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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99화 (99/136)

99화. 주인(4)

“당신을 사랑해서 다행이야.”

오벨리아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 라이너스의 배신은 뼈아팠다.

특히나 8년을 헌신한 남편이 배신했다는 사실은 오벨리아로 하여금 더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달랐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오벨리아에게 얼마나 커다란 의미인지, 누가 알까.

“그래서… 너무 고마워.”

알렉산드로에 대한 사랑은 후회로 점철되어 있었다.

에크하르트는 그녀가 그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확신을 주는 상대가 있다는 게, 울고 싶을 만큼 행복했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오벨리아의 붉어진 눈가를 매만졌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아직은, 울 자격이 없었다.

오벨리아는 불타는 폐궁에 마리아를 홀로 두고 나왔을 때, 눈물조차도 제게 사치임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녀는 사실 이렇게 행복해해도 되는 건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해준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조차도 욕심 같았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에크하르트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눈앞의 이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더는 불행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결연한 시선이 오벨리아의 두 눈에도 들어왔다.

아,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비는 눈은 이런 것이었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어떻게 알렉산드로의 얼굴에서 사랑 따위를 찾았는지, 이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해,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랑이야말로,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욕심임을 알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에게 줄 수 있는 게 겨우 이 말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마치 그 한마디가 무언가 크게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듯,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짙게 탄 에크하르트의 피부 위로 붉은 기가 가득해졌다.

그는 그런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린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벨리아가 처음 에크하르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는, 막 기절하다시피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뒤였기에 현실감이 없었다.

그 후로 그녀는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멀쩡한 맨정신에, 갑자기 듣게 되니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에크하르트가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을 곰작거렸다.

무어라도 반응하고 싶은데,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는 오벨리아가 첫사랑이었다.

아무리 잘난 에크하르트일지라도, 누구나 그렇듯 처음은 서툴렀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웃고 말았다.

아, 이런 감정은 욕심이며 자격 없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에 어쩌면 세상을 가질 수도 있을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가진 듯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어떻게 행복해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해, 에크하르트.”

그래서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에게 보잘것없는 말이나마 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를 위해 죽어간 이들을 두고 이렇게 행복하다니, 이보다 더한 죄가 어디 있을까.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죄를 빌었다.

부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방종을 용서해주기를.

“사랑해,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그녀에게 화답했다.

여전히 붉은 그의 얼굴에 오벨리아가 또다시 웃고 말았다.

설령 용서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죄스럽게도, 너무나 행복했다.

***

‘황후가 요즘 얼음꽃 차를 즐겨 마신다더라.’

알렉산드로의 의도대로, 그 소문은 사교계에 크게 퍼졌다.

아그네스의 정부 시절 임신을 꼬집으며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던 여론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런 미친 짓까지 할 줄이야.”

황실의 첩자에게서 상황을 보고 받은 에크하르트가 혀를 찼다.

아그네스는 실제로 얼음꽃 차를 매일 마시고 있다고 했다.

“내게 죄를 씌우기 위해서 제 아이까지 내걸 줄은….”

오벨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얼음꽃 차를 마시고 아그네스의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오벨리아도 책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하여 태중의 아이에게 위험을 가하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할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바였다.

“조치를 취해야겠어.”

에크하르트가 말했다.

이대로 가면 오벨리아에게 난감한 일이 닥칠 터였다.

아그네스가 마실 찻잎을 바꿔치기하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에크하르트, 혹시 아그네스가 하루에 마시는 차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느라 침묵하던 오벨리아가 돌연 물었다.

“감시하는 눈을 붙여놨으니, 필요하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다.”

에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는 뜬금없는 오벨리아의 말에도 의아함을 표하지 않았다.

에크하르트의 태도에는 그녀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들어 있었다.

“그럼 내버려 두자. 내게 생각이 있어.”

오벨리아가 확신을 담아 말을 이었다.

“알렉산드로라면 몰라도, 아그네스는 아이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을 거야. 아그네스는 그 아이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무기인지 알고 있으니까.”

오벨리아는 아그네스의 성정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그네스의 욕심을 믿었다.

황실에서 아이를 낳는 것만큼 여인이 입지를 다지기 가장 쉬운 방법은 없었다.

하물며 정부들조차도 아이를 낳은 사람과 아닌 사람의 취급이 달랐다.

당장에야 사생아로 이 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입장이었지만, 혹시라도 그 가문에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을 경우가 발생한다면 상황은 뒤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십여 년 전에, 중앙 귀족이었던 한 백작가에서 역병으로 그 적통 자식들과 본부인이 모두 죽어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 당시 백작은 친인척 집안의 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사생아를 데려와 백작 자리에 올려놓았다.

백작가의 친인척이 모두 반대했으나, 본부인도 죽어버렸던 데다가 백작이 밀어붙이는 통에 결국은 그 사생아가 뒤를 잇게 되었다.

물론, 그 일로 백작가는 한동안 중앙 귀족의 반열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본디 귀족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그 백작가는 십여 년을 버티다가 도로 수도에 올라왔다.

그리고 현재 백작이 된 이를 낳은 그 정부는 백작가의 재산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

일개 귀족가에서도 이렇듯 어쨌든 아이가 있는 편이,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만약 아그네스가 술수를 쓴다면, 오벨리아는 그들이 아이를 포기하기보다 얼음꽃 차로 인해 아이를 조산하는 척하는 쪽을 노리리라 생각했다.

아그네스가 괜히 오벨리아에게 자신의 회임을 자랑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아그네스는 분명 아이가 그녀에게 가져다줄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그네스가 아이를 쉽게 포기할 리 없었다.

게다가 유산을 하고 나면 아이를 가지기가 더 어려울 테고, 가뜩이나 이미 한차례 황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던가.

혹시라도 아그네스가 아이를 잃었다가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하면, 그녀의 입장은 난감해진다.

그 와중에 황비 이야기가 다시 불거진다고 생각해 보라.

아그네스가 이런 위험을 감수할 리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어쨌든 무사히 출산하려면, 아이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얼음꽃 차를 마셔야 했다.

오벨리아가 노린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분명 아그네스는 제한된 양의 얼음꽃 차만 섭취하고 있을 거야.”

“그 사실을 밝히면 아그네스에게 치명적인 일이 되겠군.”

“맞아, 아무리 황후일지라도 황족을 해하려고 한 죄는 크니까.”

황손을 잉태한 사실을 알고도 얼음꽃 차를 마셨다.

그것은 오벨리아의 말대로 황족 시해죄에 해당했다.

이렇게 되면 즉위하자마자 아그네스를 끌어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염려를 표했다.

“시기를 잘 맞추지 못하면 오벨리아 네가 위험해진다.”

오벨리아는 이미 아그네스의 임신에 대한 가정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그런 판국에 아그네스가 얼음꽃 차를 마시고 잘못되면, 오벨리아가 황손을 노렸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시기를 잘 맞춰야지.”

오벨리아가 굳건한 눈으로 말했다.

그러자 에크하르트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나도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에크하르트는 더는 오벨리아를 말리지 않고 자신의 수하를 곧바로 불러들였다.

이런 일에 있어서 더 이상 그녀와 부딪히거나, 반대만 하는 일은 소용이 없음을 이제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일을 확실히 처리하여, 오벨리아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나았다.

힐켄테데가 전력을 다하면 그쯤이야 못하겠는가.

“현재 황후를 진찰하는 황궁의가 누구인지 알아내도록 해. 그자의 신상 정보도 파악하고.”

에크하르트가 수하에게 명령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궁의는 한둘이 아니었고 선황제와 황제 그리고 황후를 진찰하는 사람도 따로 있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아그네스를 진찰하는 황궁의와 황후를 전담하는 황궁의가 다른 사람이리라 짐작했다.

아그네스가 결혼 전에 회임했다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심지어 아그네스의 진찰을 알렉산드로와의 결혼 전부터 맡아왔을 터였다.

에크하르트는 황후만을 전담하는 황궁의가 황후도 아닌 아그네스를 진찰하려 했을 리도 없고,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황후 전담 의원에게 그 진찰을 맡겼을 리도 없으리라 추측했다.

“…이번에는 더 반대 안 해?”

너무나 빠른 일처리에 오벨리아가 약간은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물었다.

어쩌면 이 일로 또다시 에크하르트와 마찰을 빚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수긍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터였다.

“어차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잖아.”

그런 오벨리아를 바라보며 에크하르트가 픽 웃어 버렸다.

“넌 네가 원하는 일을 해.”

에크하르트가 맹세하는 기사처럼, 오벨리아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난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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