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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96화 (96/136)

96화. 주인(1)

“얼음꽃을 말린 차를 준비했답니다.”

“어머나.”

“세상에…….”

오벨리아가 상자를 열자, 귀부인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얼음꽃은 북부에서도 가장 높은 고지대의 동굴에서만 자생하는 풀이었다.

그것의 잎부터 줄기, 꽃까지도 얼음처럼 투명하고, 사람의 체온이 닿으면 그대로 시들어 버리기 때문에 채취 과정 또한 매우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워낙 까다로운 풀이라서 따로 재배도 불가능한지라, 말 그대로 발견하여 캐내면 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얼음꽃을 말린 찻잎은 값비쌌다.

얼핏 보면, 오벨리아의 행동은 순수한 호의 같아 보였다.

게다가 얼음꽃은 혈액 순환을 돕고 몸을 차게 해 주는 성질이 있어 특히나 해열에 특효약이었다.

여름이라 요즘 날이 더우니, 얼음꽃을 우린 차로 더위를 식히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순간 홱 오벨리아를 노려봤다.

그 눈빛이 살벌했다.

아그네스가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얼음꽃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아그네스가 임산부라는 것이었다.

얼음꽃은 자궁을 차게 하고 수축시키는 성질이 있어 임산부에게는 금기시되는 약재기도 했다.

“귀한 것이니 내 고맙게 받겠…….”

이 자리에서 아그네스의 회임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벨리아가 유일했다.

그런데 이런 것을 가져온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잠시 분노를 삭이며 침묵하던 아그네스가 얼음꽃 찻잎을 얼른 눈앞에서 치우고자 입을 열었다.

“저게 얼음꽃으로 만든 차라고요?”

그 순간, 레베카가 마치 아그네스의 말을 끊어내듯 불쑥 말을 꺼냈다.

“요즘 얼음꽃 찻잎이 가짜가 그렇게 많다던데…….”

레베카가 말끝을 늘어트리며 일부러 오벨리아를 힐끔거렸다.

얼음꽃은 피어 있을 때와 달리, 찻잎으로 덖으면 평범한 차들과 같은 색이 되었다.

얼음꽃의 색이 투명한 것을 빼면 사실 그 모양 자체는 길가의 풀과 구별하기가 크게 어려웠기 때문에, 종종 이를 이용하여 사기 치는 이들이 존재했다.

얼음꽃으로 우린 차를 마셔 본 사람들 또한 귀족 중에서도 국한되었으니, 사실 속이려 든다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혹시 이것도 그런 건 아니겠죠?”

레베카의 말은 오벨리아를 의심하고 있었다.

얼음꽃은 제국의 귀족이어도 구하기 힘들었다.

만약 이 얼음꽃 찻잎이 가짜라면, 그것을 마셔 본 적이 없을 아그네스를 속여 비웃기에는 딱 안성맞춤이었다.

“그 말은 상당히 불쾌하게 들리는군.”

오벨리아가 레베카를 지긋이 쳐다보다가, 돌연 아그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얼음꽃은 사람의 체온 이상에 달하는 열을 가하면 변하지요. 확인해 보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뜨거운 물을 부으면 불어나는 보통의 찻잎과 달리, 덖을 때조차도 저온에서 해야 하는 얼음꽃은 뜨거운 물이 닿으면 쪼그라드는 성질이 있었다.

즉, 오벨리아의 말은 차를 우려 보자는 말이었다.

“아니, 됐네……!”

아그네스는 당연히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얼음꽃은 그 특성 탓에, 차 한 잔을 우리는데도 다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찻잎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뜩이나 희귀한 얼음꽃 찻잎을 더욱 값비싸게 만들었는데, 그런 얼음꽃을 기껏 차로 우려 놓고 마시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황후 폐하, 이대로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가짜 얼음꽃 찻잎이 근래 들어 그토록 성행한다는데, 이건 폐하의 위신이 달린 일입니다.”

그렇지만 레베카는 제멋대로였다.

레베카가 여태껏 아그네스에게 입 안의 혀처럼 굴던 것과 달리, 그녀는 순식간에 제멋대로 시녀를 불러들여 뜨거운 물을 준비하게 했다.

“내가 됐다고 하질 않아!”

그 순간 다급해진 아그네스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파티장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누가 봐도 그녀의 반응은 과민했다.

황후를 보고 있는 눈동자들에 빠르게 의심이 차올랐다.

아그네스도 스스로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꽉 잡아 쥐었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그런 아그네스를 몰아붙였다.

“황후 폐하, 이것은 힐켄테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증명되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오벨리아의 말에도 틀린 바가 없었다.

레베카는 노골적으로 대공비를 의심했다.

그런데도 의심을 풀어내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모욕을 받고도 물러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침 찻잎은 넉넉히 준비해 왔답니다.”

오벨리아가 손짓하자, 그녀의 다른 시녀들이 줄줄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차를 대접하고 싶었거든요.”

오벨리아의 말은 완벽히 준비된 것이었다.

아그네스는 자신이 오벨리아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아니면 혹시, 차를 드시지 못할 다른 이유라도……?”

오벨리아의 시선이 정확히 아그네스의 배를 향했다.

처음, 아그네스의 회임 사실을 알고 경악과 분노에 차 그녀를 보던 것과 달리 오늘 오벨리아의 두 눈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도리어 움츠러든 것은 아그네스였으니까.

“대공비 전하, 말을 삼가세요……! 그러면 지금 황후 폐하께서 정당치 못한 아이라도 가지셨단 말입니까?!”

레베카가 다소 호들갑스럽게 따지듯 외쳤다.

의원이 아이를 가졌다고 진단하려면 적어도 태아의 심장 박동을 확인할 수 있는 4주차에 들어서야만 했다.

그런데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와 공식적으로 결혼을 한 것은 단 며칠 전이 아니던가.

그렇게 되면 아이는 혼전에 임신한 것이므로, 신성 제국에서는 축복을 내리기를 거부할 터였다.

아그네스는 당시 황제의 정부에 불과했고, 정부의 아이는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귀족들이 아예 아그네스의 아이를 알렉산드로의 자식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다수 귀족은 저택 밖에서 가진 아이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그네스가 황궁에 들어온 뒤에 잉태했느냐, 혹은 밖에서 아이를 가졌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밖에서 아이를 배고도 훗날 황후가 되었다는 이유로 그 전의 과오가 용납된다면, 그런 식으로 하여 다른 귀족들 또한 첩실이나 사생아를 가문에 들여놓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아그네스가 회임했다는 사실을 들킨다면, 알렉산드로가 지금껏 이를 숨기기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

귀족들은 아이의 임신 시기를 눈에 불을 켜고 밝히려 물론이요, 아이를 사생아라 낙인찍고 아이의 황위 계승권조차 인정해 주지 않을 테니까.

정당치 못한 아이.

딱, 레베카의 말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이었다.

“그렇죠? 설마, 황후 폐하께서 그러셨겠습니까.”

오벨리아가 웃으며 뜨거운 물이 담긴 찻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손수 얼음꽃 찻잎을 가져와 차를 우려내었다.

“그러니, 간단히 증명해 주시면 될 일이지요.”

아그네스의 안색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차를 우려내는 3~4분이 그녀에게는 지옥 같았다.

어떻게든 머리를 써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도피책을 마련하기에는, 아그네스의 머리가 그 정도로 비상하지 못했다.

“대공비, 지금…… 감히, 나를 의심하는 건가?”

결국 아그네스가 낼 수 있는 궁여지책이란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쾌해하며 분노한 척하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이어지는 레베카의 말에 허사가 되어 버렸다.

“어서 증명해 주세요, 황후 폐하. 감히 폐하를 부정하다 의심하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혼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은 귀족에게 있어 매우 모욕적인 일이었다.

만약, 아그네스가 정말 회임한 게 아니라면 오벨리아가 아무리 대공비라고 한들 공식적인 책임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고 보니, 황후 폐하께서 그간 모시는 동안 달거리가 없으셨…… 헙!”

아그네스가 황궁에 머문 지 꽤 되었다는 사실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그런 그녀를 계속 모셔 온 듯한 시녀의 중얼거림은 이 일에 완벽히 불을 지핀 셈이 되었다.

시녀는 제 잘못을 아는 듯 입을 틀어막으며 그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너, 네년이……!”

쫘악!

아그네스가 눈이 홱 돌아가 입을 잘못 놀린 시녀의 뺨을 내리쳤다.

그녀는 분노에 휩싸여 자신의 말투가 또다시 상스러워졌다는 것도 잊고 소리를 내질렀다.

“당장 이 년을 끌고 가! 내가 허락할 때까지 물 한 모금도 주지 말고 고문……!”

“황후 폐하, 저 말이 사실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아그네스는 제 화를 마저 토해낼 수 없었다.

오벨리아가 때를 맞춰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기사들이 재빠르게 시녀를 끌고 나갔다.

오벨리아는 굳이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것이 아그네스를 도발하기에 더 좋았다.

저 시녀는 안전할 터였다.

에크하르트의 사람들이 시녀를 빼돌릴 테니까.

“지금 저 헛소리를 믿는단 말이야?!”

아그네스가 더욱 뻗대듯이 목을 빳빳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오벨리아에게 그런 게 통할 턱이 없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명확히 해명해 주셔야겠습니다. 저희가 모셔야 할 차기 황족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감히……!”

아그네스가 오벨리아에게 달려들 듯 씩씩거렸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무거운 정적이 그녀를 압박해 온 탓이었다.

아까 아그네스가 소리를 쳤을 때와는 달랐다.

단순히 놀라서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그네스에게 시선으로 ‘증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신관이 필요할 것 같군요. 마침,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신관의 도움을 받고 있던 차였습니다.”

오벨리아가 쉴 새 없이 아그네스를 몰아붙였다.

황궁의는 황후에게 유리하게 말할 것이 뻔하니, 신관을 불러오겠다는 것이었다.

저잣거리의 의원도 아니고 신성 제국의 신관이 아그네스의 상태를 공표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어졌다.

“……차를!”

그 순간 아그네스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차를 마시면 될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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