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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98화 (98/136)

98화. 주인(3)

“이걸 마셔.”

알렉산드로의 손에 들린 상자는 오벨리아가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아그네스에게 얼음꽃을 섭취하라고 직접 권유하고 있었다.

“……너, 미쳤어?! 지금 나보고 내 아이를 직접 죽이라는 거야?”

아그네스가 기함하여 발버둥 쳤다.

그러나 알렉산드로가 그녀의 팔을 얼마나 강하게 붙잡았던지, 아그네스는 그의 손아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누가 아이를 죽이래?”

알렉산드로가 다른 손으로 아그네스의 뺨을 감쌌다.

“아이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그렇지만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남들이 알 수 있을 정도로만. 딱, 그 정도만 마시면 되잖아?”

아그네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알렉산드로는 마치 이 순간의 이야기가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실상 어처구니없는 개소리에 불과했다.

그녀의 귓가에는 그가 아이를 가지고 도박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아그네스는 솔직히, 제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았으리라 여겼다.

딱 그 정도라는 건- 바꿔 말하자면, 자칫하여 그 정도를 조금이라도 넘기게 된다면 그대로 아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너……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러다가 우리 애가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건데……!”

아그네스는 강렬히 저항했다.

자신의 아이를 도박거리로 삼을 수는 없었다.

“너와 내가 결혼한 첫날 밤 아이가 생긴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산드로는 말을 이었다.

“당연히 이 시점의 너는 아이를 가졌다는 걸 몰랐겠지.”

알렉산드로는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벨리아가 네게 찻잎을 건네면서, 네가 부정한 짓을 했다고 자꾸만 주장하니까…… 너는 어쩔 수 없이, 네가 정부 따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얼음꽃 차를 꾸준히 마신 거지!”

제 아이를 두고 그런 말을 지껄이는 알렉산드로의 두 눈에는 일견 광기가 보이는 듯했다.

아그네스가 제 배를 두 팔로 더 감싸 안았다.

어쩐지 그는 오벨리아를 이길 수만 있다면 아그네스의 배를 갈라 지금 당장 아이를 드러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혈이라도 하게 되어 아이를 가졌단 사실을 알면, 오벨리아에게 죄를 물을 수도 있고…… 또 네가 나중에 조산한다고 한들 이미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겼는데 누가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어!”

“넌 미쳤어! 자칫하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아그네스가 더는 참지 못하고 온몸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알렉산드로가 말을 뚝 멈추었다.

그녀는 자신을 빤히 보는 그의 시선에, 마치 뱀이 몸을 휘감기라도 한 것처럼 오소소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넌 허울뿐인 황후가 되는 걸 참을 수 있어? 아그네스, 네가?”

알렉산드로가 돌연 픽 하고 아그네스를 비웃었다.

그의 말에 그녀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그네스가 황궁으로 들어간 시점은 어쨌든 전 황태자비가 죽었다고 알려졌을 때였다.

모두 아그네스를 황제의 정부라고 불렀으나, 알렉산드로가 그녀를 제 정부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으니 결국 그것은 귀족들이 뒤로 쉬쉬하여 떠든 이야기에 불과했다.

아그네스는 모두가 황제의 정부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정부로 공인되지는 않은 존재였다.

만약 그녀가 정부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아주 명확한 증거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면, 귀족들은 결코 아그네스를 황후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그네스가 이 시점에서 아이를 가졌고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게 들통 나면 황후로서의 입지는 끝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쉬쉬할 수도 없이 정부 낙인이 찍힌 여자가 모든 귀족을 내려다보는 황후라니!

귀족들은 그런 여자가 자신들의 위에 선 것에 대한 분노를 참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알렉산드로의 말대로, 허울뿐인 황후가 되는 것이었다.

“잘 생각해, 아그네스. 아이는 죽어도 다시 가질 수 있고- 또, 잃어버린 아이가 몇 개월 전에 네 배 속에 자리 잡았는지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의 말은, 혹시나 배 속의 태아가 죽어도 아그네스가 언제 임신했는지 의심받을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그녀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이를 무기로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면, 아이도 사생아를 만들고 너도 자리만 남은 황후가 될래?”

그러나 알렉산드로의 말에 아그네스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평생을 산단 말인가!

“아, 아- 아니다. 귀족들은 자신들을 기만한 너에게서 황태자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바라지 않을 테지.”

그렇게 따지면 알렉산드로도 귀족들을 기만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마치 모든 게 아그네스의 잘못인 양 몰아갔다.

실제로 귀족들도 그럴 터였다.

어쨌든 다음 황제가 즉위하기 전까지 권력을 누릴 알렉산드로보다, 아그네스 하나만 콕 집어 그들의 분노를 풀어내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

“그렇게 되면 황비를 들여야 할지도 모르겠어.”

“지금…… 나를 두고 다른 여자한테서 아이를 보겠다는 거야?!”

이건 협박이었다.

아그네스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 소리쳤다.

지금 알렉산드로는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런 건 선택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가 다정다감하게 말투를 바꾸었다.

그가 짐짓 상냥한 척 미소했다.

아그네스는 처음으로 그 웃음이 역겹다고 생각했다.

“내가 황궁의한테 잘 말해서, 아이한테 위협이 가지 않을 정도의 섭취량을 알려 줄게. 그러면 되잖아?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아그네스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로의 말대로 좀처럼 일을 해결할 방도가 보이질 않았다.

“오벨리아가 네 아래에 무릎 꿇는 순간만을 생각해.”

알렉산드로가 강하게 붙잡고 있던 아그네스의 팔에서 손을 떼고,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왔다.

그 순간, 아그네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한없이 당당한 얼굴로, 저를 비웃고 있던 오벨리아를 떠올렸다.

그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를 다시 제 앞에 무릎 꿇릴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아그네스의 황후 자리는 더욱 탄탄해질 터였다.

그녀가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꽉 잡아 쥐었다가 놓았다.

아그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네가 승낙할 줄 알았어, 아그네스. 넌 역시 내 영원한 반려야.”

쪽.

알렉산드로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그네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이었으나,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래, 아이를 해치지 않을 정도로만.

딱 그 정도로만 섭취하면 될 일이었다.

아그네스는 애써 스스로를 그렇게 세뇌했다.

자신은…… 절대 아이를 해치려는 게 아니었다.

***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로 돌아온 오벨리아는 곧바로 에크하르트를 찾았다.

“그리너스 공작 가문을 어떻게 회유한 거야?”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와 마주하자마자 황궁에서부터 품었던 의문을 꺼냈다.

그리너스 공작가는 그녀조차 끌어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림자들이 고생 좀 했어.”

에크하르트는 그리너스 공작 부인에 관한 일을 오벨리아가 이미 추측하고 있을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를 제 맞은편에 앉히며 담담히 말을 늘어놓았다.

“몇 달 전…… 그러니까, 정확히는 네가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신 후 의식을 차리지 못할 때. 그때, 그리너스 공작가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던 모양이야. 물론,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지만.”

공작가의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제국에 퍼지면, 그 일로 공작가에 어떻게든 얽히려 들거나 아이를 오히려 위험에 빠트릴 자들은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리너스 공작 부부는 마음을 졸이면서도 비밀리에 아이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에크하르트나 오벨리아였어도, 무려 공작가가 숨긴 일이었다.

따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바쁜 와중에 두 사람이 거기까지 신경 쓰지도 않고 알아낼 수는 없었다.

만약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도울 사람을 찾기 위하여, 단 며칠 만에 아그네스의 티파티에 참석하는 전원의 정보를 탈탈 털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몰랐을 일이었다.

“마침, 오벨리아 네게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보육원 일에 신경 쓰고 있었어.”

알렉산드로와 라이너스가 귀족들의 돈을 빼먹기 위해 벌였던 보육원 사업.

오벨리아는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전남편과 오빠의 만행을 말리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지녔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 에크하르트는 약속한 대로 제국 전역에 건립된 보육원들을 일일이 보살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운 좋게도 그리너스 공작 부부의 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고.”

오벨리아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에크하르트는 단순히 운이 좋다고 말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그 많은 보육원의 아이 중에 그리너스 공작가의 자식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건, 에크하르트가 그만큼이나 아이들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는 옳은 일을 실천하는 데 있어 결코 대충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에크하르트가 올곧은 사람이었기에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오벨리아는 어디서부터 고맙다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약속했던 것을 그저 말에 그치지 않고 지켜 주어서, 며칠 밤을 꼬박 새웠을 텐데도 힘든 내색 하나 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 주어서, 그리고 자신이 다시 원하게 된 사람이 이런 사람이어서.

그 모든 게 오벨리아에게는 버거울 만큼 벅찬 감정이 밀려들게 했다.

“네게 말을 못 한 건, 아이를 찾은 게 오늘이어서 그랬어. 사실 다른 대책도 세워 놓긴 했는데, 이왕이면 오벨리아 너와 같은 테이블에 앉을 이가 너를 더 쉽게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에크하르트는 계속해서 설명을 늘어놓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그리너스에 관한 일을 숨겨 오벨리아가 마음이 상하진 않았을까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에크하르트.”

감정이 넘실거려서, 그것을 어쩌지 못하고 듣고만 있던 오벨리아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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