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90화 (90/136)

90화. 불청객(4)

“으아아악!”

남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비명을 질렀다.

테네이스의 몸이 앞으로 넘어가고, 그의 등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털썩.

테네이스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겨우 고개만을 돌려 뒤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이멜리언 백작이었다.

“어째서…… 아버지…….”

그게 테네이스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었다.

무자비한 칼날에 베인 탓에, 그의 두 눈은 제대로 감기지도 못한 채로 생을 잃었다.

모두가 경악에 빠진 그 거리에서, 제 아들의 피 위에 이멜리언 백작이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제 아들의 죄는 죽어서도 갚지 못할 것임을 압니다.”

쿵!

이멜리언 백작은 자신의 죄를 청하듯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아들의 죄악은 모두 제가 자식을 잘못 교육한 탓입니다. 하여 감히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이름에까지 먹칠을 해 누를 끼쳤습니다.”

이것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오벨리아가 역겨움에 제 입을 가렸다.

그녀는 이멜리언 백작이 제 아들을 죽인 이유를 손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이멜리언 백작은 테네이스가 모든 것을 안고 가도록 영원히 침묵시킨 것이었다.

아마도 선황이 백작과 미리 거래했을 터였다.

그렇게 하면, 이멜리언 가문만은 살려 주겠다고 말이다.

그 모습에서 오벨리아는 라이너스를 떠올렸다.

분수에도 맞지 않는 공작위를 강탈하겠다고 아버지를 죽인 라이너스나, 가문을 어떻게든 이어가겠다고 제 아들을 죽인 이멜리언 백작이나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소신에게 어떤 벌을 내리셔도 상관없으나, 제국에 지은 죄를 갚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떻게 제 혈육들을 죽여 놓고 저렇게 태연한 낯빛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황궁 암투에 익숙한 오벨리아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황족들은 애초에 각기 다른 궁에 떨어져서, 가족이 아닌 경쟁자로 자라난다.

심지어 황위 계승 수업에서는 자신을 제외한 황족은 모두 적이니 뒤를 보이지 말라 가르치니, 그들 사이에 가족애가 자라날 턱이 없었다.

알렉산드로가 황위 싸움 중 베어 넘긴 자들은 그의 형제가 아니었다.

그자들도 알렉산드로를 형제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테네이스는 이멜리언 백작이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로 애지중지하던 아들이었다.

그 마음조차 권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제 아들의 죄로 인해 피해당한 제국민들을 위해 이멜리언 가의 전 재산을 헌납하고 싶습니다.”

대중들은 쉽게 동요한다.

특히나, 그 사이에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황실이 군중들 사이에 사람을 심어 놓은 만큼, 이멜리언 백작의 발언 하나에 대번에 술렁이는 분위기가 퍼졌다.

죄를 지은 아들을 직접 죽이고 그 죄를 갚기 위하여 가문까지 희생하는 진정한 충신.

아마 그딴 것으로 이 난리를 마무리할 예정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충분히 백성들이 술렁인 뒤에야, 알렉산드로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이멜리언 백작.”

알렉산드로의 명령에 따라 이멜리언 백작이 바닥에 닿았던 고개를 들었다.

제 아들을 베어낼 때는 매정하기 그지없었던 얼굴이, 어느덧 눈가가 충혈되어 있었다.

그것은 제 아들을 죽이고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에 충성을 다해 마지않는 사람 같기도 했다.

한 편의 촌극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으로서는 아비가 가문의 영달을 위하여 제 아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베어 넘겼음을 상상조차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이멜리언 백작은 불효자식의 죗값까지도 떠안겠다는 안타까운 부모가 되어 있었다.

“그대의 충심을 의심하진 않겠다.”

알렉산드로가 이멜리언 백작의 피 묻은 손을 직접 잡아 일으켜 주었다.

“그대가 직접 사태를 수습하라.”

알렉산드로가 이멜리언 백작에게 말했다.

하, 오벨리아가 기가 막혀 흐르는 비웃음을 목 뒤로 삼켰다.

불법 도박과 고리대금, 거기에 노예상까지.

모두 제국민의 목숨을 위협하는 중대 사안이었다.

그런 일을 벌인 가문에 그 일을 처리할 권한을 주다니.

정말이지, 어불성설이었다.

“황실 또한 이 일에 대하여 깊은 애석함을 표한다. 내가 일찍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깊게 살피지 못하여 미안하구나.”

알렉산드로가 하나하나 백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것을 보며 에크하르트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에크하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이 와중에 자기는 쏙 빠져나가는군.”

누군가는 황제가 직접 하는 사과에 감명받은 표정을 지었으나, 사실 알렉산드로의 말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보이지 않는 곳’이니 결국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었으니까.

“이멜리언 백작, 이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라. 황실 또한 힘이 닿는 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알렉산드로의 말은 결국 좌중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멜리언 백작을 콕 집은 것은 만약 일이 틀어졌을 때, 이 일의 책임자가 이멜리언 백작임을 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힘이 닿는 한’이란, 여건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던가.

“예, 황제 폐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이멜리언 백작은 흔들림 없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연속이었다.

백작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백작가의 전 재산을 환원한다고는 했지만, 어차피 그가 내놓을 돈은 ‘공식적인’ 이멜리언 백작가의 재산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이미 현금화 해 뒀거나 차명으로 둔 자산들은 이에 포함되지 않을 테니 어차피 백작가는 망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오벨리아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얼굴이었다.

끝까지 알렉산드로가 이멜리언 백작가를 온전히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은 그녀와 에크하르트가 했던 최악의 가정이었다.

본디 알렉산드로였다면, 이 모든 것을 이멜리언 백작가가 떠안게 만든 채 버려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 치세에 한 치의 오점을 남기기 싫어하는 알렉산드로로서는 이미 구정물을 뒤집어쓴 이멜리언 백작가를 안고 갈 리 없었다.

즉, 이 판은 선황이 끼어들어 완전히 어그러진 셈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와 오벨리아가 이대로 물러설 것은 아니었다.

“다음 계획을 실행하도록 하지.”

에크하르트가 곧바로 자신의 그림자 기사를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들은 기필코 알렉산드로가 이멜리언 백작가를 버리게 만들 것이었다.

***

소동은 있었으나 그 한 편의 촌극으로 황후 즉위식을 위한 행진은 그럴싸하게 끝마친 셈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대신전에서 추기경에게 황후로서 축사를 받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는 대신전에 도착하여,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추기경이 도착하지 않았다니!”

교황과 추기경들은 신성 제국의 신궁과 중앙 신전에서 기거한다.

그리하여 황후 즉위식을 위해 이미 며칠 전부터 추기경의 론체스터 제국 방문을 공식적으로 요청해 둔 터였다.

그에 대한 답신도 당연히 받았다.

그런데 인제 와서 추기경 없는 황후 즉위식을 해야 하게 생긴 것이다!

“지금 신성 제국에서 감히 론체스터 제국을 우습게 보는 것이냐!”

그에 따라 알렉산드로가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 나라에서 자신이 황후를 맞이한다는데, 신성 제국의 용인을 받아야 한다니 그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조차 없어서 꼴이 우스워지게 생긴 셈이었다.

그러니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그것이 아니오라!”

알렉산드로의 분노에 대신관이 다급하게 부정했다.

대신관으로서도 황제의 분노가 이해 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추기경께서 타신 마차가 메이헨 지역을 지나올 예정이었습니다만…… 그곳에서 수도로 향하는 길의 다리가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제까지만 해도 다리가 멀쩡했거늘!”

그 다리는 돌과 벽돌로 촘촘히 지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다리가 무너졌다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메이헨에서 수도까지는 그사이에 프리스칸이라는 도시 하나가 존재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만약 아직도 추기경이 프리스칸을 통하지 못하고 메이헨에서 다른 도시로 빙 둘러 온다면 수도까지 오는 데만 반나절은 걸릴 터였다.

즉, 황후 즉위식의 날이 저문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숲길을 이용하면 될 것 아니야!”

그러나 이 황당한 상황을 둘째치고서라도, 알렉산드로는 추기경이 못 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꼭 메이헨과 프리스칸 사이 강을 잇는 다리가 아니어도, 두 도시에 낀 숲을 통해 마차를 달리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그, 요즘이 벌목 철이어서…… 숲길은 마차로 지나기 적합하지 않은지라…….”

알렉산드로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메이헨과 프리스칸 사이 숲에서 자생하는 나무는 이리저리 많은 가공에 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숲에 길을 만들어 놓기는 했으나, 사실 마차가 자주 들락거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벌목 철에 굳이 무거운 나무들을 따로 옮겨 두지 않고 숲에 쌓아 두고는 했던 것이다.

“오벨리아……! 힐켄테데 대공……!”

알렉산드로는 순간 대신관이 눈앞에 있다는 것조차 잊고 이를 악문 채 오벨리아의 이름을 내뱉었다.

다리를 어떻게 무너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다리는 오벨리아가 황태자비 시절에 새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다리를 무너트릴 수 있는 것 또한 오벨리아뿐 아니겠는가!

알렉산드로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행진까지 잘 넘겼는데, 인제 와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추기경이 없어 대신관에게 황후 즉위 축사를 받게 된다면 아그네스는 두고두고 신성 제국에 제대로 인정조차 받지 못한 황후 취급을 받게 될 터였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는 한참을 고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더는 축사를 미룰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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