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더 높이(12)
테네이스 이멜리언.
그는 이멜리언 가의 후계자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그네스의 양오빠였던 사람이다.
테네이스 또한 수도의 귀족이니 파르모아가 모를 리 없었다.
파르모아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대의 아들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그대의 아들을 도박장으로 안내한 스티븐은 테네이스의 오랜 수족이야.”
오벨리아가 알아본 결과, 테네이스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수족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속내가 너무 빤했다.
알아 봤자 파르모아 같은 평민이 어쩌겠느냐는 심보와 함께, 설령 문제가 된들 아그네스의 명령이었으니 그녀가 제 뒤를 봐주리라는 생각이었을 터다.
“그리고…….”
오벨리아가 뒤의 기사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기사가 에크하르트에게서 받아 온 서류를 그녀에게 건넸다.
오벨리아가 그것을 파르모아에게 건넸다.
도박장의 소유주가 누구인지 적혀 있는 서류였다.
“테네이스 이멜리언…….”
서류를 확인한 파르모아가 이를 악물었다.
파르모아의 아들이 도박 빚을 지게 된 경위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드레스를 맡게 하려는 아그네스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아그네스의 드레스를 만드는 일은 파르모아에게 손해였지만, 아그네스에게는 마치 그녀가 오벨리아와 동등한 위치로 수도의 잘나가는 의상실 마담조차 인정한 것으로 보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건가?”
“그렇지만…… 저희 같은 평민이 황실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벨리아의 질문에 파르모아가 어두운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마담의 말대로, 테네이스의 오만대로, 사실 평민이 귀족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일단 그것으로 그대 아들의 도박 빚을 갚아.”
오벨리아가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파르모아의 아들이 진 도박 빚에 이자까지 합산한 금액이 정확히 들어 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금액.
그것이 에크하르트가 가져온 정보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 후의 일은 힐켄테데에서 모두 알아서 처리해 주지. 물론, 마담과 마담의 가족, 그리고 의상실을 보호하는 것까지 모두 다.”
“……감히 묻습니다. 제게 선택지가 있습니까?”
감히. 그 말이 옳았다.
파르모아는 신분적으로 오벨리아에게 질문을 건넬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그 어떤 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파르모아는 자신이 사람을 보는 눈이 옳았음에 안도했다.
오벨리아는 파르모아를 평민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그대가 내 뜻을 따르지 않길 원한다면, 강요하지 않겠네.”
그리하여 오벨리아는 파르모아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파르모아가 자신의 말을 거부한다고 하여 큰 타격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무 연관 없는 파르모아를 겁박하고 싶지 않았다.
“……우선, 제게 선택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오벨리아의 뜻을 알아차린 파르모아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건방진 행동일지도 몰랐으나, 이쪽저쪽에서 모두 이용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결정을 내린 파르모아가 물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했다.
받은 게 있으면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법이었다.
***
이멜리언 가문에서 운영하는 비공식적인 도박장.
그런 곳은 대부분 모두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 또한 검은 후드와 가면을 쓴 채로 도박장에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수하를 시켜 구해 온, 도박장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입장권이 들려 있었다.
돈 많은 자들이 도박장에서도 2층의 개인적인 룸을 사용하는 등 특별한 대우를 받고자 구입하는 것이었다.
특별 손님을 위한 입장권을 들고 온 덕인지, 에크하르트는 곧바로 1층이 아니라 룸이 존재하는 2층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2층은 테네이스가 직접 관리하고 있다더니, 수하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대로 에크하르트는 곧바로 올라가자마자 테네이스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 뵙는 분 같군요?”
테네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벨리아가 황태자비였던 시절 도박장을 만들었다면, 카테리안느 공작에게든 그녀에게든 걸렸을 터였다.
그렇기에 이멜리언 가의 도박장은 오벨리아가 죽었다고 알려진 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테네이스는 대부분의 손님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에크하르트의 체격이나 키가 예사 사람과는 확연히 달랐으니, 특히나 그가 원래 도박장에 다니던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아보기가 더욱 쉬웠다.
“내게 돈을 빌린 자가 도박 빚을 져서 갚을 돈이 없다며, 이걸 대신 주더군.”
입장권에는 로이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로이드는 물론 에크하르트가 보낸 수하의 가짜 이름이었고, 그 수하는 며칠 전 일부러 이곳에서 엄청난 돈을 잃었었다.
입장권 자체가 황금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고파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또, 이런 식으로 손님이 늘기도 하기 때문에 도박장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입장권을 양도받아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도박에 대하여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곳은 처음이라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군.”
에크하르트는 일부러 도박장을 둘러보며 이곳이 낯선 티를 팍팍 냈다.
테네이스가 두 눈을 번뜩였다.
테네이스가 보기에, 에크하르트 같은 손님들이야말로 도박장의 돈을 확확 불려 줄 상대였다.
“그럼 우선,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게임 방법도 딜러가 차분히 알려 드릴 겁니다.”
테네이스는 에크하르트에게 신뢰감을 주려는 듯 일부러 더욱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에크하르트는 그에 넘어간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지.”
“이리로 오시지요.”
테네이스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에크하르트를 안내했다.
***
황후 즉위식 당일이 되었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일부러 일찍 출발하여 황궁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일단은 수도의 귀족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아그네스의 황후 즉위식이 진행된 후, 황제와 황후가 함께 마차에 올라 수도 행진을 할 예정이었다.
“세상에, 힐켄테데 대공 전하와 대공비 전하의 옷차림 좀 보세요.”
그러나 귀족들은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가 등장하기도 전에,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모습에 정신이 팔렸다.
오늘은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의 결혼식도 겸하는 자리였기에 하얀색 제외하고 귀족들은 모두 형형색색으로 입고 있었다.
그런데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장례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새까만 드레스에 새까만 연미복을 입고 온 것이다.
물론, 놀라운 일은 더 있었다.
“저거…… 금사 아닙니까?”
“이 사람아, 잘 봐! 저게 어딜 봐서 금사야.”
“어머나…… 저게 모두 옐로우 다이아몬드에요?”
그로 인해 대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금사 대신에, 실처럼 아주 작게 세공한 옐로우 다이아몬드가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옷에 촘촘히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귀중한 옐로우 다이아몬드를 저토록 작게 쪼게, 세밀하게 세공한 것과 빼곡히 옷에 박아 넣은 것.
그 모두가 장인들과 그에 걸맞은 돈을 갈아 넣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그것을 황후 즉위식에서 입고 나타난 탓이었다.
언뜻 보면 황족을 뜻하는 금사가 수놓인 듯한 옷을 장례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새까만 색으로 입고 등장하다니!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를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것과 동시에, 금사가 아니기에 트집 잡을 수는 없으나 황권에 대놓고 도전하는 일이었다.
연회장 내의 모두가 오늘, 대단한 폭풍이 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직감은 실제로 일어날 일을 절반도 예상하지 못한 것에 불과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와 제국의 달, 황후 폐하 드십니다!”
진짜 희극은 시종의 외침 이후,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가 등장하면서 시작이었으니까.
“……세상에!”
누군가 처음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등장했을 때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진부하지만, 이 상황을 표현할 말이 그것뿐이었다.
“황후 폐하와 대공비 전하의 드레스가…….”
“색만 다르고, 디자인은 똑같군요?”
풉,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그 넓은 연회장 안에 유독 크게 들렸다.
알렉산드로야 새하얀 황제의 정복을 입었기 때문에 에크하르트가 똑같이 입을 수 없었으나, 황후의 옷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일부러 파르모아에게서 아그네스의 드레스 디자인을 빼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똑같다니요. 보면 모르세요?”
누군가 빈정거렸다.
멸시의 눈빛은 아그네스를 향해 있었다.
오벨리아의 드레스를 이루는 천은 힐켄테데 성이 아니라 대공가의 비밀 보고에 따로 보관해 둔 것이었는데, 검은색임에도 불구하고 빛에 비출 때마다 신기하게도 푸른빛의 광택이 은은히 돌았다.
거기에 진주를 갈아 가루를 입혀 반짝임까지 더해져 천 자체만으로도 드레스는 충분히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데 금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옐로우 다이아몬드를 그토록 빼곡하게 박아 넣기까지 했다.
사실상 아그네스의 드레스도 매우 화려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의 것과 비교하여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연회장 내의 모든 귀족이 오벨리아와 아그네스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으니, 아그네스라고 하여 이 사태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아직 연회장의 문가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로,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는 전혀 예기치 않은 사태에 굳어 버렸다.
“이…… 이……!”
그리고 곧, 아그네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그녀가 분노에 찬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하도 열 받은 탓인지, 아그네스의 입에서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그네스!”
그리고 알렉산드로가 사태를 수습하기도 전에, 아그네스가 끼고 있던 팔짱을 홱 풀어 버리고 단번에 성큼성큼 오벨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철썩!
요란한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