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주인(5)
아그네스는 시시때때로 불안했다.
본디 오벨리아에게 독을 먹이려던 계획은 어디 가고, 자신이 지금 제 몸에 독과 같은 얼음꽃 차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그네스는 잔뜩 히스테릭해져 있었다.
지난밤, 그녀는 배가 뭉친 듯이 아파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야만 했다.
그런데도 오늘 진찰을 보고 황궁의가 한 말은 겨우 ‘아이는 괜찮다’라는 그 말 한마디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그네스는 절대 그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황궁의는 알렉산드로의 사람이다.
그는 아이로 도박을 벌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렉산드로가 아이의 생사 유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니 황궁의라고 한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그네스는 히스테리를 부려 모든 시녀들을 내보냈다.
“드레스가 이게 뭐야! 이런 걸 골라오다니, 지금 날 우습게 여기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눈이 발바닥에 달리지 않고서야 이딴 걸 가져와!”
그리고 이멜리언 가에서 데려온 자신의 시녀, 앨리스만을 몰래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황후 폐하.”
“가서 의원을 구해 와. 실력이 있으면서도 이름은 없는 의원이어야만 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돈만 있으면, 그런 이들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꼭 비밀리에 찾아와야 해.”
아그네스가 화장대의 서랍을 열어 악세사리를 닥치는 대로 집어 비단 주머니에 넣은 후, 그것을 앨리스에게 건네주었다.
아그네스의 머릿속에 초조함이 몰려왔다.
황궁의가 아이는 괜찮다고 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었다.
오늘 새벽 이런 고통을 겪기 전까지, 황궁의는 아그네스에게 내내 괜찮다는 말만했다.
그녀는 그사이에 아이가 어떻게 되었을까 봐, 좀처럼 잠조차 이룰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아그네스의 얼굴은 실제로 눈 밑이 거뭇거뭇하고 퀭해 보였다.
화장만 아니었다면 그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터였다.
“예, 황후 폐하. 걱정하지 마세요.”
앨리스가 비단 주머니를 받아든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재빠르게 황후궁을 나섰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아그네스의 치장 시녀로 막 입궁하던 레베카가 발견했다.
그녀는 아그네스에게 내내 붙어 있는 시녀들과 달리 궁 내외를 출입하며 수도에 있는 에필로나의 타운하우스에 머물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 거지……?’
앨리스는 아그네스가 가장 아끼는 시녀였다.
지금은 레베카의 출근 시간에 불과한 이른 아침이었다.
그런 시간에 궁을 나서다니.
누가 봐도 이상했다.
그리하여 레베카가 몸을 숨긴 채 앨리스가 가는 방향을 지켜봤다.
어쩐지, 앨리스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안젤리나, 저 사람 뒤를 쫓아 줘요.”
레베카가 다급하게 그림자 호위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아그네스의 곁에 있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봐, 오벨리아가 붙여 준 사람 중 하나였다.
“알겠습니다, 에필로나 영애.”
레베카의 명령을 받은 그림자 호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쩌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지도 몰랐다.
***
레베카의 짐작은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알렉산드로의 눈을 돌리기로 했다.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의 일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에게는 때를 맞춰 써먹기 좋은 패가 딱 존재했다.
일부러 무너트리지 않고 남겨 둔 이멜리언 백작가를 이용할 때였다.
이멜리언 백작은 백작가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제 아들이 백성들에게 진 죄를 갚겠노라 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가 진실로 백작가의 모든 재산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
이멜리언 백작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오랜 세월 관계를 쌓아 온 카테리안느 공작과 오벨리아를 배신하고 아그네스의 편에 붙었겠는가?
그렇기에 이멜리언 백작 저택은 겉으로 보기에는 휑하게 보였으나, 실제로 백작가의 씀씀이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백작가의 뒤를 캐내는 것쯤은 당연히 힐켄테데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황궁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 중, 소크라논 자작이 이멜리언 백작가를 도마 위에 올렸다.
“폐하, 이멜리언 백작이 암시장에서 로랑 메리시아의 그림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힐켄테데가 재건되는 3년 동안 에크하르트가 북부에만 틀어박혀 있었어도, 여전히 힐켄테데의 입이 되어 줄 중앙 귀족은 존재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요. 로랑 메리시아의 그림은 유실된 것이 많아 부르는 게 값일 텐데요.”
소크라논 자작의 말에 맞장구치듯, 에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알렉산드로의 고개가 홱 에크하르트를 향해 돌아갔다.
말의 시발점이야 자작이었으나, 이 일을 지시한 게 에크하르트라는 점을 알렉산드로가 모를 리 없었다.
물론, 알렉산드로는 이멜리언 백작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토록 자제하라 일렀건만, 그새를 못 참아 일을 키운단 말인가!
“이멜리언 백작, 어떻게 된 일인지 해명하라.”
알렉산드로가 표정을 굳히며 이멜리언 백작을 지목했다.
그는 소크라논 자작이 어떤 말을 꺼내기 전에 이멜리언 백작에게 발언 기회를 줌으로써, 간단히 이 사안을 마무리해 버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소크라논 자작에게 명백한 증거가 있더라도,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먼저 입을 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이것은 오해입니다, 폐하. 저는 그곳에서 로랑 메리시아의 그림을 사들인 것이 아니라 불법으로 밀입국된 그림을 압수했을 뿐입니다.”
이멜리언 백작이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변명을 만들어냈다.
알첸티카 왕국의 식민지 시절, 로랑 메리시아는 그녀의 나이 50대에 수많은 예술가를 모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100여 점의 그림을 완성해냈다.
물론 그 그림들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작품이었으나, 100여점의 그림을 모두 모으면 퍼즐처럼 딱 맞춰져 알첸티카의 건국 신화 속 모습을 재현해낸다는 게 가장 대단하게 손꼽히는 점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그려졌던 로랑 메르시아의 그림은 모두 알첸티카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로랑 메르시아가 생전에 그린 그림은 많았으나, 그 중 이 100여 점의 그림을 사고파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었다.
그렇기에 이멜리언 백작이 사들인 그림이 그 100여 점 중 하나라면, 그의 말대로 우기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쨌든, 이멜리언 백작이 암시장에 간 것은 사실이란 말이군.”
그렇지만 에크하르트가 노렸던 것은 애초에 이멜리언 백작이 로랑 메리시아의 그림을 샀느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에크하르트가 말을 꺼내자, 이멜리언 백작은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백작이 당황하여 간과했으나, 암시장은 원래 발을 들이는 것부터가 불법인 곳이었다.
이멜리언 백작은 낭패 어린 얼굴이었다.
그런 고가품을 거래하는 암시장은 대체로, 회원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멜리언 백작가에서 불법 도박장을 운영해 왔으니, 그런 암시장에 연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멜리언 백작이 뒷세계와 연결된 것을 전부 제 아들의 탓으로 돌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멜리언 백작에게 암시장의 회원권이 있다면,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 증명되는 셈이었다.
“폐하, 이멜리언 백작이 드나든 암시장은 그곳의 회원이어야만 하며, 심지어 그 자격을 얻는 곳조차 꽤 까다롭다고 합니다.”
소크라논 자작이 해당 암시장에 관하여 조사한 내역들이 담긴 서류를 꺼내 들었다.
물론, 에크하르트가 제 수하들에게 조사를 시켜 완벽히 작성한 후 건네준 것이었다.
“……저는 아들의 죄를 속죄하려 했을 뿐입니다!”
이멜리언 백작이 다급하게 외쳤다.
“제 아들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조사하던 중, 아들이 암시장과의 거래로 로랑 메르시아의 그림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암시장에 발을 들인 겁니다.”
이멜리언 백작은 제가 죽인 아들을 또 다시 거리낌 없이 팔아먹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크하르트는 역겨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죽은 자에게 입이 없다지만, 저토록 죄책감 하나 없는 모습이라니.
에크하르트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그렇지만 회원권은 이멜리언 백작의 이름으로 발급되어 있습니다.”
소크라논 자작이 또다시 이멜리언 백작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이전이야 아들의 이름으로 암시장의 회원권을 발급받았겠지만, 테네이스는 이멜리언 백작의 손에 죽었다.
그러니 암시장을 들락거리기 위해서는 백작이 스스로의 이름을 내거는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알렉산드로의 두 눈이 점차 싸늘해졌다.
“폐하! 이건 모함입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황제의 시선에 이멜리언 백작은 점차 초조해졌다.
황제가 테네이스를 버렸듯이, 이멜리언 백작가까지 버리지 못 하리란 법도 없었다.
백작은 완전히 수세에 몰려 숫제 황제에게 살려 달라 매달릴 기세였다.
“폐하, 백작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돌연, 에크하르트가 이멜리언 백작의 편을 들고 나섰다.
에크하르트가 무슨 꿍꿍이로 저런 말을 꺼내는가.
알렉산드로가 잔뜩 미심쩍은 표정이 되어 에크하르트를 쳐다봤다.
물론 그것은 잠깐의 착각에 불과했지만.
“그러니 지금 당장 이멜리언 백작가를 압수 수색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어진 에크하르트의 말에 그대로 알렉산드로와 이멜리언 백작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이멜리언 백작이 직접 제 아들을 죽여 벌함으로써, 불법에 가담했던 이멜리언 백작가는 사실상 별다른 큰 처벌을 받지 않고 넘어갔다.
그것에는 자택을 수색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겨우 넘어갔던 일을, 에크하르트가 지금 하자고 말한 것이다.
그제야 알렉산드로는 깨달았다.
에크하르트가 처음부터- 이 순간만을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