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주인(6)
“지금 당장 압수 수색을 하는 건 무리다, 대공. 아무리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는 법.”
알렉산드로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이멜리언 백작은 이미 폐하께 거짓을 고했다는 혐의가 있습니다. 절차에 맞추기 위해 백작에게 시간을 주다 보면, 또다시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지요.”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대공 전하……! 그럼 제가 지금 폐하를 속이기 위해 수를 쓸지도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에크하르트의 말에 이멜리언 백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가 그토록 당당하다면 수색을 받아도 되겠군. 내 오해라면 힐켄테데의 이름으로 이멜리언 백작가에 직접 사죄하도록 하지.”
그러나 알렉산드로나 이멜리언 백작이 입을 열수록, 그들은 에크하르트가 만들어 둔 수렁에 점차 말려들 뿐이었다.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지금껏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이멜리언 백작가와 황실 사이의 접점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고 여겼다.
황후 즉위식 날 백성들이 증인으로 나선 일이 테네이스의 죽음으로 덮였다고 해도, 그것이 있었다면 굳이 이멜리언 백작가를 쳐내지 못할 것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갑작스러운 압수 수색이라니.
알렉산드로는 무언가 불안함을 느꼈다.
압수 수색을 해도 이멜리언 백작이 중요 서류를 잘만 감춰 놨다면,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에크하르트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벌인다는 것은 무언가 확신이 있다는 말인가.
“폐하, 결정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나 알렉산드로에게는 고민할 시간조차 더 주어지지 않았다.
소크라논 자작을 필두로, 이멜리언 백작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귀족들이 함께 가세한 탓이었다.
이멜리언 백작이 속죄하겠다고 해 놓고, 실은 아그네스의 이름을 팔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면서 횡포를 일삼아 귀족들의 반감을 산 대가였다.
“……지금 당장 캐트샤 경을 보내 이멜리언 백작가를 수색하라.”
결국, 알렉산드로는 껄끄러운 명령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폐하!”
이멜리언 백작의 절규를 무시하고 아이리스를 보내는 것만이, 알렉산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알렉산드로는 부디 아이리스가 눈치껏 재빠르게 행동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이멜리언 백작가에서 압수, 수색한 것들을 들고 나타난 사람은 알렉산드로에게는 애석하게도 아이리스가 아니었다.
“그간 불충하였습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일리어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라이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리스가 아니라 일리어스였다.
“카테리안느 경이, 어떻게…….”
알렉산드로 또한 놀라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들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압도되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죽은 줄 알았던 일리어스 카테리안느가 돌아왔다!
그 누구도 감히 예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불시에 습격을 당하여, 그동안 사경을 헤매고 있던 지라 폐하를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일리어스의 말에는 뼈가 존재했다.
그의 시선은 공손하게 아래를 향해 있었으나, 그곳의 많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라이너스를 힐끔거렸다.
라이너스의 표정은 한 번에 봐도 알아차릴 만큼 굳어 있었다.
“그리고…….”
일부러 말끝을 늘리던 일리어스가 고개를 드는 순간, 라이너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일리어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인서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저를 습격한 범인은 캐트샤 경으로 추정됩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라이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라이너스나 일리어스나, 일리어스를 정말 죽이려고 했던 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런데 왜 아이리스에게 범행을 뒤집어씌우려고 한단 말인가!
“카테리안느 공작님께서는 그럼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일리어스가 라이너스를 향해 물었다.
공석이니 일리어스가 공작인 라이너스에게 존대를 하는 게 옳았으나, 두 사람이 형제임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기껏 살아 돌아온 형의 말보다, 형을 해친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람의 편을 드는 것은 누가 봐도 가당치 않았다.
“……그건, 아닙니다, 형님.”
라이너스가 이를 악물면서도 한발 물러섰다.
라이너스가 범인을 명확히 알고 있거나, 범인인 게 아니라면 피해자인 일리어스가 저렇게 주장하는데 반대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이 이상 반대를 했다가는 라이너스가 최소한 범인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제 형의 죽음을 덮었다는 의심을 사기 좋았다.
그래서 라이너스는 억지로 동생다운 태도를 보였다.
“날 믿어 준다니 고맙구나, 라이너스.”
라이너스가 공작이 아닌 동생으로서 말했으니, 일리어스도 그에 장단을 맞춰 대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칼날 같은 시선이 오갔다.
그러나 일리어스는 그것을 모른 척 미소한 채로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 연유로 캐트샤 경을 구금한 뒤, 폐하의 명령을 제가 직접 받들었습니다. 미리 폐하께 고하지 못한 점, 죄를 청합니다.”
일리어스가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황실의 어느 기사단이든지 기사단장 자리에 오르려면 1년 이상 부기사단장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현재 황실 제2 기사단장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런 상황에 부기사단장인 아이리스가 잡혀갔고, 원래 기사단장인 일리어스가 돌아왔다.
일리어스가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용서, 하도록 하지.”
알렉산드로가 억지로 말을 꺼냈다.
일리어스가 알렉산드로에게 그간 얼마나 충실한 기사였는지 이 자리에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 돌아오자마자 충실하게 황제의 명령부터 수행했다는 일리어스를 벌주게 되면 알렉산드로의 평판은 땅바닥으로 처박힐 터였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일리어스가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황제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손짓하자, 2기사단의 기사가 이멜리언 백작가에서 빼앗아 온 것들을 들고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알렉산드로가 이를 갈았다.
제 2기사단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2기사단은 여전히 일리어스의 명령에 충실한 모양이었다.
“이멜리언 백작가의 비밀 별실에서 압수한 물건들입니다.”
일리어스가 압수품들 쪽으로 귀족들의 시선을 돌렸다.
기사들이 가져온 것들은 예술품부터 귀금속, 다량의 현금과 금덩이까지 귀중품으로 즐비했다.
이멜리언 백작가가 이렇게까지 부유하리라 생각해 보지 못했던 귀족들이 경악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이멜리언 백작가에 뇌물을 청탁하여 관직을 산 귀족들도 있었습니다.”
“무슨……?”
그리고 이어지는 일리어스 말에, 알렉산드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는 적어도 관직을 사고팔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역사 속에 성군으로 남기를 결벽적으로 원한 탓이었다.
그런데 황궁 내에 돈을 받고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 있다니!
알렉산드로로서는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재무부의 3급 서기관 제임스, 군부의 2급 행정관 에밀튼, 행정부 4급 보좌관…….”
일리어스가 압수 수색물 중 서류 하나를 집어 들어 이름을 나열했다.
모두 이멜리언 백작가의 친인척이거나, 친인척들과 연관이 있는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순간 알렉산드로가 매섭게 라이너스를 쳐다봤다.
이멜리언 백작가는 카테리안느의 가신 가문이 아니던가!
알렉산드로는 라이너스가 자신 몰래 딴 주머니를 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이너스 또한, 전혀 몰랐던 기색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알렉산드로와 라이너스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들은 이 일의 범인을 깨달았다.
아그네스.
그녀가 이멜리언 백작가의 뒤에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개 백작가 따위가 궁내부 관리직에 손을 대겠는가!
“아무래도 이 건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수사를 해야 할 듯싶습니다, 폐하.”
일리어스가 차분히 말했다.
알렉산드로와 라이너스는 휘몰아치는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즉위하자마자 매관매직을 성행시키는 황후라니.
이건 황실에도 카테리안느에도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깐. 카테리안느 경, 그것은 무엇이지?”
에크하르트가 원형 회의장의 가운데 놓인 수색물을 가리켰다.
그것은 굳게 닫혀 있는 보석함이었다.
“이멜리언 백작가의 집사가 빼돌리려던 것을 제가 찾아왔습니다.”
일리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의 낯빛이 점차 새하얘졌다.
이것은 이미 완결까지 모두 완성되어 있는 하나의 연극에 불과했다.
저 보석함에 무엇이 들어 있든, 알렉산드로에게 이로울 리가 없었다.
막아야만 했다.
챙!
그러나 지금까지 뜸을 들였던 것이 거짓인 양, 성큼성큼 회의장의 중앙으로 나선 에크하르트가 함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를 악력으로 망가트려 버렸다.
쾅!
“힐켄테데 대공! 내 허락도 없이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알렉산드로가 다급해져 의자의 손잡이를 내리치며 일어났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황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보석함 안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지금 감히 황제의 말을 무시하는…….”
“황제 폐하.”
에크하르트가 서류를 황제가 있는 단상을 향해 치켜들었다.
그의 키가 워낙 컸기에, 우뚝 공중에 들린 서류는 모두의 눈에 정확히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서류에는 알렉산드로가 황태자 시절 사용하던, 황태자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알렉산드로는 완전히 말을 잃어버렸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증거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와 테네이스의 사이를 밝혀낼 가장 최적의 타이밍과 장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 무례보다는…… 폐하께서 이에 대하여 해명을 해 주시는 것이 먼저일 듯싶습니다.”
황태자의 직인 옆에 찍혀 있는 것은 이멜리어 백작가 후계의 것.
즉, 테네이스의 인장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서류가 무엇인지는 그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 수 있었다.
서류는 그토록 알렉산드로가 모른 척했던, 테네이스의 불법 도박장과 알렉산드로 간의 거래 내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