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불청객(6)
확실히 오벨리아는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그래서?
그러면 죽이면 되는 일 아닌가!
죽은 자는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법이었으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그네스의 외침에 왠지 모르게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알렉산드로가 뒤늦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게 어디 쉬운 줄…….”
그러나 이어지는 알렉산드로의 말을 선황이 끊어 버렸다.
“아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
“폐하……?”
알렉산드로가 선황을 돌아봤다.
선황은 처음으로 아그네스의 말에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황실의 치부를 너무 많이 알고 있어.”
선황은 오벨리아라면 진즉에 에크하르트의 정체를 짐작했으리라 여겼다.
에크하르트가 제 핏줄을 찾으면 알렉산드로뿐만 아니라 론체스터 제국도 난감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오벨리아는 애초에 죽어야만 했다.
“알렉산드로, 계획을 앞당겨라.”
일전에 선황은 이미 알렉산드로에게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를 처리해야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게 지금이 된다고 한들, 크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만약 오벨리아가 죽으면, 힐켄테데 대공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알렉산드로가 가능성 있는 반박을 내놓았다.
오벨리아는 현재 힐켄테데 대공비였다.
그런 대공비가 죽게 되면 힐켄테데는 물론이고 북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지도 몰랐다.
“오벨리아가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셨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선황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바실리스크의 독이 가진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쯤이야 많지 않겠느냐.”
마치, 오래전부터 방법을 생각해 둔 것처럼.
“차츰차츰 죽어가게 만들면 될 일이다. 어차피 지금부터 셈해도 2~3년밖에 살지 못할 텐데.”
황실의 보고에는 별의별 약들이 무수하게 존재했다.
이 약들을 이용한다면 오벨리아를 한 달 정도 시름시름 앓게 만든 뒤에 죽게 만들 방법도 분명 있었다.
무색무미무취의 독이라고 없겠는가.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검사라도 하는 법이었다.
들키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후에 오벨리아가 죽고 나서 심증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이미 마셔 버린 독, 물증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선황의 말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는 망설였다.
막상 오벨리아가 정말 죽는다고 생각하니, 알렉산드로는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알렉산드로, 너 설마 망설이는 거야?”
그 모습을 본 아그네스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선황 또한 알렉산드로의 반응이 마음에 차지 않는 듯 엄한 얼굴로 알렉산드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알렉산드로가 애써 부정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마음은 술렁이고 있었다.
오벨리아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라는 사실이 왜 인제 와서 거슬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그네스, 황후가 되었으니 주요 귀부인들을 초대해 티파티를 여는 게 좋겠구나.”
선황이 아그네스를 향해 말했다.
선황이 건넨 말의 의도를 알아차린 알렉산드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황후의 티파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가는, 아그네스가 의심받을 게 아닙니까. 그건 안 됩니다. 그녀는 제 아이를 임신하고 있습니다.”
아그네스가 움찔했다.
아이를 임신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거라면, 자신은?
저는 어떻게 되어도 좋단 말인가?
그녀의 두 눈이 지긋이 알렉산드로를 향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그런 아그네스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황후, 네가 하도록.”
그러나 선황은 정확히 아그네스를 가리켰다.
“들키지 않을 만한 독을 내가 마련해 주마. 이건 내가 네게 황실 일원으로서 주는 첫 번째 의무다. 할 수 있겠지?”
“선황 폐하……!”
알렉산드로가 그런 선황을 막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곧바로 따라 나온 아그네스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아그네스!”
“알렉산드로,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할 일 아니야?”
아그네스가 홱 알렉산드로를 돌아봤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껏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냥 그걸 내가 하겠다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알렉산드로가 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그네스의 말이 옳았다.
그가 이렇게 기민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알렉산드로는 이미 한 번 오벨리아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인제 와서 태도가 달라지다니 우습기만 할 뿐이었다.
“이른 시일 안에 행하도록.”
선황에게 알렉산드로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선황은 당연히 일을 밀어붙일 따름이었다.
“예, 선황 폐하.”
아그네스 또한 순종적으로 선황의 앞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알렉산드로의 반응이 거슬려서라도, 그녀는 하루빨리 오벨리아가 죽어 버리길 바랐다.
그 틈에서 오직 알렉산드로만이 뭔가 불안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오늘 이렇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기경, 예그리나가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다리가 끊겼다는 사실을 힐켄테데 쪽에서 미리 알려 줬기 때문에, 예그리나는 중간에 길을 틀어 늦게나마 황후 즉위식이 끝나기 전에 론체스터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만약 미리 말씀을 주지 않으셨더라면, 론체스터 황실이 신성 제국을 모욕하는 것을 눈 뜨고 당해야만 했을 겁니다.”
“별일 아니었는데, 그래도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오벨리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겸손한 척 대답했다.
“혹시 론체스터 제국에 머무시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저를 찾아 주십시오. 언제든 제게 편히 말을 전하실 수 있게 머무시는 방에 집사를 배치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에크하르트 또한 일부러 더욱 정중한 태도였다.
힐켄테데 대공가가 신성 제국의 추기경보다 낮은 지위는 아니었으나, 예그리나의 나이가 지긋했으니 존댓말 또한 그녀에 대한 예우와 같았다.
황실의 만행에 충격을 받았던 예그리나는 그런 두 사람의 태도에 더욱 감명받은 모습이었다.
“불편한 황실이 아니라,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에 이렇게 저희 일행의 거처를 마련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지요.”
알렉산드로와 선황의 행동으로 현재 신성 제국 일행은 황실과 껄끄러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본래 신성 제국에서 온 일행이 머물렀어야 할 황실의 귀빈실에서 지낸다는 건 매우 불편한 일이었다.
그것을 고려하여 힐켄테데에서 예그리나 일행에게 타운하우스에 거처를 내 주었다.
게다가 그들이 먼 거리를 온 것을 감안하여 식사나 휴식 방면에서 모두 풍족하게 제공하고 있었으니, 솔직한 말로 신성 제국 사절들에게는 황실보다 힐켄테데가 훨씬 나은 셈이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저희 제국의 황실이 번번이 이런 식으로 구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오벨리아가 시선을 내리깔며 은근하게 말을 꺼냈다.
번번이.
이 말은 분명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뉘앙스를 알아차린 예그리나가 멈칫하며 물었다.
“혹시 일전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자국의 치부를 저희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군요.”
에크하르트는 일부러 더욱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어머,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별일 아닙니다.”
오벨리아 또한 자신이 한 말이 정말 실수였던 것처럼 자신의 입을 한 손으로 가렸다.
그러자 예그리나는 당연히 아까보다 더 의아한 기색이었다.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과 비슷한 일이라면, 제가 조금만 알아봐도 아마 알게 되겠지요.”
예그리나의 말이 옳았다.
수도 귀족들 사이에 온통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를 황비로 맞이하려 한다는 사실이 퍼졌었다.
그러니 어차피 예그리나가 알아내고자 한다면, 못 알아낼 게 없는 소문이었다.
애초에 그런 것이었기에 오벨리아가 일부러 예그리나의 앞에서 운을 뗀 것이기도 했고.
“그러나 두 분께서 감추려는 것을 제가 굳이 애써 들추는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그리나는 오벨리아나 에크하르트의 예상보다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조금만 알아봐도 알게 되리라, 그리 언급한 것은 예그리나가 들은 이야기의 출처를 밝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오벨리아나 에크하르트에게 듣지 않아도 다른 곳에서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추기경 예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한참을 뜸들이던 오벨리아가 매우 어렵다는 듯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카테리안느 공작이 한때, 아그네스 이멜리언이었던 황후를 황비로 올리자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런……!”
예그리나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경악에 찬 탄성을 내뱉었다.
신성 제국의 유일신, 르 카르디에는 일부일처제를 교리로 지정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르 카르디에를 주교로 믿는 모든 나라가 일부일처제를 성문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런데도 황후 외에 다른 부인을 들이겠다는 것은 르 카르디에의 교리에 전면으로 반박하는 일이었다.
대표적으로 르 카르디에를 믿지 않고 개신교나 그 외의 기타 신화의 신을 믿는 대륙 위의 나라들이 황비니 후궁이니, 그런 식으로 배우자를 여럿 두고 있지 않던가.
“심지어 얼마 전에는 귀족들 사이에 현 황제가 아그네스 카테리안느를 황비로 들이고, 다른 영애를 황후로 들여 세를 불리려고 한다는 소문도 돌았지요.”
에크하르트가 예그리나의 화에 기름을 들이붓듯이 말을 덧붙였다.
쾅!
그러자 예그리나가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테이블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절대 좌시할 수 없습니다……! 내일 황제에게 제대로 항의하겠어요!”
예그리나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완벽히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원하던 계획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