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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85화 (85/136)

85화. 더 높이(11)

늦은 밤의 새로운 카테리안느 저택.

그곳에서 오벨리아의 대리인, 기네스가 라이너스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철광석의 채굴을 당장 시작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리고 드물게, 이 손님은 감히 카테리안느 공작의 앞에서 다리를 꼬고 있었다.

라이너스는 그 모습이 못마땅했으나, 당장 아쉬운 것은 그였으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카테리안느 가에서는 광산의 매입 대금을 다 치르지 않으신 걸로 압니다만.”

광산에 손을 대려면 광산이 완벽히 카테리안느의 소유여야만 가능했다.

라이너스가 현재 아쉬운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로의 앞에서는 이미 모든 거래가 끝나 완벽히 광산을 손에 쥔 것처럼 뻗댔으나, 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아그네스를 황후의 자리에 올리기 위하여 알렉산드로에게 말을 모조리 꺼낸 뒤였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철광석을 채굴해 결과물을 알렉산드로에게 보여 줘야만 했다.

“그건 알고 있네만, 카테리안느 가를 믿고…….”

라이너스가 웃으며 얼렁뚱땅 넘어가려 들었다.

“물론, 카테리안느 공작가의 신용은 더없이 우수하지요.”

그러나 기네스는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가 상단이 먼저 투자하겠다고 했던 것도 제 신용이 깎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없던 일로 치고, 온전히 카테리안느 공작가에만 광산을 팔기로 한 게 아니겠습니까.”

본디 이 광산은 라이너스에게 찾아왔던 상단과 공동 투자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이너스가 따로 광산의 주인을 찾아내, 상단과 거래하기로 한 금액의 130%를 쳐주기로 하고 독점 계약을 따냈다.

카테리안느가 현재 운용할 수 있는 유동 자산이 적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라이너스가 값을 다 치르지 못한 이유였다.

광산의 값이 예상보다 훨씬 초과한 것이다.

그러나 기네스는 그 점 따위 고려해 주지 않았다.

기네스의 말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대금을 치르지 못하고 있는 라이너스에 대한 책망과 이미 한 번 상단과의 신뢰를 깼다는 불신, 그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광산을 카테리안느보다 비싸게 사 줄 이가 있을 것 같은가?”

기네스의 태도에 결국 라이너스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기네스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대꾸했다.

“글쎄요……. 전혀 없을 것 같진 않은데요. 예를 들어, 로이안 후작가라던가…….”

쾅!

“페리아스 남작!”

기네스의 말에 라이너스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매입 대금의 50%는 계약금이었다.

계약을 깰 경우 대금을 제대로 제때 지불하지 못한 카테리안느 측에 책임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카테리안느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날리게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기네스는 그 엄청난 돈을 공짜로 손에 쥐게 되는 것이고.

그 후, 카테리안느에게 제시한 가격보다 다른 귀족가에서 적게 받아 광산을 판매한다고 한들 기네스의 손해라 할 것은 전혀 없는 것이었다.

광산 매입 대금에서 약간의 부담만 줄여 준다면, 광산을 사려고 달려들 귀족들은 많았다.

특히나 그것이 이번에 카테리안느와 황실에게 제대로 물 먹은 로이안 후작가라면 더더욱.

그러니 기네스로서 아쉬울 게 무엇 있겠는가.

“물론, 저 또한 굳이 그렇게까지 하여 카테리안느와 척질 생각은 없습니다만…….”

기네스가 진정하라는 듯이 두 손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하며 웃었다.

라이너스는 열이 뻗칠 대로 뻗쳤으나, 씩씩거리며 애써 자리에 앉았다.

기네스가 라이너스에게 진정하라는 듯 손수 차를 따라주며 은근히 운을 띄웠다.

“카테리안느 공작님께서 그렇게 급하시다면, 한 가지 방법은 있을 것 같습니다.”

“방법?”

“이번에 귀댁의 영애께서 존귀한 자리에 오르신다지요.”

“아그네스?”

“예, 그분 말입니다. 저는 그분께서 저희의 거래에 도움을 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라이너스의 두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네스가 무슨 말을 꺼낼지 의심부터 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기네스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이 거래에서 약자는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광산 매입 대금 지불에 실패하실 경우…… 대금의 200%를 보상해 주시겠다는 내용의 보증서에 황후 폐하의 인장을 찍어 주십시오.”

기네스의 말은, 매입 대금의 2배를 순수한 피해 보상금으로 내놓으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즉, 이 계약이 무효가 될 경우 계약금의 절반과 합쳐 총대금의 250%를 지급해야 하게 생긴 것이었다.

“이보게!”

광산의 매입 대금부터가 천문학적일 텐데, 그것의 250%라니.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라이너스가 다시 흥분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진정하십시오, 공작님. 광산의 채굴에 들어가면, 저희로서는 카테리안느 공작님이 훗날 대금을 모두 치르지 않으셔도 대응할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기네스의 말도 틀린 바가 없었다.

제국법상 광산의 채굴은 그 주인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즉, 카테리안느 가에서 철광석을 캐내려면 광산을 기네스에게서 양도받아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 철광석을 모두 채굴한 시점에서 라이너스가 나 몰라라 해 버린다면?

그러면 기네스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셈이었다.

“단,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해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가 되면 카테리안느에서도 철도 사업으로 상당한 수입을 올리셨을 테니, 나머지 잔금을 지급해 주시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겠죠.”

라이너스가 침음했다.

기네스의 조건은 후한 편이었다.

기네스의 말대로, 그 정도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돈을 갚지 못할 것도 없었으니 보상금을 지불할 일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라이너스는 한 편으로,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에게 황후의 인장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게 해 줄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혹시, 황후 폐하께는 그런 권한이 없는 것인지요? 그런 거라면…….”

그러나 기네스가 다음 말을 꺼내는 순간, 라이너스는 황급히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아무리 알렉산드로가 원하는 것이 제 말만 따를 허수아비 같은 황후라고 할지라도, 외부에 그런 사실을 들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라이너스는 아그네스를 허수아비 황후로 만들 생각도 없었고.

그런 판국에 초장부터 아그네스가 실권이 없다는 식으로 알려져서는 매우 곤란했다.

“좋아, 황후의 인장을 찍은 보증서를 가져다주지. 그것이면 충분하겠나?”

결국 라이너스는 짐짓 오만한 척 고개를 치켜든 채 기네스의 제안을 승낙했다.

“예.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테리안느 공작님.”

기네스가 그제야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거래의 성립이었다.

***

아그네스의 황후 취임식이 3일 남은 시점, 오벨리아는 이번에 아그네스의 드레스를 맡게 된 마담 파르모아의 의상실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오늘 영업은 이미 끝났…… 아니, 대공비 전하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로 방문하셨나요?”

의상실의 문을 닫으려던 파르모아가 앞문도 아니고, 직원들만이 아는 뒷문으로 불쑥 나타난 오벨리아를 보며 놀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담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소파 상석에 앉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번에 황후의 즉위식 드레스를 그대가 만든다지.”

“예, 그렇습니다만…….”

오벨리아의 말에 파르모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 파르모아의 의상실이 이번에 황후의 의상을 맡게 된 사실은 이미 사교계에 널리 퍼져있는 것이었다.

“그 드레스의 디자인, 가져와 봐.”

오벨리아가 마담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파르모아가 대번에 펄쩍 뛰며 거부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날의 연회에서 누가 무슨 드레스를 입을 것인지, 그것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다.

그렇기에 연회 당일까지 해당 가문의 귀부인이나 영애가 무슨 드레스를 입을지 철저히 입단속 하는 것이 의상실의 의무였다.

만약, 파르모아가 황후의 개인 드레스 디자인을 연회 전에 유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마담의 의상실은 큰 타격을 받을 터였다.

“마담, 본래는 아그네스의 드레스를 맡지 않으려고 했다지. 그런데 돌연 마음을 바꾸었다고 들었어.”

그러나 파르모아의 단호한 거절에도, 오벨리아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건 또 어떻게…….”

마담이 말끝을 흐렸다.

파르모아는 본디 오벨리아의 말대로 아그네스의 드레스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비였던 오벨리아가 황후 즉위식 때 입을 드레스를 만들었던 것이 파르모아였기 때문이다.

그런 판에 파르모아가 오벨리아를 배신하고 그녀의 남편과 내연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그네스의 드레스 또한 만든다고 하면, 돈에 눈이 멀어 최소한의 명예와 수치도 모르는 장사치라고 수군거릴 것이 빤했다.

의상실은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였다.

그런데 그런 소문이 난다면, 상당히 의상실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도박 빚을 급하게 갚아야만 했던가?”

파르모아는 이제 더는 놀라움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담이 의상실에 치명적인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드레스를 맡기겠다는 아그네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그것은 파르모아의 아들이 갑자기 도박장에서 엄청난 빚을 졌고,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담의 아들이 갑자기 어떻게 도박장을 알고 거기에 간 건지, 그리고 아들이 간 도박장이 누가 운영하는 것인지 알고 일을 맡았나?”

파르모아가 움찔했다.

그러고 보면 제국에서 도박은 불법이었고, 그로 인해 도박장은 모조리 음지에나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마담의 평범한 아들이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갔는지 의문이었다.

“테네이스 이멜리언, 혹시 그 이름을 들어봤는지 모르겠군.”

그제야 의구심을 가득 품고 혼란스러워하는 파르모아에게 오벨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 이름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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