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더 높이(2)
“현 황제가 아그네스를 황비로 만들려고 해.”
마침, 오벨리아의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하여 사일러스 또한 돌아갔다.
이 틈을 타 알렉산드로는 재빠르게 움직일 터였다.
“이 정보를 누구한테 팔든, 그건 당신의 자유야, 라발리에. 단, 아그네스한테만은 팔아선 안 돼.”
모든 귀족이 수군거리는 일에 대하여 아그네스만 모른다.
이 정보를 그녀만이 모르게 하여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이 누구일까?
아그네스와 알렉산드로 사이에 오해를 만들기에 딱 적합한 정보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오벨리아 님.”
라발리에가 무릎을 살짝 굽혀 오벨리아의 명을 받들었다.
라발리에는 오벨리아의 말에 그 어떤 의문도 표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거래해 온 두 사람에게 그 정도 신뢰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물간 카테리안느를 비웃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 암암리에 퍼진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
“대공 전하, 카테리안느 가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타운하우스의 집사가 에크하르트에게 초대장을 가져와 내밀었다.
웬만한 것은 시녀장이나 집사의 선에서 거르지만, 카테리안느의 것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지만 보통 초대장을 관리하는 것은 안주인의 권리라서 에크하르트는 의아함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미친 건가?”
초대장을 읽은 에크하르트에게서 곧장 험악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집사는 힐켄테데에 소속된 자 중 오벨리아의 정체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집사가 굳이 오벨리아가 아니라 에크하르트에게 초대장을 몰래 가져온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그네스 카테리안느의 환영 연회 초대장이었다.
에크하르트의 분노를 표현하듯이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로 인해 초대장의 끝자락이 구겨졌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찢어 버리지 않은 게 최선이었다.
아그네스는 카테리안느의 안주인이 아니었으니, 연회를 여는 것에는 가주인 라이너스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제 여동생의 몸 상태가 어떤지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이딴 것을 보내다니.
아무리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그 적의를 에크하르트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은, 알겠다. 나가 봐.”
에크하르트는 집사를 내보낸 뒤에 생각에 빠졌다.
이 사실을 오벨리아에게 전해도 괜찮을지, 아닐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지금 그녀의 몸 상태는 어떤 충격을 견딜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테리안느가 연회를 열면 어차피 오벨리아 또한 알게 될 일이었다.
끝까지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 당장 비밀로 하는 것이 과연 정말로 그녀에게 도움이 될 행동일까?
“차라리 모두 망쳐 버릴까.”
에크하르트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솔직히 에크하르트는 라이너스의 방법이 매우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대대로 물려받은 저택은 겨우 건물 하나로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문을 대표하는 상징성.
그런 것을 남들이 다 보는 수도 한복판에서 태워 버리다니.
그러니까 카테리안느가 몰락하는 게 아니냐는 그런 소리나 듣는 것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카테리안느의 핏줄들이 줄줄이 죽어 나간 것으로 알려진 이 시점에 말이다.
만약 카테리안느가 여전히 귀족들 사이에서 건재하게 여겨졌다면, 카테리안느의 영애를 감히 황비로 앉히려 하는 황제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겠는가.
그런 상황이었으니 사실 카테리안느의 연회를 망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날 힐켄테데에서 연회를 연다면?
에크하르트는 카테리안느의 손님들을 모조리 빼앗을 자신이 있었다.
힐켄테데는 3년간 수도와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다.
북부에서만 사는 하얀 사슴의 가죽 같은 것은 힐켄테데에서 따로 관리하기 때문에, 수도의 귀족들이 구하기 어려웠다.
그것만 미끼로 내걸어도 사교계의 명사들이 혹할 터이고, 그들이 오면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되어 있었다.
그 무리에서 떨어진 자들이 카테리안느에 가 봤자, 결국 그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꼴만 우습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에크하르트에게 카테리안느의 연회를 망치는 일이 무엇 어렵겠느냔 말이다.
다만, 에크하르트는 그런 독단을 자신의 멋대로 저질러도 될지 그게 망설여질 따름이었다.
“……하아.”
에크하르트가 한숨을 삼키며 마른세수했다.
오벨리아에 한해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쿵.
갑자기 에크하르트의 몸이 아래로 꺼지면서 그가 무릎을 꿇었다.
“에크하르트……!”
마침 에크하르트의 집무실을 찾아왔던 오벨리아가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평소라면 노크를 했겠지만,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나 놀랐기 때문이었다.
“……오벨리아.”
땅을 짚어 완전히 고꾸라지는 것을 막았던 에크하르트가 상체만을 일으켜 오벨리아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사색이 되어 몸을 낮추어 그를 붙잡았다.
“어디 아파? 무슨 일이야, 왜…….”
오벨리아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에크하르트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평소에 굳건하던 그였다.
그런데 에크하르트가 갑자기 고꾸라지다니!
그녀의 표정에 불안한 기색이 가득 떠올랐다.
“……아니, 그냥 피곤했을 뿐이다.”
에크하르트가 괜찮다면서 오벨리아를 끌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야 그녀도 건강 문제에 대해 이렇게까지 예민하지 않았으나, 자신이 죽을 상황에 놓이다 보니 자연스레 모든 것에 심각해진 탓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셀리아를 불러서…….”
“정말 괜찮아, 그냥…….”
“에크하르트!”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그녀의 음성이 너무 심각하여 도리어 놀란 것은 에크하르트였다.
“아……. 미안, 미안해, 내가……. 아니, 일단 셀리아를…….”
자신이 한 행동을 뒤늦게 인지한 오벨리아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의원을 부르기 위하여 몸을 돌렸다.
“오벨리아, 그냥 잠을 못 잤을 뿐이야.”
결국 에크하르트가 이실직고했다.
어차피 셀리아를 부르게 되면 오벨리아가 알게 될 일이었으니, 숨길 방도가 없었다.
“뭐……? 네가 겨우 잠을 못 잤다고 그럴…….”
에크하르트는 대단히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겨우 잠을 못 잤다고 한순간 주저앉다니, 말이 되는가.
거기까지 생각했던 오벨리아가 찰나에 멈칫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혹시, 내가 그 말을 했던 날 이후로 한숨도 못 잔 거야?”
오벨리아의 머릿속에 갑자기 든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 잊었어? 내게 마지막으로 바실리스크의 독을 건네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거.’
마음에도 없던 비난.
그렇지만 당신이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상처받으라고 했던 말.
오벨리아가 질끈 입술을 내리 깨물었다.
그날 이후로 에크하르트가 잘 지내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서로 사이가 어색해질 대로 어색해졌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때로부터 날이 한참을 더 지났는데 한숨도 못 잤을 줄은 생각도 못 한 터였다.
오벨리아는 자신이 그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하여 훨씬 간과했다는 것을 이제야 인지했다.
“너 때문이 아니다.”
에크하르트가 재빠르게 오벨리아의 말을 부정했다.
“그냥,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못 잤던 거야.”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인간인 이상 오랜 시간을 못 자면 몸에 큰 무리가 오기 마련이었다.
현재 에크하르트의 증상은 딱 그와 같았다.
“……나 때문이 아니면?”
오벨리아가 입 안쪽 여린 살을 짓씹으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
목이 멨다.
아, 내가 쓰러지는 것을 볼 때마다 당신의 기분이 이랬겠구나.
뒤늦게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잠시 에크하르트가 휘청인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해서 숨조차 쉬기 어려웠는데, 그는 몇 번이고 오벨리아가 쓰러지고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게다가 오벨리아는 그에게 했던 말로도 이렇게 괴로웠다.
그런데 그녀는 에크하르트가 자신에게 독약을 건네게 만들기까지 했으니, 그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아, 내가 무슨 짓을.”
오벨리아가 무의식 중 내뱉은 말에 후회가 가득했다.
그녀가 울 듯 일그러진 얼굴로 에크하르트를 올려다봤다.
아, 나는 시종일관 당신에게 정말 잔인한 사람이었구나.
그 사실이 그녀의 목을 졸랐다.
“……미안해.”
오벨리아는 사과해야만 했다.
“내가 홀로 마셔야 할 독의 무게를 당신이 지게 해서 정말 미안해.”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바실리스크의 독은 본디 오벨리아가 홀로 마시고 죽었어야 할 독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에크하르트를 이용했다.
그 당시, 과연 오벨리아의 머릿속에 에크하르트가 건넨 독을 마시고 그녀가 죽게 되면, 그는 어떨지에 관한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오벨리아는 스스로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내가, 당신을 이용했어. 당신에게 죄책감을 지어서라도 내 복수를 마무리 지으려고, 당신을, 내가…….”
만약, 오벨리아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더라면 그때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아니, 그녀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오벨리아는 복수에 눈이 멀어 있었고, 어떻게든 복수를 완성해야만 했으니까.
자애롭고 관대한 황태자비.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
착하고 현명한 딸, 좋은 아내.
그런 것들은 모조리 그녀가 그런 척이 가능할 때나 존재하던 모습이었던 것이다.
진짜로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은 에크하르트가 아니라, 오벨리아 자신이었다.
“에크하르트, 당신은 죄가 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탓한 건…….”
그녀는 더 이상 거짓으로라도 에크하르트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다.
“당신을 밀어내고 싶어서였어.”
오벨리아가 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차마 에크하르트와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오벨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 말 한마디에, 당신 행동 하나하나에, 당신의 모든 것에 흔들려. 그래서…… 그래서 그랬어. 미안해. 미안해, 에크하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