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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91화 (91/136)

91화. 불청객(5)

알렉산드로가 아이리스에게 명령했다.

“캐트샤 경, 황궁에 빠르게 사람을 보내라. 선황 폐하께서 오셔야겠다.”

“황제 폐하……! 안 됩니다!”

그러자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대신관이 기겁하며 알렉산드로를 막았다.

알렉산드로는 추기경이나 다른 신관이 아니라 선황에게 황후 즉위 축사를 맡길 작정이었던 것이다.

“비켜라! 감히 대신관 따위가 누구의 앞을 막아서!”

알렉산드로의 손이 귀찮은 것을 치워내듯 대신관을 밀어냈다.

콰당!

그 자비 없는 손길에 제법 나이 든 대신관의 몸이 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관은 알렉산드로에게 매달렸다.

“황제 폐하, 축사는 신을 대리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황 폐하시라지만, 신관이 아니신 분이 어떻게 신을 대리한단 말입니까!”

이건 신성 제국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황제 폐……!”

그 순간, 서늘한 소리와 함께 뽑힌 검이 대신관의 목에 드리웠다.

“어디 한 번, 그 목이 날아가고 싶다면 더 지껄여 보든지.”

대륙 각지에 있는 대신관은 정확히 말하자면 신성 제국에서 파견을 나온, 신성 제국의 사신이었다.

즉, 대신관이 론체스터 제국에 있는 신전에 있다고 한들, 어느 곳의 신전이나 그러하듯 대신관 또한 여전히 신성 제국의 소속이라는 뜻이었다.

즉, 론체스터 제국에서는 대신관이 죄를 지어도 벌할 수 없었다.

이를 어기는 것은 두 제국 간의 협약에 어긋났다.

대신관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정확히 대신관의 목을 겨누고 있었고, 그리하여 대신관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는 정말로 대신관이 조금이라도 입을 열면 그 목을 날려 버릴 기세였기 때문이다.

“이제야 조용해졌군.”

알렉산드로가 그제야 검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만족스레 말했다.

대신관과 그가 실랑이하는 사이, 이미 알렉산드로의 기사는 황궁으로 떠난 뒤였다.

***

오벨리아가 하루 만에 돌과 벽돌로 지어진 다리를 무너트릴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황태자비 시절, 나라의 모든 다리를 재건축할 때 다리의 양 끝에 돌 하나만 빼면 다리의 절반이 무너지도록 건축가를 시켜 설계해 놓았다.

그리고 그 설계도를 영지의 영주가 아닌, 각 마을의 촌장에게만 비밀리에 전달해 놓았다.

지금도 론체스터 제국의 북부는 외세의 침입을 받았다.

혹시나 제국의 국력이 약해져 침입자들이 더 안까지 밀고 들어올 경우, 그들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도록 다리를 무너트릴 수 있게 해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렉산드로나 영지의 영주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이 군사적인 이유나, 외세의 침입으로 귀족들이 도망갈 때를 위해 쓰이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대체로 론체스터 제국에서 마을의 촌장은 대물림이 아니라, 그 마을의 주민들이 투표로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오벨리아가 판단하길, 최소한 그런 자가 가장 마을을 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촌장을 그저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 설계도는 밀봉을 푸는 순간 30분 이내에 모든 잉크가 날아가게 되어 있었다.

오벨리아는 설계도를 건네면서 외부의 침입 시에 보라고만 이야기해 줬을 뿐, 다리를 무너트릴 수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은 채로 잉크에 관한 사실을 고지했다.

혹시나 영지의 영주에게 가져가려고 해도 말이 없는 촌장들로서는 30분 이내에 설계도란 증거를 가지고 영주들에게 도달하기에는 무리란 것을 계산하여 만든 것이었다.

게다가 다리를 무너트리려면 어찌 됐든 사람 대여섯은 필요했으므로,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촌장 일가 홀로 일을 벌이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만들어 유지해 온 비밀이 이렇게 쓰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거기에다가 에크하르트가 사일러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추기경이 메르헨과 프리스칸으로 통하는 길을 이용하도록 유도한 덕에 계획은 완벽히 성공이었다.

그로 인해 추기경과 황제, 황후 중 누구도 등장하지 않고 대신전에서 머무는 시간만 길어지자 귀족들 사이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다.

“선황 폐하 드십니다!”

갑자기 그 웅성거림을 뚫고, 돌연 선황의 시종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전, 대기도실의 문이 열리고 선황이 가운데 깔린 레드 카펫을 밟았다.

본디, 추기경이 걸었어야 할 길이었다.

“선황 폐하……?”

대기도실에 모여 있던 귀족들에게서 의아함이 흘러나왔다.

황궁에 있어야 할 선황이 왜 추기경 대신 레드 카펫을 밟고 있는지, 그들로서는 모를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추기경이 불의의 사고로 오늘 내로 도착할 수 없게 되어, 대신 내가 즉위식을 마무리하겠다.”

본래라면 추기경이 섰어야 할 단상 앞에 선 선황이 선언했다.

그러자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술렁임이 일었다.

다들 그래도 되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의문에 선황이 돌을 던졌다.

“다들 의아한 얼굴이군. 내 인정보다 타국의 사신이 하는 인정이 더 중요하던가?”

선황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대기도실을 울렸다.

타국의 사신.

그렇게 말한다면 당연히, 귀족들이 할 말은 없었다.

어쨌든 신관들이 타국의 사신인 건 맞았고 사신이 선황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었으니까.

다만, 이 경우 추기경의 위치는 그저 타국의 사신이 아니라 신의 대리자였다.

그게 문제였다.

그러나 선황은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자,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럼 황후 즉위식을 속행하지. 황후는 들어오도록.”

선황의 말과 함께 다시 대기도실의 문이 열렸다.

레드카펫을 밟고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왔다.

그녀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아그네스는 어느새 행진 때와는 또 다른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였다.

대기도실 안의 귀족들 대다수가 그것이 황실 보고에나 있는 귀한 옷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추기경이 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선황이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선황이 아그네스를 인정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황실 보고의 드레스를 꺼내 온 것이었다.

이왕 할 거라면 완벽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선황의 허락도 쉽게 떨어졌다.

어차피 백성들에게 보일 만큼 다 보였다.

그러니 이제 와 드레스를 갈아입는다고 한들 상관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힐켄테데 대공 부부는 귀족 중 가장 높은 직위를 가졌기에, 가장 단상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들을 지나치는 순간, 아그네스가 오벨리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이겼어.’

아그네스는 자신의 황후 즉위식을 망치려고 했던 오벨리아의 계획이 실패한 것을 알리듯 입 모양으로 속닥였다.

오벨리아는 무표정했으나, 아그네스는 그것이 오벨리아가 패배하여 표정이 굳은 것이리라 여겼다.

그리하여 아그네스의 걸음은 더욱 위풍당당했다.

이번에도 자신이 이긴 것이다!

그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를, 별 것 없던 아그네스 자신이!

“아그네스 카테리안느, 너는 앞으로 론체스터 제국의 황후로서…….”

추기경이 읊었어야 할 축사는 황제, 황후, 황태자 별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선황은 마치 자신은 신성 제국이 정해 놓은 바에 얽매이지 않음을 드러내듯이 제멋대로 아그네스에게 축사를 건넸다.

대신전의 신관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황실 기사들이 매의 눈으로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신관들은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황의 긴 축사가 끝나고 아그네스의 머리 위로 황후의 관이 얹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추기경 예하 드십니다!”

신관의 목소리가 대기도실의 문 앞에서 울려 퍼졌다.

벌컥.

그리고 동시에 문이 홱 열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입니까!”

성기사들과 함께 등장한 추기경이 소리쳤다.

그 순간, 알렉산드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오늘 안에 도착하면 다행이었을 추기경이 왜 지금 여기 있단 말인가!

알렉산드로의 낯빛을 확인한 아그네스가 오벨리아에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오벨리아는 언제 무표정이었냐는 듯, 웃고 있었다.

아니다.

진짜로 이긴 것은…… 오벨리아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

당연히 황후 즉위식은 그 마무리마저 엉망이 되었다.

아그네스는 황후의 관을 모든 귀족이 모인 앞에서 머리에 얹어 볼 수조차 없었다.

추기경이 분노하여 성기사들을 이끌고 론체스터의 귀족들을 모조리 신전 밖으로 쫓아냈기 때문이다.

신관이 아니라 선황이 신의 대리자 역할을 한 것도 문제였으나, 무엇보다 그 일을 행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로가 기사들을 시켜 신관들을 겁박한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심지어 선황이나 황후 되는 이조차 그런 알렉산드로를 말리지 않고 장단을 맞추었으니, 황실이 통째로 신관들을 억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황실에서 신관들의 입단속을 하거나 제때 도착하지 못한 추기경을 탓하며 핑계를 대기도 전에, 추기경이 황후 즉위식이 끝나기 전 늦게나마 도착함으로써 모든 책임이 론체스터에 있게 되었다.

즉, 그러니 론체스터가 완벽히 불리한 쪽의 외교적 문제로 번진 것이다.

단언컨대 이 일은 귀족원에서도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귀족들과는 상의도 없이 추기경 대신 선황이 신의 대리자 역할을 했다.

황실이 단독적으로 일을 결정한 것만으로도 귀족들의 원성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하물며 그 단독으로 벌인 일이 론체스터에 매우 좋지 않게 작용하게 되었으니, 어찌 귀족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이 일은 신성 제국에서 절대로 얌전히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추기경에게 이러한 일방적 통보를 받은 이후, 강제되다시피 황궁으로 돌아온 선황이 돌아오자마자 곧장 알렉산드로에게 물컵을 집어던졌다.

쾅! 와장창!

“네 놈은 도대체 그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 뭐란 말이냐!”

찬물을 들이켰음에도 불구하고 선황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알렉산드로라고 해서 뭐라고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자 선황이 더 분노하여 소리쳤다.

“뭐라도 말을 하란 말이다!”

“오벨리아를……!”

그 순간, 아그네스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오벨리아를 죽이면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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