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13)
이게 당신에게 어떤 비수가 될지 안다.
알면서도, 오벨리아는 말을 내뱉었다.
“내게 마지막으로 바실리스크의 독을 건네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거.”
그리고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찌른 칼은 손잡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표정이 무너지고, 그녀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얼굴을 보며 그녀 또한 표정을 일그러트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만 했다.
아, 누가 말은 찌른 사람이 더 아프다고 했던가.
그런 것은 찔린 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일 터였다.
산 채로 심장을 헤집어도 에크하르트보다는 덜 고통스러워 보였을 테니까.
오벨리아에게는 에크하르트를 찌를 자격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죄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아주 많은 것들이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사이에 얽혀 있었으나, 그 모든 것조차 부질없어질 만큼…… 결국 그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에크하르트가 한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평소에는 남들보다 배로 거대해 보이는 그 체구가 지금만큼은 작아 보였다.
“……미안, 하다. 내가 주제넘었군.”
에크하르트가 황급히 뒤돌아섰다.
그의 목소리에 죄책감과 후회가 가득했다.
“……쉬어라.”
그 와중에도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괴로움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벨리아의 방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조급했다.
소리도 없이 열렸다 닫힌 문을, 그녀는 한참을 바라만 봤다.
아…… 정말이지, 못할 짓이었다.
너무 끔찍했다.
이 상황과 자신, 모두가.
***
오벨리아가 레베카를 에크하르트에게 붙이기 위해서만 부른 것은 아니었다.
레베카는 오벨리아의 명령을 받아 아그네스에게 접근했다.
레베카가 에크하르트를 오래도록 짝사랑했다는 사실은 북부에서 유명했고, 조금만 알아봐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그네스는 그 덕에 레베카에게도 오벨리아가 적이라고 생각했던지, 레베카의 접근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레베카는 오벨리아에게 배운 대로, 아그네스에게 조언자가 되어 그녀의 사교계 평판을 끌어 올려 주었다.
“원로회에서 아그네스 이멜리언의 입양에 관한 안건이 통과되었습니다.”
그 덕인지, 에스더 백작이 침통한 표정으로 오벨리아에게 소식을 전해 왔다.
에스더 백작은 이것이 오벨리아가 의도한 일이었음을 알고 있으나, 아그네스 따위를 카테리안느 공작가에 들여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사무치는 모양이었다.
“수고했어, 백작.”
오벨리아가 그런 백작을 달래듯이 손을 잡아 주었다.
일리어스를 입양할 때도 이거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더란다.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안건이 통과된 것은 에스더 백작이 오벨리아의 뜻에 따라 힘을 써 준 덕도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현재 그만큼 카테리안느가 엉망이라는 것에 있었지만.
“이제 황후 간택이 빠르게 진행되겠군요.”
에스더 백작이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아그네스는 카테리안느의 사람으로도 황후로도 지나치게 부족했다.
그런 이가 높은 자리에 앉게 생겼으니 그 아래 사람들이 고생할 앞날이 훤했다.
물론 그 안에는 에스더 백작, 자기 자신도 포함이었다.
“아니, 아마 쉽지 않을 거야.”
그러나 오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에스더 백작은 모르고, 오벨리아는 아는 점이 있었으니까.
“어째서입니까……?”
에스더 백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려 카테리안느의 이름을 달고, 황제의 사랑을 받는 이였다.
그런데 그런 아그네스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면 누가 황후가 된단 말인가.
“아마도…… 선황이 황비를 들이길 바라는 거 같아. 그리고 알렉산드로는 선황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거야.”
오벨리아는 자신이 추측한 바를 간단히 꺼내놓았다.
신성 제국에서 갑자기 신관이 찾아옴으로써 알렉산드로와 선황의 계획이 잠시 주춤했겠지만, 그들이 계획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에스더 백작이 답했다.
“그러면 황제의 정부에게는 그 사실에 대하여 제가 언질을 주어야겠군요.”
에스더 백작은 실리를 추구하며 그것을 실전으로 옮기기 위하여 많은 것들을 학습한 자라, 원로 중에서도 똑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금세 오벨리아가 이 이야기를 꺼낸 뜻을 알아들었다.
“그래, 부탁해. 에스더 백작이 라이너스와 아그네스의 눈에 반드시 들어 줘야 해. 현재 카테리안느 공작가 안에서 내 눈과 귀가 되어 줄 사람은 백작뿐이니까.”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에스더 백작에게 당부했다.
백작이 굳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반드시 저를 믿도록 만들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다.
에스더 백작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성공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과정은 결국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일을 부탁해서 미안해.”
오벨리아가 에스더 백작의 주름진 손을 잡으며 사과했다.
에스더 백작은 라이너스와 아그네스를 속이고 첩자 역할을 해야만 했다.
들키게 되면, 백작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애기씨.”
에스더 백작이 오벨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오벨리아가 어린아이였을 때를 제외하고는 불려 본 적 없는 호칭이었다.
“제가 철저히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맞지만…… 에스더 백작가는 카테리안느 공작가가 건국 공신으로 추대되었을 때부터 공작 가문을 모셔 온 곳입니다.”
에스더 백작이 오벨리아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백작은 오벨리아가 어릴 때부터 단 한 번도 카테리안느의 윗사람으로 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에스더 백작과 오벨리아가 직선적으로 두 눈이 마주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카테리안느의 이득은 곧 에스더 백작가의 이득. 라이너스 님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카테리안느 공작가의 몰락을 불러오실 분입니다.”
에스더 백작이 오벨리아의 손등을 매만지며 그녀를 달래었다.
위험에 처한 것은 백작인데, 마치 손녀를 대하는 할머니라도 된 것처럼 백작은 도리어 걱정하는 오벨리아의 마음을 신경 썼다.
비록 에스더 백작은 할머니라기엔 젊고, 어머니라기에는 나이가 꽤 있었지만.
“무엇보다 저는 카테리안느 공작가를 사랑한답니다. 공작가의 가신이라는 사실은 오래도록 제 자부심이었어요.”
에스더 백작이 오벨리아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 자부심을 망치게 둘 수 없는 것은, 애기씨만이 아니라 저 또한 마찬가지랍니다.”
에스더 백작의 허리는 빳빳하게 서 있었고 어깨는 조금도 굽지 않은 채 당당히 펴져 있었다.
백작의 눈은 한 점 거짓 없는 진실을 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울컥했다.
그곳에 속한 자들의 자부심.
그게 오벨리아가 알고 있고, 지키고 싶은 카테리안느였으니까.
“……꼭, 내가 카테리안느로 돌아갈 때까지 살아남아야 해.”
오벨리아 또한 에스더 백작과 맞잡은 손을 다시 한번 꽉 쥐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카테리안느가 있었다.
“오벨리아 님의 당부, 명심하겠습니다.”
에스더 백작이 다시 시선을 공손히 아래로 내리며 미소했다.
오벨리아는 진심으로 바랐다.
에스더 백작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
임시지만 카테리안느 저택에 입성하는 순간, 아그네스는 전율했다.
드디어 그 오벨리아를 밀어내고, 자신이 이곳을 가지게 된 것이다!
“어서 와, 아그네스.”
환희에 찬 아그네스를 카테리안느 공작인 라이너스가 친히 마중했다.
그녀가 이 저택에서 어떤 존재인지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하여 직접 맞이하러 나온 것이었다.
“오랜만이에요, 라이 오빠.”
아그네스는 저택의 모든 이에게 보란 듯이 라이너스의 애칭을 불렀다.
그녀는 이제 카테리안느 공작 영애가 된 자신의 위치를 마음껏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 네 방은 미리 준비해 두었어.”
아그네스가 제멋대로 입에 담았으나, 사실은 라이너스가 그녀에게 허락한 적 없는 애칭이었다.
그러나 이제 남은 카테리안느라고는 그와 아그네스뿐이었고, 고용인들 앞에서 애칭으로 그녀를 면박 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라이너스는 기묘한 기분을 숨기고 아그네스를 그녀의 방으로 직접 안내해 주었다.
“……여기가 제 방이라고요?”
한껏 기대에 부풀어 라이너스를 따라 방으로 향했던 아그네스는 문을 열자마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그네스는 이멜리언 백작가에 입양된 후부터 오벨리아와 가까이 지냈다.
그래서 아그네스는 카테리안느 저택에서 오벨리아의 방이 얼마나 고풍스럽고 또 얼마나 귀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던 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쩐지 현재 아그네스의 방에 있는 것은 오벨리아의 것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런 아그네스의 반응에 라이너스는 기가 막혔다.
원래의 카테리안느 저택이 불에 탔기에 그곳에 있던 장식품들만큼은 아니지만, 보통 영애들이라면 꿈도 못 꿀 것들로 그녀의 방 안을 채워 놓은 터였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이토록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니 얼마나 욕심이 많은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아뇨,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드는데…….”
그런 라이너스의 기색에 아그네스가 눈치를 보며 말을 늘어트렸다.
그녀는 아직 황후가 아니었고, 황후가 되려면 카테리안느 공작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니 벌써 라이너스에게 밉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오벨리아의 방이랑 조금 다른 거 같아서요.”
그러나 아그네스는 끝에 덧붙인 말로 기어코 자신이 약간의 불만이 있음을 드러냈다.
이제 카테리안느고 황후가 될 텐데, 이정도는 입 밖으로 내어도 되지 않겠냐는 자존심이 비죽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오벨리아와 같은 취급을 받으려고?”
그렇지만 그것은 라이너스의 짜증만 불러일으켰다.
그가 확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아그네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내가 그 계집애랑 다를 게 뭔데요?”
아그네스가 따지듯이 물었다.
라이너스는 진짜 카테리안느도 아닌 게 주제넘지 말라고 하려다가, 그것을 꾹 눌러 참았다.
솔직히 일리어스도 카테리안느의 핏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탐탁지 않았던 라이너스가 아그네스를 진심으로 카테리안느라 생각할 리 없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따져 봤자 제게 이로울 게 없다는 것쯤은 알았기에, 라이너스는 말을 돌렸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널 언제 황후로 만들어 주신대?”
라이너스가 가장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그는 금방 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쩐지 아그네스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