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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87화 (87/136)

87화. 불청객(1)

“에크하르트!”

책을 잡기 위해서라도, 아그네스에게 한 대쯤은 일부러 맞아 줄 생각이었던 오벨리아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앞을 막아서며 대신 아그네스에게 맞았기 때문이다.

“손버릇이 나쁘시군요, 황후 폐하.”

에크하르트가 서늘한 얼굴로 아그네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장에서 아그네스의 행동을 막거나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일부러 맞아 준 것이었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행동은 어떤 이유를 콕 집어 황실이 벌을 내리기 어려웠다.

막말로, 대공과 대공비가 황실을 엿 먹이려 했다는 것으로 힐켄테데에 벌을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두 사람을 벌하는 순간, 황실이 얼마나 허술하게 정보를 관리하는지를 인정하는 셈이 되어 버릴 터였다.

그러니 알렉산드로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사태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그네스의 행동은 달랐다.

그녀의 행동은 명백히 이유를 들 수 있는 잘못이었다.

“이 일은 추후에 귀족원을 통해 정식으로 황실에 항의할 겁니다.”

에크하르트가 알렉산드로를 보며 말했다.

아그네스를 무시함과 동시에, 황제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그네스의 손톱이 길었던 탓에, 에크하르트의 뺨에 붉은 실선이 생겨났다.

오벨리아가 다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에크하르트의 뺨을 감쌌다.

상처를 한창 살피던 오벨리아는 휙, 사나운 눈으로 아그네스를 돌아봤다.

“제 남편이 신사인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 할 겁니다, 황후 폐하.”

자신이 맞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괜찮았으나, 정작 에크하르트가 이런 꼴을 당하자 오벨리아는 화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아그네스의 뺨을 내리치고 싶었으나, 그녀는 아그네스처럼 이런 자리에서 그런 행동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무례하다, 대공비.”

당황스러운 상황에 굳어 있던 알렉산드로가 세 사람에게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잠시 후 황후로 공표될 몸이었다.

알렉산드로가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먼저 무례하게 군 게 누구신지 잊으신 모양이군요.”

알렉산드로가 나서자,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보호하듯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그녀는 괜찮다고 에크하르트에게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서며 그와 팔짱을 꼈다.

그것을 본 알렉산드로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심지어 상대와 가까이 있는 것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알렉산드로의 속에서 그도 모를 무언가가 치밀었다.

“지금 감히, 황후더러 무례하다는 것인가? 힐켄테데 대공.”

알렉산드로가 신경질적인 어투로 에크하르트에게 압박을 가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딴 압박이 에크하르트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면 뭐라고 표현해 드려야 할지, 저는 감히 모르겠군요. 단어 선택은 귀족원에서 알아서 하겠지요.”

알렉산드로가 이를 아득 갈았다.

에크하르트는 알렉산드로의 말을 은유적으로 비웃고 있었다.

황실이 절대자라도 되는 척 ‘감히’라는 단어로 표현했으나, 실상 당장은 귀족원부터 상대해야 하는 처지라는 것이다.

그때, 재상이 다가와서 난감한 얼굴로 알렉산드로에게 속닥였다.

“전하, 연회가 계속 지체되고 있습니다…….”

순간 황후의 즉위식은 시작도 못했다는 것을 인지한 알렉산드로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아그네스가 참지 못하고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를 건드림으로써 연회의 주도권은 개최자인 황실도, 주인공인 아그네스도 아닌 힐켄테데 부부에게 넘어가 있었다.

“오늘의 무례는 나중에 묻도록 하지.”

알렉산드로가 빠르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를 앞으로 보내 줄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에크하르트가 누군가에게 눈짓했다.

그 순간, 어떤 남루한 차림의 귀족 하나가 테네이스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테네이스……!”

그 귀족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헉!”

“으아악!”

“아악!”

귀족들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로 흩어지며 도망쳤다.

쨍그랑, 챙강!

와인 잔 같은 유리와 도자기 그릇들이 여기저기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와장창- 쿵!

귀족 중 하나가 뛰다가 잘못 건드린 것인지,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의 다정한 모습을 본떠서 만든 얼음 조각상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것이 부딪히며 굉음이 울린 순간, 에크하르트가 단검을 들고 달려든 자의 팔을 낚아채 돌려 꺾으며 그 귀족을 제압했다.

“허억…… 헉…… 미…… 미친…… 경……경비병! 황실 기사단은 뭘 하는 거야!”

단검이 코앞까지 닿았던 테네이스가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고 식사류와 디저트, 술, 음료 등 구분할 수 없이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내린 바닥은 발자국과 짓밟혀 뭉개진 음식들로 그야말로 쓰레기장이 따로 없었다.

기껏 깔아놓은 레드 카펫은 본래의 붉은색을 찾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 비현실적으로 순식간에 엉망이 된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던 알렉산드로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게 물들이며 소리 질렀다.

“……캐트샤 경! 당장 저자를 포박해라!”

알렉산드로의 손가락이 에크하르트의 손에 붙잡힌 귀족을 향해 있었다.

***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황후 즉위식을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불가했다.

연회는 돌이킬 수 없이 엉망이 되어 그대로 끝이 나 버렸다.

황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잡아들인 귀족을 뒤로하고 우선은 예정된 수도 행진을 앞당겼다.

물론, 아그네스는 급하게 드레스를 갈아입어야만 했다.

무려 황후가 대공비보다도 못한 옷을 계속해서 입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애써 고심하여 준비한 의관이 무용지물이 되어 이를 아득바득 갈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나보고 겨우 이런 걸 입으라는 거야?!”

그러나 시녀들이 무슨 드레스를 가져오든, 아그네스의 마음에 들 턱이 없었다.

황후 즉위식을 위하여 특별히 만든 옷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그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어떻게 구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아그네스의 패악을 견뎌야만 하는 것은 결국 시녀들이었다.

“……그래, 황실의 보고! 보고를 열어!”

아그네스가 번뜩 생각이 난 듯 말했다.

황실의 보고라면 평범한 드레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엄청난 것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오벨리아의 드레스를 두고 수군거리던 소리를 생각해 보아라.

그녀의 옷을 이룬 천 또한 힐켄테데 대공가 보고에 있던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네 마음대로 감히 어디를 열어!”

하지만 아그네스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방을 찾아온 알렉산드로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오벨리아가 입고 온 걸 못 봤어?!”

그렇지만 아그네스도 지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오벨리아의 드레스를 본 순간부터, 반쯤은 이성이 나간 상태였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 또다시 그보다 초라한 드레스를 나보고 어떻게 입고 나가라는……!”

쨍그랑! 쿵!

“작작 좀 해!”

그런 아그네스의 히스테릭한 외침을 알렉산드로가 끊어냈다.

그가 옆 장식장 위의 화분과 장식품들을 단번에 팔로 쓸어 버린 탓에 요란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네가 오늘 벌인 짓으로 본 손해가 얼마인지 알아?! 당장 내일부터 귀족원에서 고소장이 들어올 거란 말이다!”

알렉산드로가 씩씩거리며 날뛰었다.

귀족들은 늘 저들끼리 싸우는 것 같아 보여도, 결국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 대립이 생기면 그네들의 편이었다.

심지어 대공은 현 귀족 중에 가장 지위가 높은 자였다.

그런 자가 무시당하고 황후에게 뺨을 얻어맞아도 가만히 있는다면, 추후 얼마든지 그 아래 귀족들도 그와 같은 일을 당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니 귀족원은 귀족들 전체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조금 전 연회에서 있던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황후 즉위식을 치르기도 전에 일을 벌여서 어쩌자는 거야!”

더불어 더 문제인 것이 있었다.

아그네스가 입장 시에 황후라는 호칭으로 불렸다고 해서 그녀가 이미 황후인 것은 아니었다.

아그네스가 정확히 황후가 되는 시점은 어디까지나 수도를 행진한 후, 수도의 대신전에서 교황 혹은 그 대리인 추기경에게 황후의 관을 하사받은 뒤였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아직 황후도 아닌 자가 무려 대공의 뺨을 친 것이다!

아그네스를 황후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게 아니라면, 그녀가 황후가 되는 이상 이 책임은 황실에서 져야만 했다.

즉, 즉위 전이었으니 황후가 아닌 황제의 정부로서 경거망동한 아그네스의 행동까지도 모두 황실에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힐켄테데 대공의 뺨을 내리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북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귀족원과 북부.

그 모두를 조용히 시키려면 대체 어떤 보상을 해야 할지, 알렉산드로는 벌써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다들 나는 이미 황후라고 불리고 있었잖아!”

아그네스가 억울한 듯 외쳤다.

물론, 약간은 억울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평소 같았다면 황후의 관을 하사받았든 아니든, 이미 아그네스가 황후로 공표된 시점에서 모두 그녀를 황후로 인정해 주었을 테니까.

“그거야 예우를 해 준 거지! 귀족원에서 이런 상황에 그런 참작을 해 줄 거 같아?! 분명 황후 즉위 전이라는 것을 들먹이고 나올 건데!”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에게 한심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힐켄테데의 결혼식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망신당한 것이나, 끊임없이 굳이 사교계를 비집고 나가 오벨리아에게 지고 다니는 것이나, 오늘 한 짓이나 모두 한심하고 행동에 신중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그네스도 그런 눈길을 느꼈는지 표정을 굳혔다.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시선이 오갔다.

“선황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때, 밖에서 시종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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