두려웠다.

“나는 당신 마음이 부담스러워. 그래서 레베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를 부른 거야.”

오벨리아는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은 죽는다는 사실을 되뇄다.

그러지 않고야 에크하르트에게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말에 상처 입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를 들쑤셨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나.”

에크하르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목소리로 목을 긁듯이 겨우 어떤 음성을 내었다.

오벨리아의 단호함이 그의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길 바랄만큼 부담스러운 마음.

제 사랑이 그렇다는 사실은 너무나 아플 수밖에 없었다.

“부담스러웠다면 미안하다. 네가 최대한 신경 쓰이지 않게 할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에게 사과했다.

마치 그의 마음이 정말 어떤 죄라도 된 것처럼.

오벨리아는 울 듯 일그러지는 표정을 애써 다잡았다.

그게 아니라고, 당신의 마음은 사과해야 할 것이 아니라고, 그녀는 당장이라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자신의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외면했다.

그녀는 죽는다.

그러니 에크하르트를 제게 묶어 둘 수 없었다.

“에크하르트, 잊었어?”

그래서 오벨리아는 입 안쪽 살을 짓씹어 비릿한 맛이 감도는 침을 삼켜가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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