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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84화 (84/136)

84화. 더 높이(10)

아, 오벨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능하다면 또 다른 독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에크하르트에게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오벨리아는 오만하게도 그것이 에크하르트 또한 위하는 일이라고 제멋대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였다.

자신이 타인의 생각까지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그런 오류.

“만약에 가루다의 불씨로 인해 어느 날 네가 돌연…….”

에크하르트가 차마 입에 담기조차 괴로운 듯이 스스로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가 긴 침묵 끝에 말을 골라 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돌연, 내 옆에서 사라져 버렸다면…… 나는…….”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오벨리아가 현재 마시고 있는 극독 또한 음독한 이가 언제 급사해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인사 없는 이별.

그게 얼마나 남은 사람들에게 잔인한 것인지는 오벨리아도 알고 있었다.

전대 카테리안느 공작의 죽음이 딱 그렇지 않았던가.

그제야 오벨리아는 제가 한 짓이 똑바로 눈에 들어왔다.

이기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에크하르트가 그녀에게 아무 존재도 아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오벨리아에게 너무나 큰 존재이기 때문에…….

변명이지만 그래서 이기적이었다.

어떻게든 에크하르트의 옆에 남고 싶었으니까.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울 듯 바라봤다.

떨리고 있는 에크하르트의 손끝과 애써 굳게 다문 입술, 붉어진 눈가.

그 모든 것들이 그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증명했다.

오벨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 아무리 부정하고 숨기려 해 봤자 결국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욕심이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에크하르트를 사랑하고 싶고, 그에게 사랑받고 싶고, 그래서 그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였더라면, 어쩌면 남은 내 시간을 모조리 날려 버릴지도 모를 선택 같은 거 하지 않았을 거야.”

오벨리아는 처음부터 솔직해져야만 했다.

어설프게 욕심을 숨기려, 자꾸만 에크하르트에게 상처를 줄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녀의 욕심은 애초에 사그라들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벨리아는 마침내 부질없던 자신의 고집을 꺾었다.

“욕심 부려서 미안해, 에크하르트.”

그들의 고백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죄와 함께였다.

“너와 함께 살아가고 싶어, 에크하르트.”

오벨리아의 손이 에크하르트의 뺨을 천천히 감쌌다.

손바닥이 그의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망설임이 가득하고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죽고 싶지 않아.”

오벨리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아, 이토록 흘러넘치는 감정을 어떻게 숨기려 했던가.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사랑해, 에크하르트.”

생각해 보면, 레베카를 불러들인 일도 우스웠다.

에크하르트에게 레베카를 붙여 주려고 불러들여 놓고 정작 그 둘만의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 주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오벨리아도 사실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의 옆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서게 되는 모습을.

“지금, 뭐라고…….”

에크하르트가 멍하니 두 눈을 깜박였다.

그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는 최초의 순간조차도 그 마음을 없던 셈 치자고 했던 오벨리아였다.

그런데 그녀가 제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에크하르트로서는 쉬이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런 그에게 제 마음을 다시 한번 알려 주듯이, 오벨리아의 입술이 에크하르트의 입술 위로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 입맞춤은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그가 피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릿했고 조심스러웠다.

“미안해, 당신을 이렇게까지 사랑해서.”

오벨리아가 눈물로 젖은 얼굴이 되어 웃었다.

아,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곧 죽을 테니 에크하르트를 놓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벨리아는 지금도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옳음을 알면서도, 이제는 실천할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그러니까…… 내가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 줘, 에크하르트.”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를 놓을 수 없었다.

놓기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기어코 또 다른 잔인한 부탁을 그에게 했다.

“오벨리아!”

“제발, 에크하르트.”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에크하르트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오벨리아가 다급하게 그의 두 손을 붙들고 매달렸다.

한때, 오벨리아는 사랑이 조건 없는 헌신과 함께한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자면…… 알렉산드로가 배반하기 전까지 그녀가 잃은 것이 있던가?

남편의 사랑, 황태자비로서의 경애, 그 끝에 쥐어질 권력과 명예.

오벨리아는 그 모든 것들을 기어코 거머쥐려고 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자신의 사랑은 처음부터 헌신이 아니라 욕망과 함께했다.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무엇도 남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한없이 잔인하다는 걸 알아.”

오벨리아는 자신의 말들이, 에크하르트로 하여금 끝내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게 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해 보게 해 줘. 더 늦으면, 이런 치료법도 소용없을 거라고 했어. 당신과 내 미래가 이미 끝이 예고된 사이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제발, 에크하르트.”

“그러다가…… 이 치료법이 실패해서, 네가 죽으면?”

이독제독.

론체스터 제국이 있는 대륙 위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치료법이었다.

누가 이 치료법으로 나았다는 그런 소문조차 없는 확실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목숨을 내거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하라고, 오벨리아…… 제발.”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에게 매달렸다.

그로서는 단 하루라도 그녀의 생을 깎아 먹을 수 없었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러나 에크하르트에게는 애석하게도, 오벨리아가 카테리안느의 이름을 달고 있었을 때처럼 줄 것이 많지 않은 이 사랑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잔인했다.

“당신 기억에, 내가 그만큼이나 당신과 영원토록 함께하고 싶었다고…… 그렇게 남고 싶어. 미안해.”

기어코 오벨리아의 입에서, 그녀가 마지막까지 숨겨 놓고 싶었던 속내가 흘러나갔다.

에크하르트의 뺨을 타고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오벨리아는 혹시 모를 죽음 이후에도 그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았다.

더없이 잔인한 선택이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지만 에크하르트는 끝끝내 그 선택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오벨리아를 사랑했고, 그리하여 자신을 향한 탐욕은 지나치게 달았으므로.

사랑은 본디 이성을 흐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조차도, 사랑 겨우 그 한마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

두 번째와 세 번째 황후 경연의 주제가 동시에 발표되었다.

두 번째 항목은 그 가문의 역사성과 명예.

그리고 마지막 주제는 제국의 빈민들을 위한 정책이었다.

그 조건들이 발표되는 순간, 모든 귀족이 알아차렸다.

마침내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 카테리안느를 자신의 황후로 정했다는 사실을!

카테리안느는 제국의 개국공신이었다.

그 어떤 가문도 역사성과 명예로 감히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라이너스는 세 번째 주제가 발표되자마자 제국의 빈민들을 구제할 수단으로 10년간 연 10억 골드를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단언컨대 그 어떤 정책도 결국 그 막대한 자본을 넘어서지는 못할 터였다.

누가 무슨 정책을 내놓든, 그 정책조차 자금이 있어야 실행이 가능할 테니까.

그리하여 지금까지 끌어온 것이 어이없게도, 아그네스는 단숨에 황후 자리에 낙점되었다.

“라이너스가 철광석 광산과 철도 사업으로 알렉산드로와 거래를 한 모양이네.”

오벨리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일이 자신의 뜻대로 풀렸음을 알아차렸다.

“아직 대금을 완벽하게 치르지도 않아놓고, 간도 크군.”

에크하르트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현재 라이너스가 황궁에서 외친 발언으로 인해 귀족 사회에는 카테리안느가 또 다른 철광석 광산을 매입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소문과 달리, 차명으로 된 오벨리아 소유의 철광석 광산은 아직까지 라이너스의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라이너스가 아직 광산 매입 비용의 70%밖에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이안 후작가와 알렉산드로 사이에 거래가 오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급했겠지.”

새로운 카테리안느 저택에서 아그네스의 환영 연회가 있던 날, 엘라사나가 무턱대고 알렉산드로를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 전에 로이안 후작이 이미 알렉산드로에게 자신이 딸을 황후로 만들어준다면 어떤 대가를 내놓을지 운을 띄워 놨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 교활한 알렉산드로가 엘라사나를 굳이 자신의 집무실까지 들여놓았을 리가 없으니까.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라이너스 또한 황급하게 아그네스를 황후의 자리에 앉도록 못 박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것이다.

“나머지 대금은 아그네스 카테리안느에게서 받을 건가?”

새로운 카테리안느 저택의 보안은 허술했고, 일리어스와 카테리안느 부인조차도 오벨리아의 편이었다.

덕분에 에크하르트는 현재 카테리안느가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그가 파악한 대로라면, 라이너스는 본디 광산 매입 비용의 65%밖에 지불 할 수 없었다.

그런데 5%를 더 투자할 수 있었던 것은 카테리안느의 이름까지 내걸고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쓴 결과였다.

즉, 라이너스에게는 더 이상 끌어올 수 있는 자금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 황후의 인장을 사용하게 만들 거야.”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이 순간을 위해, 두 사람이 아그네스를 황후의 자리에 오르도록 내버려 둔 것이니까.

“좋아, 그럼 라이너스 카테리안느에게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에크하르트가 제 그림자 기사를 불러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오벨리아의 차명을 가진 대리인이 새로운 카테리안느 저택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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