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더 높이(8)
“황비 자리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가만히 있어.”
아그네스의 태도에 알렉산드로가 정색하며 말했다.
“겨우 황비 따위가 될 거라면 이 짓은 시작도 안 했어!”
그렇다고 아그네스가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지만.
“두고 봐, 당장 라이너스 오빠한테 이 사실을 알려서…….”
“정말 성가시게 구는군.”
알렉산드로가 혀를 차며 아그네스의 말을 끊었다.
그는 그녀가 다음 말을 내뱉을 틈을 주지 않았다.
알렉산드로가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곧바로 기사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그네스를 방으로 돌려보내. 그리고 내가 허락할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감시하도록.”
“지금 날 감금하겠다는 거야?!”
기사들에게 두 팔을 각각 하나씩 붙들린 아그네스가 경악한 얼굴로 알렉산드로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일이 모두 정리될 때까지만 얌전히 자숙하고 있어.”
아니, 알렉산드로는 뻔뻔했다.
그 태도에 꽉 주먹 쥔 아그네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데려가.”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의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짓 했다.
“알렉산드로……!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아그네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탁.
그러나 기사들은 착실히 그녀를 끌고 나갔고, 집무실 문은 매정하도록 단호하게 닫혔다.
***
오벨리아는 어수선한 파티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티는 카테리안느의 건재함을 과시하듯이 더없이 화려했으나 주인공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티의 중반이 넘어가는 시점에도 아그네스는 코빼기도 연회장에 보이지 않았다.
파티에 초대된 귀족들의 수군거림은 점차 커지고, 라이너스의 얼굴은 굳어갔다.
그리고 에크하르트의 기사가 다가와 그에게 무언가를 속닥였다.
“엘라사나 로이안이 방금 막 황궁을 벗어났다고 하는군. 그렇지만 그 외에 황실의 마차는 모조리 준비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야.”
에크하르트가 기사에게 받은 보고를 오벨리아에게 속닥였다.
그의 말은 오늘 아그네스가 황실의 마차를 탈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아그네스는 이토록 화려한 자신의 환영회에 올 수 없었다.
“로이안 영애를 황궁으로 보낸 보람이 있네.”
황후 후보는 셋.
그에 따라 그 세 명을 따르는 귀족도 나뉘었다.
오벨리아는 자신이 소유한 티룸을 이용해, 엘라사나를 따르는 귀족들에게 계속해서 바람을 불어넣었다.
‘황제의 정부인 아그네스를 먼저 용납해 준다면, 황제는 분명 그 영애를 황후로 맞이하려 할 것이다.’
바람이 불고 주변의 나무가 모두 흔들리는데, 홀로 잎조차 살랑거리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거기에 대고 오벨리아는 일부러 직접 쐐기를 박아 넣었다.
‘이멜리언 영애의 이번 연회만 망치면, 황후 경연의 첫 번째 과제인 사교계 입지 항목은 로이안 영애가 단연코 1등일 텐데 말이에요.’
물론, 오벨리아가 일부러 엘라사나더러 카테리안느의 연회가 있는 날 알렉산드로에게 쳐들어가라고 한 말이었다.
그래야만 오벨리아의 존재로 인해 라이너스와 아그네스가 더 초조해질 테니까.
상황이 이렇게까지 온 이상, 알렉산드로가 그들에게 아무리 오벨리아의 수작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들어 먹히지도 않을 테고.
사교계 입지에 관한 항목은 무려 황후 경연의 첫 번째 과제였다.
뭐든, 처음을 이기고 들어가면 승기를 잡기 쉬운 법이었다.
그리고 아그네스는 자신의 이름과 카테리안느의 존재를 내건 파티에 불참한 시점에서부터, 첫 번째 과제를 완벽히 망친 셈이 되었다.
그러니 아그네스와 라이너스는 더더욱 초조해질 터였다.
아그네스를 황후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는 무리수를 두기 딱 좋았다.
“그럼 가 볼까.”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에게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라이너스에게로 향했다.
“초조한가 봐, 공작.”
오벨리아가 라이너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카테리안느.
방금 자신을 부를 때 그녀가 일부러 그 이름을 빼먹었음을 눈치챈 탓이었다.
“……그럴 리가요.”
그러나 라이너스가 못마땅하건 말건, 그는 공식적으로 공작이고 오벨리아는 대공비였다.
그러니 라이너스는 말을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그네스는 안 와. 아니, 못 올 거야.”
오벨리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러자 라이너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역시 너, 무언가를 알고 있는……!”
라이너스가 오벨리아에게 훌쩍 다가오자, 그 앞을 에크하르트가 막아섰다.
“너라니. 공작, 무례하군.”
에크하르트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위압감이 넘쳤다.
움찔한 라이너스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대공비 전하.”
“아니, 괜찮아. 뭐…… 원래 그랬잖아?”
라이너스가 원래도 무례했다는 소리였다.
오벨리아가 입꼬리를 비틀며 빈정거렸다.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이 상황을 뒤엎고 싶은 심정일 터였다.
“아그네스가 왜 여기에 못 오게 되었는지 궁금할 테니, 내가 알려 줄게.”
오벨리아는 라이너스를 더더욱 약 올리듯이 상냥한 목소리를 내었다.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를 못 오게 할 거거든.”
“뭐……?”
“공작도 알다시피, 알렉산드로가 황후로 올리려고 하는 사람이 아그네스는 아니잖아?”
라이너스의 두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아그네스에게 말을 흘렸으니, 역시 오벨리아의 말대로 그도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연회가 망해야 할 테고.”
오벨리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잖아.”
라이너스의 부정을 오벨리아가 곧바로 끊어놓았다.
“8년간 헌신한 나도 내다 버렸는데…… 너나 아그네스가 중요하겠어?”
“아그네스는 황제 폐하의 아…….”
“그것도, 뺏으면 그만이지.”
애초에 알렉산드로와 라이너스 그리고 아그네스 사이에는 신뢰란 것이 없었다.
오랜 믿음을 쌓아 온 관계의 배신으로 시작한 사이였다.
8년을 헌신한 아내.
피를 나눈 혈육.
죽을 뻔한 진탕에서 구해 준 은인.
세 사람에게 오벨리아를 배신한다는 사실은 모두 그런 이를 등졌다는 타이틀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그런 점을 알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 어떻게 완벽한 신뢰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젠장, 로빌로트!”
라이너스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오벨리아를 등졌다.
라이너스가 다급하게 카테리안느의 기사단장, 로빌로트를 불렀다.
로빌로트가 라이너스의 부름을 알아듣고 다가오는 것이 눈에 보였으나, 라이너스는 그 잠깐조차 참지 못했는지 발걸음을 로빌로트 쪽으로 서둘러 옮겼다.
조금 격해 보이는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곧 자리를 비웠다.
라이너스까지 파티장에서 사라져 버리자, 연회의 주인공도 가문의 주인도 없는 연회는 결국 완전히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기껏 카테리안느의 건재함과 아그네스의 입적을 화려하게 알려, 재기를 꾀하려던 라이너스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
마차로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에 돌아오는 길, 오벨리아는 기분이 저조했다.
인제 와서 라이너스나 아그네스, 알렉산드로를 등지는 일에 죄책감 따위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몸에 갑자기 극심한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몸이 좋지 않거나, 체력이 떨어질 때마다 오벨리아는 좀처럼 자신의 기분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에서 온다고, 근간이 흔들리니 평정심 또한 유지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저희도 이런 치료는 처음이기 때문에 언제 부작용이 나타날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러니 항상 몸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센티스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가 말했던 부작용인 모양이었다.
오벨리아는 자신의 상태를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일부러 창밖을 바라보며 에크하르트의 쪽을 외면하는 중이었다.
“오벨리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러나 오벨리아가 아무리 자신의 상태를 숨기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에크하르트는 숨 상태로도 오벨리아가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언제나 그렇잖아. 내 몸 상태가 왔다 갔다 하는 거.”
오벨리아가 애써 변명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속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나 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곧 그의 두 눈에 경악이 차올랐다.
“오벨리아, 너 체온이 심하게 떨어지지 않았나……!”
에크하르트가 경악하여 오벨리아에게 자신의 망토를 둘러 주었다.
혹시나 그녀에게 필요한 일이 있을까 봐, 그는 더운 날에도 두툼한 망토를 가지고 다녔다.
이렇게 쓰이길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 괜찮…….”
오벨리아의 몸이 점차 떨렸다.
애써 괜찮은 척하려던 게 무너지자,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증상들이 몰려왔다.
“마차를 빨리 달려!”
에크하르트가 마부석으로 이어지는 창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그가 얼굴이 사색이 된 채로 오벨리아를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오벨리아의 체온을 올려주기 위해서였다.
“오벨리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해. 절대로 잠들면 안 된다. 그러니까……!”
잠이 들면 더욱 체온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에크하르트는 그사이에 오벨리아가 어떻게 될까 봐,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점차로 흐릿해졌다.
오벨리아의 두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자꾸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했다.
호흡은 불안정했고, 두툼한 망토로 몸을 감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체온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오벨리아, 정신 차려라. 제발…….”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를 끌어안은 채로 숫제 빌 기세였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간절하던지, 결국 그녀는 눈꺼풀의 무거움을 이기지 못했다.
“오벨리아……!”
자신을 애달프게 부르는 에크하르트의 목소리를 끝으로, 오벨리아에게 암전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