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불청객(2)
선황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그네스를 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실리와 혈통을 따지는 선황이었다.
애초에 그런 그의 눈에 아그네스가 탐탁할 리 없었다.
왜냐하면 아그네스를 황후로 들이는 것보다, 황비로 들여 얻을 이득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선황이 생각하기에, 어차피 알렉산드로의 아이를 가진 이상 아그네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카테리안느에 입적하여 명성은 얻었다지만, 결국 아그네스의 혈통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황비 정도로 들이고, 황후는 따로 들여 다른 귀족 가문과도 결속을 다지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그러면 혈통까지 겸비한 후계를 낳을 수도 있을 테고.
물론 라이너스가 철광석 사업의 수익 일부를 황실에서 벌이는 철도 사업에 투자하기로 함으로써 일단락된 일이지만, 선황은 여전히 아그네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런 선황이 대뜸 아그네스의 방을 찾아온 것이다.
“선황 폐하를 뵙습니다.”
문이 열리고 선황이 들어오자, 알렉산드로가 눈치를 보며 허리를 숙였다.
제 아버지가 왜 아그네스의 방까지 왔는지 의아했다.
“선황 폐하를 뵙습니다.”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를 따라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선황은 그나마 제 아들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일 뿐, 아그네스는 그저 스쳐 지나가며 소파의 상석에 앉았다.
“인사는 됐다. 그보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밖까지 들리더구나.”
선황의 묵직한 시선이 알렉산드로를 지긋이 쳐다봤다.
마치 아그네스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태도였다.
그 행동에 그녀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굴었던 아그네스조차도 선황의 앞에서 막 나갈 수는 없었다.
선황이 아직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큰일은 아니고…….”
알렉산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쾅!
선황의 손이 소파의 손잡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가 서늘한 낯빛을 하고 알렉산드로를 응시했다.
“수도의 귀족들 앞에서 황실이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별일이 아니다?”
선황은 침착한 낯빛이었으나, 알렉산드로는 그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그 무거운 걸음을 여기까지 옮길 리가 없는 터였다.
“그러니까 내가 황후가 될 이는 신중하게 잘 골라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선황이 그제야 아그네스를 쳐다봤다.
“어디서 저런 걸 들여서는.”
선황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더없이 한심하고 하찮은 것을 보는 눈이었다.
마치, 아그네스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었으며 이런 사고를 친 것이 놀랍지도 않은 듯이.
그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모멸감이 아그네스를 사로잡았다.
그녀가 알렉산드로를 쳐다봤으나, 그는 아그네스를 대신하여 화내 주지 않았다.
도리어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와 시선이 마주치자, 또다시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입 모양으로 속닥거릴 뿐이었다.
그 순간, 아그네스는 이를 악물었다.
역시 권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보라, 이곳에서 유일하게 선황의 행동에 맞설 수 있는 알렉산드로는 제가 손해 보기 싫어 결코 그녀를 비호할 생각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스스로의 손에 쥐어져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그 효용 가치가 있는.
‘네 인장이 필요해, 아그네스. 대신…… 사업에 성공하면 네게 20%의 이익을 떼어 줄게.’
그러니까 아그네스가 그 찰나에 라이너스의 말을 떠올린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황후의 인장으로 그런 짓을 하는 걸 알렉산드로가 허용할 리 없다며 날뛰는 아그네스에게 라이너스는 거래를 제시했다.
철광석 사업이 성공하면 라이너스가 황실에 투자하기로 한 수익금이 15%였다.
아그네스에게는 그보다 5%나 더 많은 20%를 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엄청난 돈은 분명 그녀에게 권력을 가져다줄 터였다.
그래서 이 순간, 아그네스는 황후의 이름으로 철광석 사업에 투자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록 그녀가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낌새를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너.”
선황이 아그네스를 검지로 가리켰다.
짐짓 홀로 뜨끔한 그녀가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멜리언 가에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던데.”
그러나 선황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그네스의 속내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오늘 테네이스 이멜리언에게 달려든 그 남작, 이멜리언 가가 운영하는 도박장에서 전 재산을 잃은 자더군.”
“……도박장, 말씀이십니까?”
알렉산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선황의 말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의 등이 모두 긴장으로 굳었다.
선황이 이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그 정보력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어딜 어설프게 모르는 척이냐.”
선황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네놈이 전대 카테리안느 공작을 죽이고 오벨리아를 끌어 내리기 위한 수작을 벌이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거기서 끌어다 썼음을 내가 모를 것 같으냐?”
오벨리아가 황태자비로 있을 적, 궁내의 살림은 그녀가 모두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러니 오벨리아 몰래 황실의 돈을 움직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때, 알렉산드로는 이멜리언 가와 손을 잡고 불법 도박장을 열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감히 생각하지 마라.”
알렉사드로의 물음에 선황이 나직이 경고했다.
그것은 선황이 앞으로도 권력을 손에 놓을 생각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으나, 속내를 애써 다스렸다.
기껏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선황이 권력을 놓질 않고 있으니 알렉산드로가 할 수 있는 게 지나치게 없었다.
알렉산드로는 늘 그게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지금은 그 마음을 드러낼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오벨리아도 이멜리언 가의 비밀을 알고 있을 거다.”
“그런……!”
아그네스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아그네스가 카테리안느로 적을 옮기기는 했지만, 이멜리언은 여전히 그녀의 우방이었다.
라이너스가 자신을 진짜 동생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아그네스도 알았다.
솔직히 카테리안느 가가 다시 제대로 자리 잡는다면, 라이너스에게 아그네스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멜리언 가는 달랐다.
그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어 했고, 그를 위해 아그네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설령 높이 오른다고 할지라도 엄연히 카테리안느처럼은 될 수 없으니 계속해서 아그네스를 버릴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아그네스의 입장에서는 이멜리언만큼 든든한 제 편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그녀에게 자신만의 권력이 없을 때는 더더욱 더.
“어딜 감히 끼어들어!”
그러나 선황에게서 곧바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는 아그네스가 입을 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아그네스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으나, 선황은 또다시 그조차 무시한 채 알렉산드로에게 말했다.
“오벨리아가 알았으니, 마담 파르모아를 설득하여 황후의 즉위식 드레스와 똑같은 걸 만들게 한 것이겠지. 그러니까 왜 굳이 그 마담 하나 부려 먹겠다고 일을 만들어서는…….”
선황이 못마땅한 티를 팍팍 내며 혀를 끌끌 찼다.
정말이지 그는 자신이 아그네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선황이 오벨리아에게 얼마나 다정한 시아버지였던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개 영애였으나, 오벨리아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선황을 만났던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때는 당연하게도 선황이 이런 사람일 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자신이 오벨리아가 아니라고 태도가 전혀 달라진 것을 보니 아그네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멜리언 가를 버려라.”
그리고 그 순간, 선황이 아그네스에게는 더없이 충격적인 명령을 내렸다.
“말도 안 돼요!”
아그네스가 곧바로 반발했다.
쨍그랑!
그 순간, 선황이 테이블 위의 찻잔을 아그네스를 향해 집어 던졌다.
“아악!”
아그네스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행히도 찻잔은 그녀를 비껴가 벽에 맞고 부서졌다.
“선황 폐하!”
알렉산드로도 이번만큼은 놀라 아그네스를 보호하듯이 그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그래도 알렉산드로의 아이를 가진 여자가 아니던가!
그러나 선황은 노기를 거두지 않았다.
“아까부터 감히……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선황이 고압적으로 아그네스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갑자기 당한 일에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아그네스가 입을 완전히 다문 것을 확인한 선황이 그제야 알렉산드로를 돌아봤다.
“황후 즉위식을 망친 게 오벨리아다. 그런 오벨리아가 행진이라고 가만히 둘 성싶으냐?”
이미 망쳐 버린 연회와 황후 즉위식은 다시 할 수도 없었다.
그래 봤자 비웃음만 살 테니까.
이제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는 행진만이라도 완벽히 해내야만 했다.
“오벨리아는 분명 이멜리언 가를 공격할 거다. 아마도 행진까지 망쳐 버리기 위해, 행진하는 길 한복판에서 그럴 확률이 높지.”
오벨리아가 선황에 대해 잘 알듯이, 선황 또한 오벨리아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있었다.
둘 다 정치에는 도가 튼 인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황은 알렉산드로에게 경고하러 온 것이었다.
“그러니 네가 그 전에 이멜리언을 버려야 해!”
그래야만, 오벨리아의 계획을 허사로 만들고 이 이상 황실의 체면이 상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기는 기회라 하지 않던가.
“극적일수록 좋다. 처절하게 버릴수록 좋아.”
선황이 말을 덧붙였다.
“길거리 무지한 것들의 눈에는 상황이 극적일수록 좋으니까.
선황은 이것을 기회 삼아, 상해 버린 황실의 위신을 다시 세울 참이었다.
그리하여 선황은 알렉산드로에게 오벨리아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 방법을 차분히 일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