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불청객(8)
“그럼 묻겠소, 추기경.”
기다렸다는 듯이 알렉산드로가 입을 열었다.
“신성 제국의 교황 성하는 다들 신이 내린, 신의 핏줄이라고 하지.”
이어지는 알렉산드로의 말에 론체스터의 귀족들조차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러면 동등한 제국의, 같은 황제로 태어난 선황께서는 무엇이란 말이오?”
알렉산드로의 말은 론체스터의 황제 또한 신의 자식이라 불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신성 제국에서 정하는 신의 핏줄은 오직 교황만이 유일했다.
그러니까 지금, 알렉산드로는 신성 제국의 교리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황제 폐하……!”
“추기경! 아니면 그대는, 그대조차 설 수 있는 자리에 이 론체스터의 선황 폐하께서 오르기는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기겁한 예그리나의 말을 알렉산드로가 단호히 끊어냈다.
그는 방금 라이너스의 발언에서, 론체스터가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론체스터의 황제는 신성 제국의 교황과 동등한, 아니, 그보다 더 위대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했다.
‘지금이야 전 대륙이 대부분 같은 신을 믿기에 신성 제국이 득세한다지만, 대륙을 관통하는 철도 사업을 우리가 성공하게 되면 그깟 신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알렉산드로에게는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론체스터에서는 제국뿐 아니라 각 왕국과 협약을 맺어, 다른 나라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현재 이 협약은 신성 제국을 제외한 대륙 대다수의 나라와 체결된 터였다.
이때 론체스터는 철도 건설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대신, 철도의 지분을 해당 나라와 론체스터가 5:5로 나누기로 되어 있었다.
얼핏 보면 론체스터가 손해인 듯싶었으나, 실상은 아니었다.
협약상 공개한 철도 기술은 일부분일 뿐, 핵심적인 것들은 모두 론체스터의 손아귀에 있었으니까.
대륙을 관통하는 철도.
이것은 곧 각 나라 교역과 이동 수단의 중심이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신이 아니라 철도를 운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부가 이 대륙을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굳이 론체스터가 신성 제국에 지고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선황이 신성 제국과 사이가 틀어질 일이 될 텐데도 불구하고 황비를 들이고자 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다만, 그 철도 사업이 현재까지는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완전히 정면으로 맞서는 일만큼은 피하고자 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때를 맞춰 라이너스가 또 다른 철광석 광산을 손에 넣은 덕분에 철광석의 공급이 훨씬 더 수월해졌다.
그 철광석 광산은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던지 매장량이 대단히 풍부했고 그로 인해 철도 사업은 예정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진척되는 중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올해 겨울 즈음 대륙을 관통하는 철도길이 완성될 것 같았다.
그랬으니 굳이 신성 제국에게 론체스터가 굽혀야 할 이유가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르 카르디에님의 교리를 어기시겠다는 것입니까?”
단언컨대, 예그리나는 알렉산드로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다.
그 탓에 그녀의 목소리는 당황으로 떨리고 있었다.
라이너스가 했던 주장을 론체스터의 황제가 고스란히 가져다가 써먹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르 카르디에 님께서는 자신의 자녀가 이 땅 위의 지도자가 되리라 하셨지. 그런데 그 지도자가 꼭 신성 제국에서만 태어나리란 법은 없을 텐데?”
알렉산드로가 지나치게 당당하게 굴자, 론체스터 귀족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엇갈렸다.
그들 사이에도, 같은 제국임에도 자신들이 신성 제국에게 은근히 고개를 숙이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간 대륙을 지배해 온 신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기에, 여전히 신을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귀족들은 그런 알렉산드로의 태도를 불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어쨌든 현재 자국의 황제와 타국의 신관이 대치 중이었다.
그러므로 그 반발심을 가진 귀족들조차도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신성 제국의 역할입니다……!”
회의장의 군중들조차 동조하는 자가 반, 침묵하는 자가 반.
그 속에서 예그리나의 외침은 외로운 것이었다.
“신성 제국이 하는 것을 론체스터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군.”
알렉산드로는 예그리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추기경, 그대가 선황께서 축복을 내리신 일에 관하여 물었던가?”
곧, 알렉산드로는 제멋대로 선언했다.
“선황 폐하께서 직접 축복을 내리셨으니, 황후에게는 영광된 일. 이것 외에 론체스터에서 할 말은 없겠군.”
즉, 론체스터에서는 신성 제국에게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예그리나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 일을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황제 폐하.”
“추기경, 현재 그대의 발언이 신성 제국의 입장이라 해석해도 되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발언을 신중하게 하는 게 좋을 걸세.”
그러나 라이너스가 곧장 예그리나의 발언에 반박함으로써, 결국 그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라이너스의 말대로 예그리나의 발언이 신성 제국의 공식적인 말이 되어 버리면 곤란한 것은 신성 제국 사절단 일행이었다.
신성 제국과 론체스터의 사이가 당장 틀어지든 아니든, 사절단은 현재 론체스터에 있었으니까.
결국, 그날 회담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
회담 이후, 론체스터 귀족들 사이에서는 론체스터가 현재의 종교로부터 독립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끊임없이 말이 오갔다.
그러나 대체로 여론은 회담에서 황제와 카테리안느가 독단적으로 일을 벌인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황제와 카테리안느가 다른 귀족들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호외요! 호외!”
그러나 다음 날, 카테리안느가 대량의 철광석이 채굴되는 광산을 매입했다는 신문 기사가 났다.
이와 동시에 카테리안느에서 황실의 철도 사업에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귀족들의 여론은 뒤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그네스를 황후 자리에 올리는 것에 성공함으로써 여전히 건재함을 알린 카테리안느였다.
그런데 이제는 황실과 함께 철도 사업까지 주도하게 생겼다.
물론 철도 사업에 참여한 귀족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원래부터 카테리안느의 지분이 높았는데, 그 와중에 더 지분이 커지게 된 것이다.
철도 사업은 성공이 예정된 것이었고 카테리안느가 전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게 되리란 것은 명확해 보였다.
그런 판국이었으니, 귀족들은 황실과 카테리안느에게 정면으로 반발하여 괜한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했다.
“아그네스의 티 파티에 가야겠어.”
그래서 오벨리아는 마음을 바꿨다.
알렉산드로와 라이너스의 기반은 절대로 단단해져서는 안 됐다.
철광석 광산과 철도 사업은 황실과 라이너스를 무너트릴 최후의 무기였다.
그 무기가 단번에 모든 것을 부숴 버리려면, 철도 사업이 망하면 재기할 가능성도 없는 상태여야만 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현재의 여론을 뒤집어엎을 생각이었다.
“테네이스에 관한 일을 아그네스의 티파티에서 터트릴 거야.”
그리고 이 여론을 뒤집기에, 황후가 최초로 여는 파티란 더없이 적절한 무대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지금 그들이 널 노리고 있다는 걸 빤히 알면서, 황실 한복판에서 열리는 파티에 가겠다고?”
얼마 전, 에크하르트의 첩자는 기어코 황실에서 정보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선황의 시종장이 황실의 보고에서 어떤 약병을 꺼내오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그 약병이 무엇인지는 멀리서 보아 제대로 알 수 없었으나, 그 약을 누구에게 쓸 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벨리아도 이 보고를 함께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티파티에 가겠다고 한 것이다.
“테네이스 이멜리언의 일은 티 파티가 아닌 다른 곳에서 터트려도 황실과 이멜리언 가에 치명적이야. 그런데 굳이 네가 나서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어.”
“그것뿐 아니라, 앞으로 아그네스의 사교계 활동도 막아 버릴 거야. 레베카와 함께.”
현재 레베카는 아그네스의 최측근이 되어 있었다.
레베카의 조언들이 아그네스에게 아주 유용하게 들어 먹힌 덕이었다.
물론 그 조언들은 대체로 오벨리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수도에는 암암리에 레베카가 누구의 사람인지 퍼져 있었다.
“아그네스가 이번에 공식적으로 레베카를 소개할 거야. 북부의 인사가 황후를 따른다는 사실을 귀족들 앞에서 공인하게 되면, 황후로서 사교계 입지를 다지는 데 크게 도움이 될 테니까.”
지금까지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방해 공작을 끊임없이 했기 때문에, 아그네스의 사교계 입지는 그리 대단치 못했다.
그런 힐켄테데 부부가 실은 북부 귀족의 마음조차 제대로 사로잡지 못했고, 오히려 황후가 그것을 해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아그네스는 사교계에서의 평가를 쇄신할 수 있을 터였다.
오벨리아는 그 기회를 완벽히 망쳐 버릴 생각이었다.
“그럼 너는?”
오벨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크하르트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오벨리아의 계획 속에는 만약 아그네스가 그녀를 노릴 때, 어떻게 대비할지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즉, 오벨리아는 자신에게 닥칠 위험 따위 개의치 않았다.
“……너는 또,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인가? 언제나 그랬듯이?”
말을 내뱉으며, 에크하르트는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 저 사람은 매번 아무렇지 않게 죽을 길을 찾아 들어가는가.
그의 얼굴이 결국 일그러졌다.
“에크하르트, 나는…….”
오벨리아가 난감함에 말끝을 늘어트렸다.
에크하르트가 저런 반응일 줄 몰랐던 것도 아니건만, 난감함을 어쩔 수 없었다.
이전처럼 그의 반응을 무시할 수 없는 탓이었다.
이미 인정해 버린 스스로의 마음이, 그녀로 하여금 이도 저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너는 절대 결정을 바꾸지 않겠지.”
에크하르트가 돌연 낯빛을 바꾸었다.
이제 오벨리아의 고집은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그는 오벨리아의 고집 꺾기를 포기했다.
“그럼, 내가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결국, 오벨리아의 뜻대로 해야만 하는 거라면…….
자신은 그 속에서 그녀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