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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75화 (75/136)

75화. 더 높이(1)

아그네스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아그네스?”

라이너스가 결국 참다못해 아그네스에게 대답을 채근했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어요.”

“뭘 또 기다려?”

라이너스의 표정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가 굳이 아그네스를 카테리안느에 들인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녀가 황후가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왜 아직도 알렉산드로는 미적거리느냔 말이다!

“아직 경연이 남아 있잖아요.”

황후 후보가 셋이니, 그중에 황후를 뽑기 위해서는 형식적으로라도 경연이 필요했다.

아그네스는 애써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깟 경연 하루에도 끝낼 수 있어.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라이너스가 의심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그네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자꾸만 저런 말을 하는 라이너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꿍꿍이라니.

그녀가 황후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황후가 된단 말인가?

“알잖아요, 내가 알렉산드로의 아이를 가진 거. 이 아이가 있는 이상 알렉은 다른 생각 같은 거 못해요.”

아그네스가 라이너스의 말을 일축했다.

더는 괜한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게는 폐하의 아이가 있으니까.”

라이너스가 잠시 침묵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로가 핏줄과 그 핏줄의 정통성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는 라이너스도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니 아그네스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황후 자리에 앉힐 터였다.

“그럼 전 이만 쉴게요.”

아그네스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를 찝찝함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아그네스는 그것이 라이너스가 괜한 말을 꺼낸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쉬어.”

라이너스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어차피 아그네스가 황후 자리에 오르는 일이 아니면 딱히 할 말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각자의 방으로 가기 위해 뒤돌아선 두 사람의 표정은 꽤나 비슷했다.

알렉산드로에 대한 의심과, 그로 인한 불안감.

아그네스와 라이너스의 표정 위로 똑 닮은 감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

오벨리아는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라이너스를 철광석 사업에 끌어들이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가 차명으로 몰래 모아 둔 재산들을 찾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도, 그토록 알렉산드로를 믿고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만큼은 그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벨리아, 귀족은 언제나 마지막 보루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단다.’

오벨리아로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랐을 뿐이지만, 어쨌든 알렉산드로에게 비밀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물론, 처음 그녀가 사유 재산을 따로 만든 의의는 추후 알렉산드로에게 큰돈이 들어갈 일이 생겼을 때 그를 돕기 위함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 그 비밀이 오벨리아에게 큰 무기가 된 셈이었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그것들을 찾으러 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 애로 사항이 있었는데, 알렉산드로가 그녀를 감시하도록 타운하우스 주변에 사람을 붙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결국 에크하르트와 함께 외출하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야유를 나서는 게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를 보는 여러 눈이 붙었으니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여러모로 에크하르트가 적격이었다.

“……불편하겠지만, 잡아라.”

마차에 오르려는 오벨리아에게 에크하르트가 손을 내밀었다.

귀부인이 마차에 오를 때 에스코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남편이 옆에 있는데, 시종이나 다른 남자에게 에스코트를 받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그러니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 당연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는 미안한 얼굴이었다.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빤히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에크하르트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그녀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벨리아와 저번의 대화 이후 이렇게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에크하르트의 눈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불편하지 않아.’

오벨리아는 속으로만 맴도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해 버리면, 굳이 에크하르트에게 그런 모진 말들을 쏟아낸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꾹 눌러 참고 아무 말 없이 에크하르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 위에 올랐다.

히이잉.

마부가 말을 모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 안에는 끔찍한 침묵이 맴돌았다.

에크하르트는 애써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벨리아를 무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녀에게 자꾸만 쏠리는 신경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오벨리아 또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생각에 빠진 척, 그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두 사람이 어색하게 서로를 외면하는 동안, 대공가의 마차는 힐켄테데의 것 답게 매끄럽게 나아갔다.

그리고 마차는 상업 거리의 어느 적당히 유명한 의상실 앞에 멈춰 섰다.

“힐켄테데 대공 전하와 힐켄테데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힐켄테데의 문양이 박힌 마차를 보자마자 마담이 의상실에서 뛰쳐나와 오벨리아를 맞이했다.

마담이 허리를 숙이며 두 눈으로는 분주히 오벨리아를 관찰했다.

“고개를 들게, 마담. 내 아내를 안으로 안내해 주도록.”

“예, 대공 전하.”

에크하르트의 허락에 마담이 숙였던 허리를 세웠다.

그 와중에도 마담의 시선은 힐끔힐끔 오벨리아를 향했다.

오벨리아는 그 시선을 일부러 모른 척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오벨리아가 황태자비 시절에도 자주 오던 곳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은 의상실에 왔다고 해도, 크게 알렉산드로의 의심을 살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이거, 이거, 저거, 그리고…….”

오벨리아는 의상실의 드레스와 모자, 가방 등을 가리키며 느긋한 걸음으로 안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최대한 평범한 손님처럼 굴었고, 그러는 동안 마담의 시선은 어느덧 오벨리아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오벨리아가 옷을 골라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담이 자신이 직접 피팅을 도와주겠다며 그녀를 따라 들어서자 탈의실의 문이 닫혔다.

“살아 계실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단둘만 남은 순간, 마담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오벨리아가 옷을 고르며 돌아다닌 동선.

그것은 그녀가 황태자비 시절 마담에게 비밀리에 신호를 보내는 방법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나를 너무 빤히 쳐다보던데, 라발리에.”

오벨리아가 가볍게 웃었다.

모두가 이 의상실의 마담을 뒤퐁이라고 부를 뿐, 실제 그녀의 이름을 알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마담의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라발리에 드 뒤퐁.

그것이 마담의 이름이었다.

“제가 그렇게 군 이유를 아시면서, 짓궂으시군요.”

마담이 가볍게 대답했다.

그녀가 오벨리아를 계속 빤히 쳐다본 것은 의도적인 일이었다.

황태자비의 얼굴은 유명했고, 힐켄테데 대공비가 죽은 황태자비를 똑같이 닮았다는 사실 또한 유명했다.

그런데 마담이 신기해하지 않고 담담하면, 오히려 오벨리아와의 사이에 무언가가 있으리라 의심을 사기 더 좋기 때문이었다.

“모두 내가 살아 있을 줄 알았던 것처럼 구네.”

일리어스와 에스더 백작에 이어 라발리에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오벨리아가 살아남았으리라 믿고 있는 듯 행동했다.

“그 ‘모두’에 누가 들어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오벨리아 님은 얌전히 죽임을 당하실 분은 아니시니까요.”

라발리에는 겉보기에는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지만, 본업은 정보상이었다.

아마 냉궁이 전소했던 화재가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황궁의 정보 보안이 매우 허술해졌네.”

물론, 오벨리아가 황태자비로 있을 때는 이런 중요한 정보가 외부로 빠져나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보를 얼마만큼 풀고 막느냐는 철저히 그녀의 손안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제 실력이 늘어난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는 황궁에서 내가 사라진 구멍이 지나치게 클 걸 아니까.”

오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예, 예, 오벨리아 님은 잘나셨죠.”

“그래서 네가 나와 단독으로 거래하는 거 아니겠어?”

정보상은 원래 되도록 많은 이들과 거래하고, 그 거래를 통해 또 새로운 정보를 얻으며, 또 그 정보를 최대한으로 많이 사고판다.

그러나 라발리에의 정보상은 달랐다.

그녀는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오직 오벨리아에게만 전부를 공개했다.

라발리에가 자신의 다른 손님들에게 주는 정보는 오벨리아의 선에서 1차로 걸러진 것들뿐이었다.

그러니까 오벨리아의 말대로 라발리에는 그녀에게 독점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거야 오벨리아 님께서 가져다주시는 정보가 웬만한 귀족 열보다 더 질과 양이 좋으니까요.”

이번에는 라발리에가 어깨를 으쓱였다.

여러 귀족이 물어오는 쓰잘머리 없는 정보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걸러내기를 노력할 시간에, 오벨리아가 주는 것들을 받아먹는 게 정보상에는 훨씬 이득이었던 것이다.

“자, 이제 내가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라는 건 다 확인됐겠지?”

오벨리아가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기 위해 말을 꺼냈다.

라발리에와의 대화는 이유 없이 나눈 만담 따위가 아니었다.

이것은 라발리에에게 오벨리아가 본인임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절차였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에게 요구하실 것과, 주실 정보는 무엇인가요?”

라발리에가 오벨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오벨리아와 라발리에의 오랜 거래 방식에는 돈이 오가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정보와 정보만을 서로에게 사고팔았다.

“우선, 요구할 것은 내 재산이야. 난 내 것을 찾아야겠어.”

라발리에는 오벨리아의 비밀 재산 관리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벨리아의 비밀 재산을 꺼내려면 라발리에와 오벨리아 둘 모두의 참여가 필요했다.

“그리고 내가 줄 정보는…….”

오벨리아가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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