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89화 (89/136)

89화. 불청객(3)

선황의 뜻에 따라, 아그네스는 황실의 보고에 든 보물 같은 드레스는커녕 수수하기 그지없는 옷을 입게 되었다.

백성들에게 오벨리아와 다른 면으로 어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벨리아는 애초부터 카테리안느 영애로 태어났다.

그렇게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온 그녀가 백성들을 위한답시고 수수하게 굴어봤자 그것을 누가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도리어 안목이 없어서 그렇다며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아그네스는 달랐다.

그녀는 카테리안느에 입양된 사람이었고, 백성들은 아그네스에 대해 잘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암암리에 퍼진, 아그네스가 황제의 정부라는 사실뿐이었다.

자애롭다고 칭송받던 황태자비가 죽자마자 황제의 옆자리를 차지한 여자.

그렇게 생각되면 백성들에게 거부감을 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만약에 아그네스가 황제와 우연히 만난,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하고 소박하며 가여운 사연을 가진 이라면?

동시에, 황실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오로지 황제의 사랑이었다면?

위대한 사랑으로 인한 엄청난 신분 상승.

그 얼마나 대중이 열광하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전형이던가.

비록, 사실 알고 보면 신데렐라는 본디부터 귀족 태생이었지만.

“이게 뭐야…….”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아그네스는 불만에 차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봤던 오벨리아의 황태자비 즉위식을 기억했다.

그때의 드레스가 지금의 자신이 입은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만 같았다.

당연히 그보다 더욱 화려한 즉위식이 될 줄 알았는데, 황후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뭐란 말인가!

“웃어. 다들 보고 있잖아.”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에게 웃기를 강요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다시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아그네스는 재차 깨달았다.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가 아닌 자신을 택한 이유는 오벨리아보다 그녀가 더 다루기 쉬워서라는 걸.

“……웃어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아그네스의 드레스와 달리, 화려하고 높은 마차 아래로 많은 사람이 알렉산드로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래, 아그네스는 이제 황후였다.

그녀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던, 어쨌든 대중의 앞에서는 완벽한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황후.

아그네스의 두 눈이 순간 번뜩였다.

황후.

이 자리는 그녀가 가질 무수한 권력을 향한 시작점일 뿐이었다.

***

아그네스가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온 순간,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직 아그네스가 황제의 정부에 불과하던 시절에 북부, 그것도 남의 결혼식에서조차 화려한 옷을 추구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아그네스가 자신이 가장 돋보일 수 있는 자리에서 수수함을 고집하다니.

누가 봐도 그녀의 뜻이 아닐 것임이 자명했다.

“선황이 끼어든 모양이군.”

에크하르트가 제 그림자 기사를 황궁으로 보내며 오벨리아에게 속닥였다.

이미 황궁에 힐켄테데의 첩자가 있음에도, 그 첩자로부터 그에게 전해진 말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 첩자도 모르게 일을 진행했거나, 이 첩자를 걸러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에크하르트가 지금까지 봐 온 바에 의하면, 알렉사드로나 아그네스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황실의 위신이 매번 상하고 있으니 더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으리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잖아.”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알렉산드로를 믿지 못해 그녀에게 힐켄테데의 일을 처리시키고, 심지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 지금까지도 권력을 놓지 않고 있는 선황이었다.

그런 선황이 황실의 권위가 계속해서 실추당하는 것을 마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래. 어차피 선황이 끼어들어도 상관없으니까.”

에크하르트 또한 오벨리아의 말에 맞장구쳤다.

선황이 판을 어그러트려 놓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미 그에 대한 대비도 완벽히 해 둔 터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미 세워 두었던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저희의 억울함을 헤아려 주시옵소서!”

많은 사람이 황제와 황후의 행진 행렬을 지켜보는 가운데 문득 어떤 여자가 나타나 마차 앞을 막아섰다.

히이이잉!

말이 놀라 앞발을 치켜들고 뒷걸음질 쳤다.

다행히도 마차 앞에서 기사들이 말을 끌고 있었기 때문에,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의도대로 그 여자가 다치는 법은 없었다.

“무엄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이리스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그러나 여자는 오히려 땅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비켜서지 않았다.

“폐하!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 폐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저희는 죽습니다!”

그러자 아이리스가 여자에게 칼을 겨누었다.

황실 부기사단장으로서는 감히 황제와 황후의 마차를 막아섰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비쩍 마른데다가 거적때기 같은 옷만 걸쳤을 뿐인지라 어디에 무기를 숨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이에게 황제의 기사가 검을 겨누자 백성들이 술렁였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 여자의 옆에서 함께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테네이스 이멜리언 백작 영식께서는 평민들의 고혈을 착취하고 계십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나오자 점차 그들의 옆으로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황제 폐하! 테네이스 이멜리언 배각 영식께서는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 테네이스 이멜리언 백작 영식께서는 도박 빚을 진 평민들에게 강제로 고리대로 돈을 빌리게 하고 갚지 못하면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 제 아들을 구해 주십시오! 고리대를 갚지 못했다는 이유로 얼마 전에 외국에 노예로 팔려가 버렸습니다!”

“황제 폐하, 제 여식도 제발 구해 주세요! 고리대를 갚지 못했다며 납치당하다시피 끌려갔는데 생사를 알 수조차 없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하나, 둘 쌓일수록 테네이스가 저지른 불법 행위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도박장, 고리대 모두 불법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의 미간이 확 찌푸려진 것은 노예 이야기가 거론되었을 때였다.

단언컨대 그것은 그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노예상은 이미 100여 년 전부터 론체스터 제국에서 엄격하게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중죄 중의 중죄였던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제국민을 외국으로 빼돌려 노예로 팔아 버렸다니.

당장 사형을 면치 못할 무거운 죄였다.

“이…… 이것들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황제 폐하!”

황제와 황후의 행진은 귀족들 또한 함께 지켜보거나, 그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테네이스는 행렬을 따르던 이 중 하나였는데, 그가 불쑥 튀어나와 사람들의 증언을 부정했다.

테네이스는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 읍소하듯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저는 저들이 말하는 것 중 그 무엇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황후 폐하의 양오빠인 저와 황후 폐하를 모함하려는 음모입니다!”

그 와중에 테네이스는 자신이 살겠다고 아그네스를 끌어들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이제야 권력의 시작에 닿았는데 감히 자신을 여기서 끌어내리려 하는 것 아닌가!

아그네스는 이를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백성들 또한 테네이스의 변명을 믿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당장 뛰쳐나와 증언하는 모든 이는 이 거리 백성들의 이웃이요, 친구이고 가족이었다.

그런 자들이 열 손가락을 넘겼으니 테네이스가 아무리 변명한다고 한들, 백성들이 누구의 편일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아그네스가 마차에서 내렸다.

자신을 향한 선황의 태도나 행동은 아니꼬웠지만, 그녀도 선황의 충고가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네이스 오빠.”

아그네스가 두 눈을 내리깐 채로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무릎을 굽혀 테네이스의 두 손을 잡고 일으켰다.

아그네스는 이 순간만큼은 땅에 쓸려도 아깝지 않을 만한 드레스를 입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직접 움직여 자신을 대하자, 테네이스의 얼굴에 희망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 표정은 아그네스의 다음 말에 곧바로 굳어 버렸다.

“어쩌자고 그런 짓들을 하셨어요.”

아그네스는 테네이스를 안타깝고 애잔하게 여기면서도 백성들의 편에 서 있는 황후를 연기했다.

“뭐……뭐?”

“어려움이 있으셨다면 어떻게든 제가 도와드리려고 노력했을 텐데, 백성들에게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시다니…….”

냉정하게 따지자면 테네이스가 도박장의 수익들을 알렉산드로에게 바쳤기 때문에, 아그네스는 더 쉽게 알렉산드로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이니 테네이스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아그네스가 테네이스에게서 고개를 돌려 알렉산드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제 이전 가족이라고 하여 선처해 주시지 않길 바랍니다. 애석하지만, 테네이스 오빠가 죄를 지었다면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그 대가를 달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그네스는 잔뜩 슬픔이 드리운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무려 몇 년을 오벨리아를 속여 온 그녀였다.

이정도 연기쯤이야 별거 아니었다.

“선량한 황후 폐하,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군중 중 누군가가 꽤나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은 옆 사람에게로, 또 옆 사람에게로 퍼졌다.

황후의 양오빠라는 사람이 저지른 짓에 날 섰던 분위기가 어느덧 누그러들었다.

황실에서 의도적으로 말을 흘리도록 사람들을 군중 속에 풀어 놓은 결과였다.

“너, 너 감히!”

테네이스가 억울함에 아그네스를 손가락질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완전히 그만 뒤집어쓴 채로 홀로 죽게 생긴 것이다.

“황제 폐하! 폐하께서 어떻게 제게……!”

테네이스가 알렉산드로에게로 돌아섰다.

그가 알렉산드로에게 바친 돈이 있었고, 그 사실을 들키면 알렉산드로에게도 전혀 좋을 게 없었다.

그러니 테네이스는 그 사실을 알렉산드로가 인지하도록 은근히 말을 꺼낼 생각이었다.

“어억!”

그러나 그 순간, 테네이스의 몸은 꼬꾸라지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