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더 높이(9)
오벨리아를 진찰하던 셀리아가 물었다.
“……오벨리아 님께서 혹시 최근에 무언가 다른 약을 드셨습니까?”
“……지금 그게 무슨 소리지?”
물론, 에크하르트로서는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바실리스크의 독 때문이라면 평소처럼 열이 오르시는 게 정상일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정반대로 체온이 극도로 떨어지셨죠.”
모두가 얇게 입고 다니는 날씨였다.
그런 판국에 오벨리아는 홀로 두꺼운 털 모피로 만들어진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온이 오르지 않아 시녀들이 오벨리아에게 달라붙어 그녀의 체온을 끌어올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렇게 상반된 현상이 일어나는 건 오벨리아 님께서 드신 것이 바실리스크의 독에 무언가 영향을 줬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설마…….”
에크하르트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있었다.
사일러스.
그 신관이라면 얼마든지 오벨리아에게 약을 처방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따라왔다.
그렇다면 왜 굳이, 약을 처방받은 사실을 숨겼는가?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숨길 이유라면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 치료 과정에서 알려지지 말아야 할 어떤 위험이 따르는 것.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에크하르트가 자신의 그림자 기사를 불러들였다.
“그간 오벨리아가 엘라이스트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알아봐, 빨리!”
에크하르트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기사가 무릎을 꿇고 빠르게 사라졌다.
기사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에크하르트가 다시 셀리아를 돌아봤다.
“네 말대로 약, 아니…… 어쩌면 독일 수도 있어.”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말이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다.
약 또한 오용하거나 남용하면 독이 될 수 있었다.
애초에 독과 약은 한 끗 차이가 아니던가.
“오벨리아가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 기사보다 빠르게 알아내면 수도에 그대가 원하던 의료원을 차려 주도록 하지.”
의료원.
그것은 셀리아의 오랜 염원이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러나 그것을 감히 수도에 차릴 생각은 해 보지 못한 터였다.
그도 그럴 게 의료원을 차린다고 했을 때 그곳에 들어가야 할 기본적인 시설이나 도구들, 약초 같은 것들만으로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었다.
그런데 제국 내에서 땅값이 제일 값비싼 수도 한복판에 의료원이라니!
힐켄테데의 재력을 알고 있는 셀리아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농담을 하는 것 봤나? 더 이상의 사설은 말고 오벨리아를 치료하는 데 집중하도록 해.”
에크하르트가 단호한 얼굴로 명령했다.
그 냉엄한 태도에 셀리아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셀리아가 약 제조를 위해 방을 나간 후에도 에크하르트는 한참 동안 오벨리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를 자신의 궁에 가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후, 라이너스는 곧바로 황궁으로 달려갔다.
아그네스가 그냥 이멜리언이었다면 알 바 아니었겠지만, 아그네스의 뒤에 달린 것이 카테리안느의 이름인 이상 라이너스는 절대 알렉산드로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폐하, 카테리안느 공작님께서 알현을 요청하십니다.”
라이너스는 그나마 마지막 이성을 차려, 알렉산드로의 집무실로 쳐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무조건 황제의 집무실로 밀고 들어갔다면 오히려 카테리안느 공작으로서 문책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찾아오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종이 안에서 받아 온 알렉산드로의 말은 명백한 거절이었다.
라이너스가 순간 이를 악물었다.
전대 카테리안느 공작이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이 형편없는 대우였다.
그 호랑이 같던 선황제조차도 한 수 접고 넘어가던 것이 죽은 카테리안느 공작이었으니까.
“기다리겠다고 전해.”
라이너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종이 난감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라이너스가 다시 한번 고갯짓했다.
“어서, 전하도록.”
결국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알렉산드로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쾅!
참지 못한 라이너스가 문을 거세게 내리쳤다.
“카테리안느 공작님!”
시종이 놀라 라이너스를 막아섰다.
감히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 벌이기에는 지나치게 무례한 행동이었다.
“황제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이너스는 시종이 쩔쩔매건 말건, 목소리를 높였다.
라이너스의 안에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광석 광산의 매입에 성공하여, 철도 사업에 투자를 좀 더 늘릴까 합니다!”
쩌렁쩌렁한 라이너스의 목소리가 황궁의 복도를 울렸다.
황궁의 곳곳에는 많은 이들의 귀와 입이 존재했다.
라이너스라고 한들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엄연히, 모두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알렉산드로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
오벨리아는 깨어나자마자,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에크하르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센티스가 마치 죄인처럼 어쩔 줄을 모르며 앉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빠른 상황 파악을 끝낼 수 있었다.
“……몸은, 괜찮나?”
오벨리아와 시선을 마주친 에크하르트가 곧바로 그녀의 입가에 물잔을 대어 주며 물었다.
너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넘어가자, 오벨리아는 그제야 꺼끌꺼끌하던 목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한테 물어볼 게 많겠네.”
오벨리아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오늘따라 유독 몸이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리며 인 현기증 때문에 금방 착각이겠거니 넘겼지만.
“넌…….”
그 어떤 말도 아니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오벨리아의 행동에 에크하르트가 말을 잃고 그녀를 쳐다봤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니어도, 무언가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담담한 얼굴로 센티스를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나가 있어 주겠어?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
“예. 알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에크하르트의 두 입매가 점점 더 굳게 다물렸다.
속이 뒤틀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막 깨어난 오벨리아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싶지도 않았다.
갈 길 잃은 화가 그의 안에서 사납게 맴돌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불렀다.
“에크하르트.”
그러나 가라앉지 않는 감정으로 인해 그는 그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나 좀 봐, 에크하르트.”
에크하르트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만 꾹 다물고 있자 오벨리아가 재차 그를 불렀다.
그녀의 손이 에크하르트의 손에 닿는 순간, 그는 참지 못하고 홱 고개를 들어 오벨리아를 쳐다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루다의 불씨를 삼킨 거지?”
순간,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남들은 평생 구경하기도 힘든 그 극악한 독들을 오벨리아는 왜 자꾸 제 몸에 밀어 넣지 못해서 안달인지, 에크하르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차에서 그녀의 체온이 싸늘히 식던 순간, 그가 두툼한 망토를 가지고 있지 않았거나, 조금만 더 늦게 대처했어도 오벨리아는 죽었을 터였다.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애써 감추었으나, 실은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최대한 담담히 설명을 내놓았다.
“센티스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치료하려고 그랬던 거야. 죽으려는 게 아니…….”
그러나 그런 오벨리아의 담담함은 오히려 에크하르트를 크게 자극했다.
“치료?”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말을 뚝 끊어 버렸다.
입 안쪽 살을 짓씹던 그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래, 날 믿을 수 없었겠지.”
그러나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자조 섞인 말조차 가릴 수는 없었다.
“내가 치료법을 구해 준다고 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네게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으니까.”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의 무능력함에 대한 혐오감이 불쑥 치달았다.
하긴, 오벨리아에게 화를 내어 무엇하겠는가.
이 모든 것은 애초에 일찍이 치료법을 찾아내지 못한 자신의 무능인 것을.
“에크하르트, 나는 그게 아니라…….”
오벨리아가 당황하여 다급히 변명했다.
따지고 보면 사일러스에게서 이독제독이라는 치료법을 얻은 것은 결국 에크하르트가 사일러스를 제국에 데려온 덕이었다.
그런데 에크하르트더러 무능이라니.
그녀로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애초에 바실리스크의 독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대륙 위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치료법이 단 하나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것 아니던가.
“그게 아니면? 왜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아니 구태여 철저하게 숨겨가면서 독을 집어먹은 거지?”
답답할 만도 하건만, 에크하르트는 고집스레 제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않았다.
오벨리아에게 이렇게 따지듯이 묻고 있는 것조차 한심한데, 혹시나 그녀를 원망하듯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거 정말 아니야, 에크하르트.”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바람과 달리, 오벨리아는 기어코 그의 두 손을 잡아내려 그가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에크하르트의 눈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럼, 치료법이라는 말에 내 생각 따위는 나지도 않았던 건가?”
결국, 그토록 피하던 오벨리아와 시선이 마주친 에크하르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가루다의 불씨를 집어먹었는지는 알만하지. 복수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 거였을 테니.”
에크하르트의 추측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복수에만 목매달던 오벨리아라면 얼마든지 그 이유만으로도 기꺼이 새로운 독조차 받아들였을 테니까.
“그렇지만…… 사랑한다고, 했잖아, 오벨리아.”
에크하르트도 알고 있었다.
서로 간의 마음의 무게가 언제나 같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 결정의 순간에 단 한 번이라도 내 생각을 해 줄 수는 없었던 건가?”
그러나 알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그랬다면, 너를 사랑하는 내게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는 없었을 텐데.”
예를 들어, 지금 무너지는 에크하르트의 마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