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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81화 (81/136)

81화. 더 높이(7)

“지금 뭣들 하는 짓이야……!”

아그네스가 단번에 온 얼굴을 구기며 빼액 소리를 내질렀다.

엘라사나와 알렉산드로가 마주 서 있는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짧았기 때문이다.

엘라사나가 혀를 차며 아그네스를 쳐다봤다.

“여전히 교양과 품위라고는 없으시네요, 이멜리언…… 아니, 카테리안느 영애.”

엘라사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그네스를 무시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그런 엘라사나를 책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아그네스가 더욱 열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던 아그네스가 엘라사나와 알렉산드로 사이에 끼어들어 두 사람을 양쪽으로 밀쳤다.

“하, 남의 남자한테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엉겨 붙기나 하려던 주제에……!”

그 거센 힘에 엘라사나가 휘청거리자 알렉산드로가 미간을 확 찡그렸다.

지금껏 그 무거운 입을 다물고만 있던 그가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아그네스.”

“뭐 하는 짓?!”

아그네스가 곧바로 알렉산드로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아그네스가 검지로 척, 척, 알렉산드로와 엘라사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솔직히 아그네스로서는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아그네스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이 밀회하다가 그녀에게 들켰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게 아닌가!

“나와 함께 연회에 가야 하는 날에 하필 저 여자랑 같이 있는데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 나 참…….”

엘라사나가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곧바로 불쾌함을 표현했다.

“내가 누구처럼 아직 약혼조차도 하지 않은 미혼의 영애면서 남몰래 밀회 따위나 할 사람으로 보이나 봐요? 천박하긴…….”

엘라사나의 시선이 제 손톱과 아그네스를 오갔다.

그 시선이 아그네스를 깎아내리고 그녀를 향해 빈정거리고 있었다.

“지금 천박하다고 했어?! 감히 누구한테……!”

아그네스가 길길이 날뛰며 엘라사나에게 손을 휘둘렀다.

이전이야 신분상으로 로이안 후작가에게 밀려 참았다지만, 이제 그녀는 카테리안느 공작가의 사람이었다.

더는 참을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아그네스!”

그러나 그런 아그네스의 손을 잡아 막은 것은 알렉산드로였다.

그가 망설임 없이 아그네스의 손목을 낚아챈 덕에, 그 힘의 격차로 인해 그녀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황제의 집무실에 제멋대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렇게 행패를 부려? 넌 대체 언제쯤……!”

잡고 있던 손목을 내팽개치며 알렉산드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마치 아그네스가 어떤 골칫덩어리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

“네 방으로 돌아가.”

알렉산드로가 휙, 휙 손짓했다.

아그네스가 순간 이를 아득 갈며 소리쳤다.

“내가 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를 것 같아, 알렉산드로?! 나를 황비 자리에 앉히고 저 여자를 황후 자리에 올리려는 거잖아!”

로이안 후작가는 알렉산드로가 쉽게 회유할 수 있는 가문이 아니었다.

그런 가문을 황후 자리 하나 내어주고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아그네스는 그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카테리안느 영애, 말을 조심하시죠. 아까부터 저 여자, 저 여자…… 로이안 후작가에서 공식적인 항의라도 받고 싶은 거예요?”

“하, 겨우 로이안 따위가……!”

“당신이야말로!”

아까부터 내내 조곤조곤히 말을 잇던 엘라사나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키웠다.

“좀 자중하고 주제를 아는 게 어때?”

엘라사나가 충고하듯이 말했다.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카테리안느가 예전의 그 카테리안느인 줄 알아?”

순간 아그네스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그네스가 도끼눈을 뜬 채로 엘라사나에게 달려들었다.

“악!”

“설령 카테리안느가 이전 같지 않더라도!”

자신이 어떻게 카테리안느에 입성했는데.

마치 카테리안느가 몰락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엘라사나의 발언을 아그네스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카테리안느는 이전과 같은 위용을 자랑하며 귀족들 사이의 절대자로 군림해야만 했다.

‘반드시…… 날 위해서!’

아그네스의 손가락이 엘라사나의 머리칼에 엉켜 들었다.

아그네스는 결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꽉 틀어쥐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었다.

“아악! 이거 놔! 놓으라고!”

“아그네스! 당장 놔!”

엘라사나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를 말렸으나, 그녀는 좀처럼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아이를 가진 아그네스를 밀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는 이도 저도 하지 못했다.

결국 아그네스가 떨어진 것은 엘라사나의 발버둥에 채 버티지 못한 한참 후였다.

“미친 거야?! 어떻게 이런 무식한 짓을……!”

엘라사나가 몸을 움츠린 채 얼른 아그네스에게서 빠르게 멀어졌다.

아그네스는 아직도 곧바로 덤벼들 듯이 씩씩거리고 있었으나, 알렉산드로에게 막혀 더는 덤벼들지 못했다.

“꼬우면 카테리안느에 정식으로 항의하던가!”

아그네스는 당당했다.

어차피 이제 카테리안느 영애는 그녀뿐이었다.

아무리 라이너스가 아그네스를 진짜로 소중히 여겨서 카테리아느 가문에 입적시킨 게 아니라고 해도, 카테리안느의 입장 상 절대 그녀를 그냥 망신당하게 두진 않으리라!

“그만!”

알렉산드로가 거기서 두 사람의 대치를 끊어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2차전이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로이안 영애, 오늘 일은 내가 추후 보상하도록 하겠네. 일단 오늘은 돌아가도록 해.”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에게서 등을 진 채 엘라사나에게 말했다.

엘라사나가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애써 손으로 정리하다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우선, 시녀를 붙여 주세요. 누구 덕에 머리와 옷이 엉망이 되어서요.”

“그렇게 하지.”

“알렉산드로!”

아그네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황제의 집무실에 있던 엘라사나가 올 때와 다른 드레스를 입고 황궁을 벗어나면, 대체 어떤 소문이 돌겠느냔 말이다!

“추후 주실 보상 또한 오늘 치른 이 모욕을 상쇄할 만한 것이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엘라사나와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의 그 경악을 무시했다.

엘라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그에게 요구했다.

“약속하지.”

알렉산드로가 말과 동시에 시녀를 불러들였다.

그것도 일개 시녀가 아닌, 황제궁의 시녀장을 말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엘라사나가 아그네스에게 힐끔 눈길을 주었다.

엘라사나는 아그네스에게 보란 듯 미소하고 있었다.

그 당당하고 오만한 태도가 다시금 아그네스의 속을 뒤집어 놨다.

그러나 여전히 알렉산드로가 굳건히 아그네스를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번만큼은 달려들지 못했다.

“모시겠습니다, 로이안 영애.”

곧 시녀장이 들어와 엘라사나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평소에 아그네스를 대하던 시녀장의 태도를 생각하면, 그조차도 그녀로서는 당장이라도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행동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황제 폐하.”

엘라사나는 더 이상 아그네스 따위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이 오직 알렉산드로만을 시선에 담은 채 우아한 태도로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마치, 자신이 얼마나 아그네스와는 다른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처럼.

탁.

엘라사나가 나가고 집무실 문이 닫힐 때까지,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그 사이를 맴도는 싸늘한 침묵을 깨고 아그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홱 돌아선 알렉산드로가 대놓고 피곤하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내가 대체 뭘 어쨌는데? 너야말로, 도대체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갈 수는 없는 건가?”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이야?”

매번 악을 질러대던 아그네스도 알렉산드로의 시종일관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에 말을 잃었다.

그는 엘라사나와 같이 있는 장면을 들키고서도 내내 아그네스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

“황후 자리는 내 것이라며, 나한테 약속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날 황비 자리에 앉히려고 할 수가 있어?”

알렉산드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아그네스가 자신을 떠보는 게 아닌지 가늠하는 태도였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이미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는데, 내가 모르리라고 생각했냐고!”

“누가 그걸 너한테 말해 줬지?”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오벨리아가 너와 내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수작을 부린 걸 수도 있으니까!”

선황제와 알레산드로는 그들의 계획을 외부로 유출시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그네스가 이 상황을 안다는 것은, 누군가 그녀가 알게 했음이 분명했다.

“너와 나 사이를 이렇게 갈라놓아서 이득을 볼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럼 모든 게 헛소리고 내 오해라는 거야?”

아그네스가 일순 희망에 차 물었다.

잠시 멈칫했던 알렉산드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진실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언제, 어떻게 아그네스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은 심정이었다.

“선황 폐하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고위 귀족가의 영애를 황후 자리에 앉히면, 아그네스 너를 황비 자리에 올려도 괜찮다고 허락하셨어.”

“알렉산드로……!”

아그네스의 안에서 그 잠깐 일어났던 희망조차 산산이 부서졌다.

알렉산드로는 정말로 그녀를 배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네 출신을 생각해 봐, 아그네스. 역대 론체스터의 황후 중 타국 출신은 없었어.”

론체스터는 이 대륙 위의 단 둘뿐인 제국이었지만, 사실은 그렇기에 폐쇄적인 면이 상당히 많았다.

제국의 귀족들은 대부분 제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지나쳤고 고위 귀족일수록 더더욱 그랬다.

사실, 최상위 먹이 사슬에 위치한 카테리안느 가의 오벨리아가 아그네스를 거리낌 없이 제 친척 가문에 들인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이 제국에서 모르는 것은 아그네스뿐이었다.

그러니 어디 귀족들이 아그네스를 자신들의 황후로 떠받들겠느냔 말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상쇄할 카테리안느라는 무기가 아그네스에게는 있었으나, 알렉산드로는 굳이 그 점을 꼬집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기어코, 나한테 황후 자리를 못 주겠다는 거네……?”

알렉산드로의 태도에서 답을 확신한 아그네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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