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02화 (102/136)

102화. 주인(7)

파문은 일시에 일었다.

저 서류에 의하면, 황제와 이멜리언 백작이 벌인 일은 귀족들을 기만한 연극에 불과했다.

“폐하, 해명해 주십시오!”

에크하르트의 손에 의하여 서류가 회의장 내의 귀족들 손에 돌려졌다.

귀족들 사이에서 해명하라는 소리가 빗발쳤다.

서류 내용은 정확히 말하자면, 테네이스가 불법 도박장을 이용하여 불법적 자금을 세탁하고 그것을 알렉산드로에게 바친 것이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는 그 대가로 불법 도박장의 편의를 봐주었다.

그렇게 겉으로는 성군인 척하며, 방금 전까지 아그네스의 매관매직 행위에 놀랐던 것 치고는 사악한 행동이 분명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백성의 인생이 끝이 났던가.

당연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황실에서 직접 불법 도박장에 손을 대시다니요!”

운영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황실에서 불법 도박장을 용인했으니 결국 그 불법 도박장은 황실 아래 있는 셈이었다.

올곧기로 유명한 백작 하나가 기함하여 소리쳤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황제를 추국하는 장으로 변해 버렸다.

알렉산드로라고 한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이멜리언 백작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서류는 에크하르트의 손에 있었을 테니까.

그 서류를 일리어스가 이멜리언 백작가에서 발견한 척 들고 왔을 터였다.

“……그것은 위조된 것이다!”

결국, 알렉산드로가 선택한 것은 최악의 수였다.

황실의 인장을 위조한 것은 반역죄에 해당했다.

그는 자신이 위기를 벗어나는 대신, 이멜리언 백작가를 말살시키기로 한 것이다.

“황제 폐하!”

이멜리언 백작이 두 눈이 커진 채 알렉산드로를 불러 외쳤다.

자신은 제 아들까지 바쳐 황제를 지켰다!

그런데 어떻게 황제가 인제 와서 이멜리언 백작가를 이런 식으로 저버린단 말인가!

“황태자 전하의 인장을 만든 장인 루케니아 아스테로아는 일찍이 죽은 것으로 아는데요.”

에크하르트가 의문을 제기했다.

황실의 인장은 아스테로아 가문에서 대대로 공방의 수장을 맡은 이에게만 비밀리에 그 방법을 전수하여, 오직 수장의 손에서만 만들어졌다.

인장의 패턴이 복잡하고 주조하는 방식이 특이했기 때문에, 그 방식을 알지 않는 이상 똑같이 복제하기는 힘들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인장에는 당시에 그것을 만든 장인의 사인이 새겨지는데, 알렉산드로의 황태자 시절 인장을 만든 장인 루케니아는 이미 나이가 들어 죽은 뒤였다.

“글쎄, 누가 한 짓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명확한 것은 저 인장이 복제되었다는 사실이다.”

알렉산드로가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그는 마치 정말로 결백한 사람처럼 당당한 얼굴이었다.

황실의 인장이라고 한들, 인장 복제가 전혀 어려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가 저런 식으로 발뺌을 한다면 결국 모든 일을 뒤집어 쓰는 것은 이멜리언 백작가였다.

“폐하! 왜 거짓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폐하의 명령으로 제 아들까지 죽였거늘……!”

그러니 이멜리언 백작이 길길이 날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참지 못하고 알렉산드로의 만행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비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하다니!

또 다시 회의장 내 모든 이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쾅!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어딜 감히 나를 모함하는 것이냐!”

알렉산드로가 의자의 손잡이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멜리언 백작은 계속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만 꼼짝없이 죽게 생겼으니, 백작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폐하께서 제게 이러실 순 없으십니다! 저희 가문에서 폐하께 어떻게 했는…… 억!”

알렉산드로의 눈짓과 함께, 그의 옆에 서 있던 기사가 단칼에 이멜리언 백작을 베어 버렸다.

“아아악!”

“으악!”

이멜리언 백작의 피가 사방으로 튀기자, 그 근처 귀족들이 놀라 주저앉았다.

현재 대륙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그런 판에 그들이 피를 볼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심지어 그것도 황궁에서!

“황제 폐하, 저 자가 주군을 모욕하는 것을 참지 못해 폐하의 앞에서 감히 허락도 없이 검을 뽑아 들었으니 치죄하여 주시옵소서.”

검을 거둔 기사가 곧바로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귀족들은 그때까지 넋이 나가 있는 자들을 빼고는 모두 표정이 굳어 있었다.

황실 한복판에서 중앙 귀족이 재판도 없이 죽은 것이다.

알렉산드로가 마치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듯 결정을 내렸다.

“퍼글리시 경, 그대에게 정직 3개월의 처분을 내린다.”

정직 3개월.

방금 벌어진 일치고는 가볍기 그지없는 처벌이었다.

“단, 이멜리언 백작은 반역자이므로 즉결 처분이 가능하다. 그러니 살인죄는 묻지 않겠다.”

눈치가 있는 자라면 모르지 않았다.

기사의 실수나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이멜리언 백작의 살인은 황제의 명령 혹은 묵인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황제와 그의 기사가 벌이는 짓은 한 편의 촌극에 불과했다.

그것도 중앙 귀족들이 버젓이 그 앞에 눈 뜨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이 대체 기만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리 황제가 제 잘못을 덮기 위해서 한 행동이라지만 이것은 귀족들이 허용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물론, 성문법상 반역자는 즉결 처분이 가능하긴 했다.

그러나 대체로 그것은 황실과 귀족원 사이 조율이 끝난 후, 도주한 반역자들을 처분할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렇듯 막무가내로 구는 것은 이 자리의 귀족들을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폐하, 퍼글리시 경의 처분을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로이안 후작은 참지 않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알렉산드로가 엘라사나를 황후로 만들어 줄 것처럼 굴었다가 돌아선 이후로, 후작은 황제의 반대편에 서기를 감히 주저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이는 황제 폐하와 황실의 법도를 지켜 온 저희들 모두를 무시한 행동입니다.”

“퍼글리스 경의 행동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귀족 중, 라이너스를 제외한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입을 열었다.

이멜리언 백작이 그렇게 죽음으로써 이미 백작가는 반역죄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계도 없고 이제는 가주도 없는 백작가였다.

아그네스도 이멜리언을 떠나 카테리안느로 적을 옮겼고, 이멜리언 백작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라이너스는 제 친척 가문을 위하여 나서지 않았다.

즉, 이멜리언 가문의 쇠락은 정해진 셈이었다.

그러니 이멜리언 백작가는 더는 황제가 씌우는 누명에 맞설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몰락할 백작가와 황제.

어느 쪽으로 추가 기울 지는 자명했고, 그래서 아무도 이멜리언 가문을 위해 나서 주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알렉산드로가 이토록 성급하게 이멜리언 백작을 처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황제와 백작가 사이의 연관성을 증명했다.

그러니까 귀족들은 황제의 죄를 입증할 수는 없을지언정,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멜리언 백작은 중앙 귀족이다.

귀족 중에서도, 제법 권력을 가진 이였다는 말이다.

그런 자를 이토록 이용하고 쉽게 팽해 버리다니.

이런 식으로 황제가 귀족에게 누명을 씌우고 쉽게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면, 다음에는 누가 될지 몰랐다.

황제와 귀족들 사이에 불신과 앙금이 싹 트는 시발점이었다.

“퍼글리시 경을 황실과 귀족 모독죄로 엄히 다스리셔야 합니다.”

에크하르트가 때를 맞춰 나섰다.

그러자 귀족들이 하나같이 뜻을 맞춰 입을 열었다.

“퍼글리시 경을 벌하시옵소서!”

“퍼글리시 경에 대한 처벌을 더 무겁게 내려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귀족들은 어떻게든 칼을 휘두른 기사가 벌을 받게 하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이것은 황제를 향한 경고였다.

황제를 위해, 황제의 명령으론 나선 기사가 처벌을 받는다.

황제는 그런 기사를 지켜 주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어느 기사가 황제를 위해 나서려 하겠는가.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황제의 명령을 듣는 기사들의 마음에 불안감을 심어 줄 수는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두 번 다시 이딴 식으로 황제가 멋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도록, 귀족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퍼글리시 경은 반역자를 즉결 처분했을 뿐이다.”

알렉산드로는 어떻게든 기사를 비호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귀족들의 반발은 거세졌다.

“폐하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가 기사에게 눈짓하기는 했으나, 입 밖으로 말을 내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로가 일을 얼렁뚱땅 처리하기 위해 벌였던 행동을 이번에는 귀족들이 이용했다.

“기사단장도 아닌 자가 폐하의 명령도 없이 황궁에서 칼을 뽑았습니다. 이는 반역죄로 다스려도 할 말이 없는 행동입니다.”

“폐하, 처벌을 달리하셔야 합니다.”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그도 직감했으리라.

기사를 처벌하지 않는 이상, 귀족들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폐하, 저는 벌을 달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돌연, 그 기사가 알렉산드로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더 무거운 처벌을 내려 달라고 청함으로써 그 순간의 모든 대치는 끝나 버렸다.

“각오하고 한 행동이니 무슨 벌을 내리셔도 감히 그릇된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이건 귀족들이 원하던 결과가 아니었다.

황제를 압박하려던 귀족들의 의도가 무색하게도, 충성스러운 기사는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퍼글리시 경의 처분을 다시 내리겠다.”

한참의 침묵 끝에, 알렉산드로가 비통한 표정을 하고 선언했다.

“퍼글리시 경의 황실 기사직을 박탈하고, 작위를 강등한다. 그러나 그의 충심을 높이 사 기사 서임을 무효로 돌리지는 않겠다.”

퍼글리시 경의 작위는 현재 자작이었다.

자작에서 남작으로 강등되는 것은 큰 벌이었다.

그러나 기사 서임이 유효하다는 것은 언젠가 그가 황실 기사단으로도 돌아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작으로 다시 올라가지 못 하리란 법도 없었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니 황실에서의 회의가 그렇게 끝나고, 황제 몰래 귀족들 간의 회동이 열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