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더 높이(6)
“……하, 이젠 미쳤다고 하기도 지쳐!”
오벨리아가 이를 악물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 소리쳤다.
아무리 라이너스가 직접 죽인 아버지라지만, 전 카테리안느 공작이 죽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아그네스를 환영하기 위하여 연회를 열다니, 그것도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조차 자리를 비운 이 시점에 말이다!
파티를 준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안주인의 역할이었다.
가주의 자리가 그렇듯이, 가문의 안주인 자리 또한 물려주는 것이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현재 누구에게도 안주인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안주인도 없이 연회를 열겠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는 그들의 어머니 또한 무시하는 셈이었다.
“아예 연회를 망치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에크하르트의 시선이 분주히 오벨리아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녀의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아주 성대하게 열도록 내버려 둬.”
오벨리아가 어두워진 시선으로 두 눈을 내리깔며 조곤조곤히 말했다.
“이번엔 우리가 그쪽 연회에 참석해 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
오벨리아의 시선이 유독 서늘했다.
***
오벨리아의 요청에 따라 사일러스는 그의 사람을 보내 주었다.
그녀의 치료는 자신의 티룸에서 에크하르트조차도 모르게 비밀리에 조용히 진행되었다.
“쿨럭……!”
쨍그랑!
오벨리아가 들고 있던 잔을 손에서 떨어트렸다.
‘가루다의 불씨’는 그 이름 그대로 타는 듯한 붉은색을 가진 것이었다.
그것이 그대로 바닥으로 엎질러지고, 천에 그을음이 생겼다.
그녀의 몸이 고통으로 인해 앞으로 굽었다.
“안 되겠습니다, 더 이상 독을 투여했다가는……!”
사일러스가 보낸 신관, 센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벨리아의 몸이 쓰러지는 것을 잡아 주었다.
그 덕에 그녀는 겨우 바닥으로 고꾸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직…… 오늘치를 다 못 마셨어, 다시 주게.”
오벨리아가 신관의 팔을 잡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바르르 떨리는 손을 신관에게 내밀었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저희로서도 독으로 독을 치료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만 봤을 뿐,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로 봐서는…….”
“이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는 지치듯 쓰러져 잠드는 것도 덜하고, 식사도 훨씬 수월해.”
오벨리아도 독을 먹고 죽는 게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계속해서 치료를 받으려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피를 토하는 게 심해진 것 빼고는 전보다 모두 나아졌다는 이야기야.”
“그렇지만…….”
센티스는 독을 건네주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다시 한번 잔을 내밀었다.
“어서.”
“……알겠습니다.”
센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오벨리아가 내민 잔에 독주를 따라 주었다.
독 그 자체로 마시기에는 지나치게 괴롭기 때문에, 술에 타서 마실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에크하르트에게는 비밀로 해야 해.”
불길한 색으로 검붉게 빛나는 액체를 바라보며 오벨리아가 센티스에게 재차 당부했다.
그 후 그녀는 곧바로 그 독한 것을 바로 들이켰다.
“우윽……!”
오벨리아가 다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독한 맛과 끔찍한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지이익.
그녀의 손톱이 소파의 가죽을 긁는 소리가 끔찍하게 울렸다.
“쿨럭, 쿨럭……!”
결국 오벨리아가 참지 못하고 다시 피를 토해냈다.
가루다의 불씨를 입 안에 털어 넣을 때마다 목구멍을 통해 피가 비집고 올라왔다.
매번 겪는 일이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그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바닥으로 흘렀다.
오벨리아의 몸이 덜덜 떨렸다.
더운 피가 토해지자 갑자기 싸늘히 몸이 식은 탓이었다.
“대공비 전하, 정말 안 되겠습니다. 지금 체온도 너무 낮아지셨고…….”
“다시 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오벨리아가 이렇게 단호하고 독하게 굴 때마다 센티스는 자신이 독을 마신 듯 아연하고 창백해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결코 그녀의 뜻을 꺾지 못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피를 토한 뒤에야, 오벨리아는 가루다의 불씨가 담긴 독주를 한 잔 모두 마실 수 있었다.
***
아그네스의 환영회 당일이 되었다.
현재 오벨리아는 이틀에 한 번씩 가루다의 불씨를 마시고 있었는데, 하필 어제 유독 각혈이 극심했던 탓에 오늘따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벨리아, 오늘따라 더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에크하르트는 그런 오벨리아의 상태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요즘 대체 무얼 하고 다니는 거지? 종종 상태가 극심히 나빠지는 거 같은데…….”
아니, 사실 이미 오벨리아의 상태에 대하여 그동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그저 모른 척한 것이었다.
“셀리아한테 내 상태 전달받아서 알잖아. 요즘은 각혈도 줄었고 식사도 이전보다 수월하게 한다는 거. 오히려 매일 이정도만 되면 하루를 버틸 만할 것 같을 지경이야.”
그렇지만 지금껏 입을 다문 오벨리아가 인제 와서 사실을 밝힐 리가 없었다.
다행히도 가루다의 불씨가 담긴 독주를 마실 때를 제외하면, 평소에 하는 각혈은 줄어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핑계 삼아 에크하르트에게 거짓을 말했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어두운 낯빛으로 오벨리아를 불렀다.
분명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말을 하지 않으니 속이 답답한 것은 둘째치고 오벨리아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빨리 마차에나 타. 아그네스와 라이너스가 기껏 연 연회인데, 늦어서야 되겠어?”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를 쳐다보지 않은 채 고개를 까닥였다.
결국 그가 한숨을 삼키며 마차에 올라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 손을 잡아 마차에 올랐다.
에크하르트의 손이 오늘따라 유독 뜨거운 것인지, 오벨리아의 손이 오늘따라 유독 차가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맞잡은 손의 온도 차가 유독 확연했다.
***
아그네스는 새로운 카테리안느 저택과 황제의 궁을 오가며 생활했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자신의 화려한 등장을 위해서라도 알렉산드로와 같이 연회장에 입장할 생각이었다.
“……뭐?”
그런데 아그네스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죄송하지만, 황제 폐하의 업무에 급한 일이 생기셔서 오늘 연회에 참석하시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십니다.”
알렉산드로의 시종장이 아그네스를 찾아와 그녀가 예상치도 않았던 말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게 말이 돼? 정말로 급한 일이 있었다면 왜 그걸 연회의 당일인 오늘에서야 전하냐는 말이야……!”
아그네스가 곧바로 시종장에게 따지고 들었다.
황후 세 후보 중 사교계의 인지도로 따지자면 냉정하게 말해서 자신이 가장 하위에 있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카테리안느의 이름을 걸고 더욱 연회를 크게 벌이는 것이었고, 그곳에 알렉산드로가 함께 하는 건 필수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알렉산드로가 연회에 참석할 수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설마, 처음부터 같이 참석할 생각 따위 없었는데 내가 다른 말 못하게 하려고 지금에 와서야 말하는 거야?!”
아그네스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맞으리라 짐작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오늘 당장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겼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아니니, 일단 진정하시고…….”
“그게 아니면 급한 일이라고만 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 나한테 똑바로 설명해!”
아그네스가 시종장의 말을 끊어내며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그녀가 이해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면, 이렇게 시종장을 보낼 게 아니라 알렉산드로가 직접 왔어야 할 게 아닌가!
이딴 식으로 구는 알렉산드로의 태도가 아그네스의 화를 더욱 돋웠다.
“황실의 일이라, 아직 외부인이신 카테리안느 영애께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
쫘악.
그 순간, 시종장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외부인? 내가 외부인이라고?! 난 알렉산드로의 아이를 가졌어! 너도 알 텐데, 말을 그따위로 해?!”
분노한 아그네스가 시종장의 뺨을 홧김에 내리친 것이었다.
시종장의 얼굴이 순간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것은 비단 그녀에게 맞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황제의 시종장은 아무나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고, 지금의 시종장 역시 대대로 황제를 모셔 온 후작 가문의 차남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행패를 당해 봤을 리 없었다.
시종장 또한 마찬가지로 분노하여 싸늘히 말을 내뱉었다.
“아그네스 영애께서는 현재 황제 폐하의 정부이실 뿐이니, 공식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시지요.”
정부는 결국 비공식적인 자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시종장의 말은 틀린 바가 없었다.
“너……!”
아그네스가 눈이 홱 돌아가 시종장을 밀쳐냈다.
“너 따위하고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으니까 비켜!”
“어딜 가시는 겁니까!”
아그네스가 시종장의 어깨를 거세게 치며 그를 지나쳤다.
문을 나서려는 그녀를 시종장이 붙잡으려던 찰나였다.
“설령 내가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감히 시종장 따위가 황제의 아이를 가진 몸에 손을 대겠다는 거야?!”
그 순간 아그네스가 눈을 부릅뜨며 시종장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선 따위 단 하나도 두렵지 않았으나, 시종장으로서도 아그네스의 말에 담긴 내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아그네스는 황제의 집무실로 내달렸다.
“아그네스 님……! 그렇게 뛰시면 안 됩니다!”
아그네스를 보좌하던 황궁의 시녀들이 놀라 그녀의 뒤를 빠르게 따랐다.
그러나 화가 나 앞뒤 가릴 것 없는 아그네스는 자신을 쫓아오는 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황제의 집무실까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벌컥!
그리고 기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아그네스를 어찌할지 당황하여 어떤 대처를 취하기도 전에, 아그네스가 감히 황제의 집무실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엘라사나 로이안이 알렉산드로와 함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