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더 높이(4)
라이너스가 더 빠르게 공작이 되고 싶어 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의 사랑이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나와 결혼해 주겠어, 아이리스?’
라이너스는 아이리스를 오래도록 마음에 두어왔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청혼했을 때, 아이리스는 자신을 공작 부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라이너스는 그녀를 반드시 그 자리에 앉혀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이리스에게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됩니다.”
“송구하오나, 공작님.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
“카테리안느 공작가의 격에 맞는 안주인을 들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것은 라이너스의 오산이었다.
카테리안느 공작이라고 해서 모두 그의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카테리안느의 원로와 가신들은 단호하게 라이너스의 선택을 반대했다.
심지어는 그를 공작으로 추대하던 이들조차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반대가 더 심했으니 라이너스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에리트나 경, 저들을 어떻게 해야 좋겠나.”
로빌로트 에리트나는 자작가의 차남으로, 라이너스를 오래도록 따라 온 그의 호위였다.
로빌로트는 그로 인해 얼마 전에 카테리안느의 기사단장이 되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저 또한 원로님들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뭐……?”
라이너스는 로빌로트만은 자신의 편이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심지어 로빌로트조차도 라이너스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카테리안느에 평민의 피가 섞여 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라이너스를 지지하던 자들부터가 뼛속까지 혈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판에 라이너스를 따르는 자들이 평민인 아이리스를 공작부인으로 받아들일 리 없었던 것이다.
“에리트나 경, 경이 어떻게……! 에리트나 경만큼은 내 뜻을 지지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이너스가 배신감에 울컥하여 소리쳤다.
그로서는 로빌로트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가장 믿을 수 없었다.
“라이너스 님, 공작님을 가장 지지해 주는 이들이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로빌로트는 냉정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진심으로 라이너스를 따르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라이너스의 결정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전대 공작님의 한결같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원로님과 가신들이 일리어스 님이 아니라 라이너스 님을 지지한 것은…….”
그 순간 얼굴이 붉어진 라이너스가 로빌로트의 말을 매섭게 잘라냈다.
“그 입 닥치게, 로빌로트! 그럼 지금 내가 일리어스 형님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공작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결국 로빌로트가 먼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잔말하지 말고 에리트나 경은 내 뜻에 따르도록 해. 기사단이라도 내 말대로 해야, 원로와 가신들이 뭐라고 한들 밀어붙일 것 아닌가!”
라이너스의 말에 로빌로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라이너스는 로빌로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입을 닫게 만들었다.
“알겠나? 에리트나 경.”
“……예, 모든 것은 공작님의 뜻대로.”
로빌로트가 제 손을 가슴 앞에 가져다 대며 라이너스에게 충성했다.
그러나 로빌로트의 얼굴에는 짙은 걱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
로빌로트와의 대치 이후, 라이너스라고 하여 그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전대 공작, 그러니까 라이너스의 아버지는 카테리안느 내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게다가 황제의 앞에서도 절대 기죽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온 라이너스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낯설었으며 당황스러웠고 또 화가 났다.
원로와 가신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대체 언제쯤 너를 황후 자리에 올려 주실 셈이지?”
그리하여 라이너스는 아그네스를 닦달했다.
그녀가 빨리 황후가 되어야만, 한동안 주춤한 카테리안느가 다시 날개를 달 것이 아닌가.
그리고 카테리안느의 위상이 다시 올라가게 되면 원로와 가신들도 쉬이 라이너스에게 대들 생각 따위 하지 못할 것이고 말이다.
“조급하게 좀 굴지 마세요……!”
그러나 방금 막 티룸에서 돌아온 아그네스는 라이너스가 질문하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녀에게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오자 그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 버렸다.
“지금 뭐 하는 버릇이지, 아그네스?”
라이너스가 목소리를 낮게 깐 채 아그네스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처럼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라이너스 오빠야말로, 제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매번 질문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카테리안느 공작으로서 여동생을 황후 자리에 올려 주는 것쯤 빠르게 해결하지 못하냐는 말이에요……!”
아그네스는 마치 폭주 기관차라도 된 것처럼, 혹은 누가 그녀의 등을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연이어 말을 쏘아붙였다.
“오벨리아는 아무 반대도 없이 손쉽게 황자비 자리에 올랐잖아요!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기다려야만 하는 건데요! 이게 다 라이너스 오빠가 전대 공작님만큼의 능력이 부족해서……!”
“부족한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아그네스 이멜리언!”
아그네스가 몰아붙이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라이너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아까보다 더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오벨리아는 카테리안느 그 자체였어! 혈통도, 능력도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었지! 솔직히 겨우 7황자에게 가기에는 그 아이가 오히려 아까울 지경이었어!”
카테리안느가 아니라 이멜리언.
그 단어에 아그네스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라이너스가 진짜로 자신을 가족이라고 여기리라고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대놓고 그녀와 카테리안느를 구분하고 있었을 줄이야.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런데 너는 내 은혜로 카테리안느가 된 것 빼고는 뭐가 있지?”
물론, 라이너스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하…… 은혜라고요?”
아그네스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를 얼마나 멍청하게만 보면 저딴 말을 지껄인단 말인가.
“말은 바로 하죠, 라이너스 오빠도 내가 필요해서 카테리안느에 들인 거 아니에요? 황후가 될 내가 필요해서!”
라이너스가 일리어스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그네스도 알고 있었다.
라이너스가 아닌, 일리어스가 자신의 편이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 게 몇 번이던가!
“어차피 라이너스 오빠나 나나 피차 이용할 관계, 그러면 오빠가 카테리안느 공작으로서 할 역할은 다 해줘야지요!”
아그네스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요즘 카테리안느 영애로서 레베카의 도움을 받아 이제 막 다른 영애들과 제대로 된 친분을 쌓던 찰나였다.
그런데 오늘, 그렇지 않아도 티룸에서 열 받을 만한 소리를 들었는데 라이너스가 아그네스를 자극한 것이다!
“지금 무슨 소리가 도는지 알아요? 알렉산드로가 나를 황비에 앉혀 두고, 다른 영애를 황후 자리에 올리려고 한다는군요!”
아그네스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 정보를 누군가에게 직접 들은 것도 아니었다.
티룸에서 우연히 화장실을 가다가 남작가의 두 영애가 아그네스를 비웃으며 속닥이는 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아그네스를 더 화가 나게 만들었다.
두 남작 영애는 이제 겨우 시골에서 상경한 이들로, 사교계 소문에 밝을 만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둘이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아그네스만 이 소문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라이너스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소리쳤다.
감히 카테리안느 가의 영애를 황비 자리 따위에 놔두려고 하다니, 황제가 카테리안느를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 라이너스 오빠도 몰랐군요?”
아그네스가 일순 대놓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라이너스를 쳐다봤다.
그녀는 혹시 라이너스와 알렉산드로가 짜고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닐까 고민했었던 게 전혀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라이너스도 아그네스만큼이나 알고 있는 게 없던 것이다!
“지금 그게 중요해? 황제 폐하가 내 가문과 나, 그리고 너를 동시에 엿 먹인 셈인데!”
라이너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아그네스가 자신도 모를 일을 알아낼 만큼 정보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우연하게 이런 내용을 티룸에 갔다가 주워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사교계에 소문이 많이 퍼졌다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라이너스가 몰랐다면 그 정보를 누가 통제했겠느냔 말이다!
“……이 모든 게 알렉산드로가 벌인 짓이라고요?”
아그네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설령 알렉산드로가 그녀를 황비 자리에 앉히려 했더라고 할지라도, 그와 동시에 자신을 이렇게 철저하게 속이려 들었다는 것까지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던가.
“그러면 나까지 모르게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감출 수 있는 사람이 황제 폐하밖에 더 있어?”
라이너스가 신경질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그가 몰랐던 이유는 아그네스가 모르게 하기 위하여, 라발리에가 정보를 주의해서 흘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오벨리아가 선황제와 나눈 비밀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선황제와 알렉산드로의 계획을 미리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라이너스가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정확히 오벨리아의 의도대로 알렉산드로를 오해했다.
“……감히 나와 카테리안느를 우습게 만들다니,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이너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때마침, 새로운 카테리안느 저택의 집사가 그를 찾아와 말을 전했다.
“공작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바쁜 거 안 보…….”
그것을 짜증스러운 태도로 내치려던 라이너스의 행동은 이어지는 집사의 말에 곧바로 뚝 멎어 버렸다.
“철광석 사업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