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더 높이(3)
그들의 고백은 항상 죄의 고백과 함께 시작했다.
둘 중 누구도, 미안하다는 말 없이는 제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못했다.
그런 관계였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 속에서, 자신을 향한 오벨리아의 마음을 듣는 순간 에크하르트는 모든 게 괜찮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론, 그것은 정말로 착각이었다.
“내 마음은 내가 알아서 접을게.”
마침내 두 손을 내리고 에크하르트와 시선을 마주한 오벨리아가 한 말이 그 착각을 깨 버렸다.
“뭐……?”
떨면서 한 말과 다르게 그 단호한 어투에 에크하르트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다.
“난 어차피 죽을 거고, 당신한테 괜한 희망을 주고 싶지 않아. 또 내가 죽을 때 당신이 얼마나 절망할지 생각하기도 싫어.”
오벨리아의 두 눈은 결연했다.
에크하르트에게는 애석하게도, 그녀는 이미 완전히 결심을 마친 얼굴이었다.
“내 태도가 이기적이었어.”
그래, 오벨리아는 정말 자신이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제게서 에크하르트를 떼어낼 가장 편한 방법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그를 상처 줬다.
더없이 이기적이었다.
“괜히 다른 말로 핑계 대서 쓸데없이 상처 주고 더 이상 그러진 않으려고.”
사실은 처음부터 이랬어야만 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에크하르트, 당신도 내게 마음을 두지 마.”
당신도 나도 마음을 접어야만 한다고 깔끔하게 선을 그었어야 했다.
당신의 마음을 부정하거나,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몰아붙이는 것 따위가 아니라.
“우린 애초에…….”
“잠깐, 잠깐! 오벨리아,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말을 채 모두 듣지 않고 끊어냈다.
지금 내뱉은 말들은 모조리 그녀 홀로 한 결심이었지, 그의 의견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 마음이 있고, 너도 내게 마음이 있는데 나보고 지금 내 마음을 접으란 건가?”
에크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되물었다.
지금 자신이 오벨리아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것인지 마치 확인하는 것처럼.
“당신이 그랬잖아. 내가 죽었을 때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난 당신이 내가 죽어가는 걸 보며 죄스럽고 마음 아파할 자신이 없…….”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에크하르트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오벨리아의 말을 끊어냈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그의 입장에서는 모조리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너라고 할지라도, 네가 내 마음을 이래라저래라할 수는 없어.”
오벨리아가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에크하르트가 그의 마음과 관련된 일에는 물러섰던 것처럼, 그녀가 거절하면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네가 나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건 너의 뜻이니 따르겠어.”
물론,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가 원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생각 따위 없었다.
아무리 서로 좋아한다고 한들, 그 외의 일들은 또 서로의 의견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그 예로 에크하르트는 지금 오벨리아에게 손끝도 대지 않았다.
혹시라도 마음 하나로 그녀를 제멋대로 다루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마음까지 어떻게 하라고 하지는 마. 네게 죄책감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감히 그 시선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널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에크하르트의 선언에 오벨리아가 멈칫했다.
저번에 자신이 한 말로, 그가 영락없이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올곧은 에크하르트라면 그 말을 듣고도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 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널 사랑해, 오벨리아.”
에크하르트의 목소리에는 망설임 하나 없었다.
그는 언제 주저앉았었냐는 듯이 곧은 자세로 오벨리아를 직시했다.
“단순히 가벼운 마음이 아니야. 그럴 거였으면 평생 누군가를 마음에 둔 적도 없었는데, 그게 하필 가장 어려운 상대인 너일 리가 없었겠지.”
에크하르트에게 오벨리아는 아주 많은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이용당해 본 것도, 누군가를 이토록 원망해 본 것도, 또 누군가를 어쩔 수 없을 만큼 사랑해 본 것도.
그 모든 처음이 그녀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오벨리아조차 놀랍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렸다.
에크하르트는 그에 관하여 확인시켜 주듯 못을 박았다.
“그래, 네가 내 첫사랑이야.”
순간 오벨리아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감출 수 없을 만큼 붉게 달아오른 뒤였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누군가의 첫사랑, 그런 것에 연연해 본 적 따위 없었다.
알렉산드로와 연애를 할 때도 그의 이전 연인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왜 에크하르트의 첫사랑이 자신이라는 말에는 이토록 심장이 술렁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난 원래 무언가 하나에 꽂히면 그것에 질리거나, 포기하는 법 따위 없어.”
에크하르트가 나지막이 웃음을 머금었다.
제 말에 반응하는 오벨리아의 모습에서 새삼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게 기쁜 탓이었다.
“그렇게 해서 힐켄테데의 핏줄이 아님에도 대공이 되었고, 무너진 힐켄테데를 3년 만에 일으켜 세웠지.”
에크하르트가 딱 한 발짝만 오벨리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녀가 도망가지 않자, 그제야 그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심지어 첫사랑은 열병처럼 지독하다며.”
에크하르트의 뜨거운 손끝이 오벨리아의 손목 위에 닿았다.
그녀는 여전히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에크하르트의 행동은 아주 아주 느릿하여. 오벨리아가 조금만 움직여도 그의 사정권에서 벗어났을 텐데도 그랬다.
그녀가 그렇게 아무것도 못 하는 동안, 에크하르트의 손이 약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래서 잘해 보려고. 늘, 그랬던 것처럼.”
에크하르트는 지금껏 무언가에 실패해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3년 전, 그가 가진 전부를 태워 버렸던 화마조차 그런 에크하르트 자체를 앗아가지는 못했다.
심지어 오벨리아의 마음까지 확인했는데, 그가 힘을 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탁.
그 끝에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의 손을 쳐냈다.
물론, 그녀의 다소 거친 행동이 무색하게도 그의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지만.
“난 절대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거 안 해. 안 할 거야.”
오벨리아가 떨리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았다.
떨리는 게 손인지 심장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중요한 것은, 오벨리아의 말이 에크하르트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혼자 사랑하는 수밖에.”
에크하르트가 웃었다.
그 웃음이 제법 자신만만했다.
오벨리아의 앞에서는 대체로 그런 법이 없었지만, 사실 그는 본디가 오만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에크하르트는 그때부터 알았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유일하게 오만하게 굴 수 없는 상대.
그 상대가 제게 훗날 아주 중요한 존재가 될 거라는 사실을.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너도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질 거야.”
물론, 원래부터 오만했던 이 남자는 청승맞게 끝까지 짝사랑만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상대가 그에게 마음이 없다면 몰라도, 마음이 있다는데 무엇 하러 청승이나 떤단 말인가.
“당신의 절대라는 말은 애석하게도 지켜지지 않겠어,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아까의 말을 지키듯 이번에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벨리아는 그제야 숨을 쉬었다.
스스로 숨을 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지, 그녀는 뺨에 열이 오르고 숨이 찬다는 것을 뒤늦게야 느꼈다.
“사랑해, 오벨리아.”
에크하르트는 사랑이 처음이라면서, 그 말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제 솔직한 마음을 입 밖으로 내기를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그 말 하지 마.”
그리하여 다급해진 것은 오벨리아였다.
그녀가 초조한 어투로 그의 말을 막았으나,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아니, 그냥 말을 하지 마.”
“그래서 네가 앞으로도 쭉 내 옆에 있으면 좋겠고.”
“에크하르트!”
결국 오벨리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에크하르트가 좀처럼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탓이었다.
“너는 어차피 죽을 거라서 사랑하면 안 된다고? 그런 말 해 봤자 나한테는 안 먹혀.”
오벨리아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에크하르트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너무 곧게 직선적으로 자신을 바라봐서, 자꾸만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됐다.
“자꾸 간과하나 본데…… 미래가 어떻게 되든 오벨리아, 너는 지금 살아 있어.”
그렇지만 에크하르트는 기어코 그 큰 신장을 숙여 오벨리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가 오벨리아의 쪽으로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나랑 같이 살아가자, 오벨리아.”
오벨리아는 일순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제게 손을 내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널 반드시 살려 줄게.”
아, 오벨리아는 순간 치미는 울음을 삼켰다.
살고 싶다.
또다시- 분수대에서 피를 토했던 그 날처럼, 간절하게 살고 싶었다.
눈앞의 이 남자와 함께.
오벨리아가 꼭 두 손을 말아 쥐었다.
순간 그녀는 충동적으로 그러겠노라 대답할 뻔했다.
에크하르트는 자꾸만 오벨리아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도박을 할 수 없었다.
“허튼 소리 하지 말고 복수나 제대로 해,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홱 에크하르트에게서 돌아섰다.
그녀는 이번에도 도망치듯이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날,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 몰래 사일러스에게 연락을 넣었다.
살고 싶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치료를 받기로 했다.
어쩌면, 그녀를 훨씬 더 이른 죽음으로 이끌지도 모를 그 치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