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불청객(9)
“어서 오게, 대공비.”
우습게도, 아그네스는 티파티가 열리는 황실의 정원에 오벨리아가 도착하자마자 직접 마중을 나왔다.
아그네스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든 채로 대단히 오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오벨리아보다 우위에 섰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좀처럼 티를 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모양새였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개의치 않고 더없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예법 교과서에 나온 것처럼 완벽히 우아한 자태를 자아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굴욕감이라고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아그네스의 입매가 삐뚤어졌다.
오벨리아가 오르지 못한 자리에 오른 것은 아그네스였다.
분명 억울하고 분해야 할 것은 오벨리아인데, 그녀는 정작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고개를 들게, 대공비. 이만 자리에 앉도록 하지.”
아그네스가 휙 등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가 버렸다.
오벨리아의 품위는 카테리안느 공작가에서 지냈던 시절과 황태자비였던 시절, 그 모두를 거쳐 완성된 것이었다.
아그네스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누구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미칠 순 없었다.
그것이 아그네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어쩐지 여전히 오벨리아가 우위에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기 때문이다.
“모두 이렇게 와 줘서 고맙네. 다들 파티를 즐겨 주면 좋겠군.”
아그네스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티 테이블은 황후의 테이블을 가장 맨 앞으로 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놓여 있었다.
덕분에 아그네스의 자리에서는 모든 이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그네스의 매서운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어쩌면 예상했던, 로이안 후작가의 엘라사나였다.
사교계는 지위가 높다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그 명성이 좌우되는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알렉산드로와 잘만 오가던 혼담이 그의 변심으로 틀어진 이후 로이안 후작가는 귀족파로 돌아섰다.
황후가 즐기라고 했으니 모두에게 발언권도 생겼겠다, 엘라사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사촌 자매셨기 때문인지, 황후 폐하께서 어조가 상당히 전 황태자비 전하와 비슷하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아그네스의 표정이 즉각적으로 굳었다.
사교계에 데뷔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순간도 사교계의 정점에 머무르지 않은 적이 없던 사람.
누구도 그런 오벨리아와 같을 수는 없었다.
엘라사나의 말은, 아무리 아그네스가 오벨리아를 열심히 흉내 낼지라도 결국 오벨리아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 대하여 대놓고 따질 수는 없었다.
어쨌든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는 아그네스보다 먼저 황태자비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사실 아그네스보다 윗사람이 돼야 했을 오벨리아였고, 심지어 사교계에서 가장 뛰어나기로 정평이 난 상대였다.
그런 이와 비슷하다고 하는 말은 대놓고 모욕이라 규정하기에는, 엘라사나가 칭찬이었다며 발을 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만히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 자리의 귀부인과 영애들은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엘라사나의 말에 담긴 뜻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냥 넘어가면, 아그네스는 황후로서 처음부터 우습게 보이게 되는 것이었다.
“저는 전 황태자비 전하가 어떤 분이신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때, 입을 연 것이 레베카였다.
“황후 폐하께서는 황제 폐하의 반려이시며, 그분과 유일하게 동등한 대우를 받아 마땅한 분이시죠.”
론체스터의 제국법상, 황제와 황후의 위치는 대등했다.
레베카는 그것을 들먹였다.
“두 분은 황실의 근본이기도 하고요. 황실을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은 경솔한 행위가 아닐까 싶군요.”
누가 뭐래도 황실의 주축은 황제와 황후였다.
아무리 오벨리아 카테리안느가 뛰어난 전 황태자비였다고 해도, 레베카의 말대로 황실과 비교한다면 전 황태자비가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레베카는 방금 전 엘라사나의 발언을 아그네스와 전 황태자비 사이의 비교가 아니라, 황실과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를 두고 한 말로 범위를 일부러 확대시켰다.
그에 따라 난감해진 것은 엘라사나였다.
순간 엘라사나가 날카롭게 눈매를 치켜뜨며 레베카를 노려봤다.
순식간에 역전된 전세에 아그네스가 은은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어린 영애이니, 그런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아그네스와 엘라사나의 나이차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라사나를 어리다고 표현함은 그녀가 철이 없다고 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런’ 실수라는 것은 결국 엘라사나가 레베카의 말대로 경솔했다는 말이었다.
“……황후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이해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엘라사나는 굴욕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엘라사나가 상황을 뒤바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그네스가 엘라사나를 용서하는 그림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엘라사나에게는 분명 억울한 일이었으나, 황후가 용서로 마무리 지어 버린 일을 아무리 후작가라고 할지라도 결국 한낱 영애에 불과한 이가 물고 늘어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한편 단번에 분위기를 전환한 레베카를 두고 귀부인들이 속닥였다.
“저 영애는 누구래요?”
“왜, 그 있잖아요. 북부의 에필로나 백작이 그토록 귀애한다던 손녀요.”
“아! 그 대공비가 될 뻔했다던 영애요?”
파티장 안, 귀부인과 영애들의 시선이 아닌 척 오벨리아와 레베카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에필로나 백작가는 다른 후작가들도 쉬이 대하지 못할 만큼, 북부뿐 아니라 제국 내에서도 명망 있고 부유한 곳이었다.
그런 가문의 손녀가 어쩌다가 대공비와 대척하는 황후의 편을 들고 있는지 다들 궁금한 기색이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내가 모두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어.”
때를 맞춰, 아그네스가 운을 띄웠다.
아그네스의 손이 레베카에게 뻗어졌다.
마치 연극처럼, 보란 듯 다소 과장된 행동이었다.
“이리 와, 레베카. 내 친우를 소개해야지.”
아그네스가 같은 테이블이되,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레베카를 불렀다.
그러자 황후의 시녀가 자연스럽게 아그네스의 옆에 의자를 놓았다.
어쩐지 황후와 그 옆의 사람 사이의 공간이 과하게 벌어져 있더라니, 처음부터 레베카의 의자를 놓을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에 따라 같은 테이블에 앉은 귀부인과 영애들의 표정은 급속도로 굳어 버렸다.
아무리 에필로나 백작가가 후작가보다 못하지 않다지만, 황후의 테이블에는 사교계의 명성과 더불어 그 지위도 고려하여 의자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황후의 다른 쪽 옆자리에는 오벨리아가 앉아 있었는데, 아그네스가 감히 힐켄테데 대공비와 일개 영애를 같은 위치에 앉게 한 것이다.
그렇게 되니 다른 귀부인들과 영애는 자연스럽게 레베카의 아래가 된 셈이었으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레베카 에필로나라고 합니다.”
레베카는 그것을 모르는 척,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레베카가 황후의 옆에 앉는 것을 아그네스를 제외한 그 테이블의 모두가 못마땅하게 보았으나, 그녀는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태연히 자리했다.
“앞으로 레베카가 내 치장을 맡는 시녀가 되어 줄 걸세.”
치장 시녀란, 황후궁 내에서 시녀장만큼이나 권력 있는 자리였다.
보통 진짜 치장과 관련된 고된 일들은 모두 그 아래 시녀와 하녀들이 했다.
사실상 치장 시녀는 일하기 위해 궁에 들어온 게 아니라 황후의 가장 가까운 말동무를 의미했다.
즉, 사교계에서 명성을 쌓고자 하는 고위 귀족가의 영애들이 맡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것은 대체로, 다른 것보다 더 좋은 혼사를 맺는 것에 뜻을 둔 이들이 거쳐 가고는 했다.
“황후 폐하. 그것은……!”
웰링스턴 공작 부인이 순간 발끈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황후의 치장 시녀 자리는 알렉산드로와의 협상으로, 웰링스턴 공작 영애가 맡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웰링스턴 공작 부인, 내 결정에 이의가 있나?”
그러나 아그네스는 자신의 최측근이 될 자리를 또다시 알렉산드로의 사람으로 채울 생각 따위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권력이 아니었으니까.
“……아닙니다, 황후 폐하.”
아그네스가 강하게 나오자, 웰링스턴 공작 부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물러섰다.
황제와의 협상이 어찌 되었든, 최종 결정권자는 아그네스였다.
황후가 자신의 시녀를 누구로 쓸지 고르겠다는데 거기에 대고 웰링스턴 공작 부인이 끝까지 반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테이블의 모든 귀족이 이 대치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힐켄테데 대공비가 포섭하는 데 실패한 북부의 영애를, 황후가 최측근으로 두었다.
암암리에 아그네스가 레베카를 가까이한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이렇게 공식적인 선언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얼핏 이것은, 황후가 처음으로 사교계 인사를 다룸에 있어 힐켄테데 대공비에게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 즉위하신 것을 기념하여 제가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오벨리아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완벽히 그런 듯 보였다.
“선물?”
아그네스가 멈칫하며 오벨리아 쪽을 쳐다봤다.
분위기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오벨리아가 돌연 선물을 준비했다니, 아그네스는 괜스레 다시 불안해졌다.
“내 즉위 선물은 이미 즉위식 날 힐켄테데에서 준비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것은 힐켄테데에서 드리는 선물이고, 저는 따로 준비했답니다.”
굳이 따로 선물을 준비했다는 그 말은 얼핏 보면 아부라고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의 모두가, 지금까지 대공비의 행보로 보건대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들이게.”
어쨌든 아그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대공비가 가져온 선물을 대뜸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벨리아가 손짓하자, 그녀의 시녀가 화려한 상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