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주인(2)
얼음꽃은 태아에게 치명적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임산부라면 절대 얼음꽃을 섭취할 리 없었다.
그런데 아그네스가 차를 마시겠다고 하자, 파티장 안이 술렁였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그네스가 현재 임신을 했느냐 아니냐는 귀족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게다가 혹여 아그네스가 진짜 회임을 한 게 아니라도 어차피 난감해질 사람은 오벨리아였다.
그러니 누구도 아그네스를 말릴 생각 따위 있을 리 없었다.
“찻잔을 새로 가져와라!”
아그네스는 무슨 생각인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귀족들은 차의 향을 중요히 여겼고, 그리하여 이미 차가 담겼던 잔에 다른 차를 따르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귀한 차라니, 이왕이면 모두가 함께 맛보는 게 낫겠지.”
아그네스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시녀들이 황후의 명령에 따라 모든 테이블의 찻잔을 바꾸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 찻잔에 얼음꽃으로 우린 차가 따라졌다.
“들게, 대공비.”
아그네스가 콕 집어 오벨리아에게 차를 권했다.
오벨리아는 순간 직감했다.
아그네스가 오벨리아의 찻잔에 무슨 짓을 했으리라는 것을.
여기서 오벨리아가 차를 마시고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잔을 준비한 아그네스뿐 아니라 찻잎을 가져온 오벨리아도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때부터는 누가 독을 썼느냐를 밝혀내기 위하여 개싸움이 시작되는 셈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퐁당.
“이런…… 제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대공비 전하.”
오벨리아의 옆자리에 앉은 그리너스 공작 부인이 차에 부채에 달린 보석을 떨어트렸다.
그것도 하필 부채를 든 손을 뻗다가 오벨리아의 찻잔 위로 말이다.
이 일은 오벨리아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너스 공작가는 철저한 중립파였다.
그런데 그리너스 공작 부인이 왜 갑자기, 어떻게 알고 자신을 도와주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제가 임신을 한지라 애석하게도 이 귀한 차를 마시지 못한답니다.”
그리너스 공작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자연스러운 손길로 오벨리아와 자신의 찻잔을 바꿔놓았다.
“그러니, 시녀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 없이 이리하면 될 일이지요.”
그리너스 공작 부인은 아그네스가 오벨리아의 찻잔을 바꾸며 다시 수작을 부릴 경로까지 차단해 버렸다.
아그네스는 숫제 낭패 어린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오벨리아의 찻잔에 수작을 부려, 자신이 차를 마시기 전에 다른 일이 벌어지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게 그리너스 공작 부인이 끼어든 것이다!
“겨우 이런 걸로 죄송할 거까지야. 나는 개의치 않으니 신경 쓰지 말게.”
오벨리아는 그리너스 공작 부인의 장단에 맞추어 어느덧 여유롭게 미소하며 찻잔을 들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이 상황에 그리너스 공작 부인이 자신을 도울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는 아마도 에크하르트가 손을 써 두었으리라 생각했다.
오벨리아가 차를 머금었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후 폐하께서는 드시지 않으십니까?”
오벨리아가 차를 음미하며 물었다.
“나는…….”
아그네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러나 방법이 떠오를 리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갑작스레 선언했다.
“나는 몸이 좋지 않아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 티파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아그네스는 누가 붙잡을세라, 아주 다급한 걸음새로 연회장을 나섰다.
말 그대로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는 모양새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 행동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귀족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화젯거리는 당연히, 황후의 혼인 전 회임이었다.
***
티 파티가 엉망으로 끝나 버린 후, 귀족원은 곧바로 황실에게 진실 해명을 요구했다.
이미 준비해 놨다는 듯이 곧바로 착착 진행되는 것이, 정말이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아아아악! 오벨리아!”
아그네스가 황후궁에 도착하기 무섭게, 귀족원의 의장이 황실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그녀의 귀에 날아들었다.
아그네스가 발작하듯 날뛰며 분노를 토해낸 것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아그네스! 너……!”
그러나 아그네스가 내재된 분노를 모두 털어내기도 전에, 알렉산드로가 그녀의 방문을 거칠게 열고 들이닥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아그네스로서는 지겨울 따름이었다.
알렉산드로는 또 이렇다 할 대책이라고는 없이, 우선 아그네스에게 화를 토해내려는 것이 뻔히 보였으니까.
“나라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아그네스가 확 짜증을 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가 표정을 굳히며 맞받아쳤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오벨리아 앞에서 회임한 사실을 왜 이야기해서 이 사단을 만들어!”
“그러면 애초에 알렉산드로, 네가 오벨리아를 제대로 죽였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그럼 지금 이게 내 탓이라는 거야?!”
아그네스와 알렉산드로 간에 고성이 오갔다.
서로의 행동으로 인해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화를 멈추지 않았다.
“즉위식 일만 해도 그래……! 추기경 하나 제대로 못 데려와서 나를 축복도 못 받은 황후로 만들었잖아!”
“그럼 뭐 아그네스, 너라고 일을 제대로 한 줄 알아?! 매번 오벨리아한테 당해서 사교계의 웃음거리나 된 주제에……!”
“알렉산드로, 너야말로 오벨리아한테 매번 졌잖아! 아니, 힐켄테데 대공에게 진 건가?”
“아그네스!”
아그네스와 알렉산드로가 어깨를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오벨리아 대신 너를 선택하는 게 아니었어!”
한참을 그렇게 대치를 이어가던 알렉산드로가 기어코 말을 내뱉었다.
“오벨리아가 황후 자리에 올랐으면 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애초에 왜 그 타이밍에 덜컥 아이를 가져서는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쫘악!
그 순간, 아그네스가 참지 못하고 알렉산드로의 뺨을 내리쳤다.
그녀의 눈매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 미쳤어?!”
그러나 대뜸 얻어맞은 알렉산드로는 이미 눈이 돌아간 듯, 아그네스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아 쥐었다.
그녀가 그 시선에 지지 않고 빼액 소리쳤다.
“그래! 나 미쳤다! 아이는 나 혼자 가지니?!”
사실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에게 처음 임신 사실을 말했을 때 반응이 어땠는지,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맨 처음……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했었다.
“너도 좋아서 해 놓고 왜 뒤늦게 전부 다 내 탓으로 돌려, 이 나쁜 새끼야!”
“너, 너 지금 나보고……!”
“그래! 새끼라고 했다! 어쩔래?!”
아그네스는 더더욱 고개를 빳빳이 들며 알렉산드로에게 화를 냈다.
어차피, 라이너스가 투자한 철광석 광산에 대한 지분의 상당한 부분이 아그네스에게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모르고 있지만, 그녀가 황후의 이름으로 광산에 투자하는 돈들이 아니면 사업은 진행되기 힘들었다.
그러니까 라이너스는 아그네스가 황후로 있는 한, 그녀를 버릴 수 없었다.
또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가 카테리안느로 있는 한, 그녀를 폐위시키지 못했다.
그 물리고 물린 관계 속에서 아그네스는 자신이 이 정도는 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알렉산드로는 분노하여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 권력에 기생하는 것을 알고 있는 듯, 고분고분하게 굴던 아그네스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자 그는 당황을 금하지 못했다.
“네가 나한테 맨날 천날 이렇게 소리만 지른다고 뭐 일이 해결되는 줄 알아?! 멀쩡한 자식 사생아 낙인찍히게 하고 싶지 않으면 노력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심지어 아그네스는 멈추지 않고 알렉산드로를 다그쳤다.
당혹스러움에 그 말을 듣고만 있던 알렉산드로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졌다.
“그럼 너라고 무슨 방도가 있어?! 너도 없는 걸……!”
“넌 황제잖아!”
또 다시 고함이 오갔다.
아그네스와 알렉산드로는 그러고도 한참을 서로 씩씩거리다가 지칠 즈음이 되어서야 입을 다물었다.
숨을 몰아쉬던 그가 이를 악물며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내 첫 자식이 사생아인 건 말도 안 돼.”
알렉산드로의 어머니는 든든한 외가를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7황자로 자라는 동안, 오벨리아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때까지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쭈그려 사는 수밖에 없었다.
아그네스의 배 속 아이가 정부 시절 잉태되었단 게 알려지면, 아이는 평생을 알렉산드로가 받았던 것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는 감히 제 아이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두고 볼 생각 따위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알렉산드로가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한순간, 그가 눈을 번뜩이며 아그네스의 배를 쳐다봤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위협이라도 당한 것처럼 배를 감쌌다.
‘아이는 다음에 다시 가지면 될 게 아니냐!’
알렉산드로의 머릿속으로 선황의 외침이 비집고 들어왔다.
많은 자손은 황실의 기반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수면 위로 드러난 사생아의 존재란, 결국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며 영원토록 치부에 불과할 터였다.
이렇게 된 이상 아그네스의 아이는 무조건 황궁에서 태어나야만 했다.
황궁에서 가졌는지 아닌지 의심받는 아이를 외부에서 낳아 온다면, 아이를 귀족들의 아가리에 고스란히 먹잇감으로 바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알렉산드로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눈에 원하던 것이 들어왔다.
알렉산드로는 망설임 없이 걸어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알렉산드로?”
아그네스가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어쩐지 알렉산드로의 눈빛이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그네스.”
알렉산드로가 상자를 든 채로 성큼성큼 걸어와, 아그네스의 팔을 붙들었다.
그녀가 뒷걸음질 치지 못하도록 꽉 붙든 채로,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