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주인(8)
수도 귀족들의 비밀 회동.
그것은 종종 열려 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이렇게 급하게 열렸던 적은 없었다.
그만큼, 오늘 황실에서 있었던 일이 귀족들의 분노를 샀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세작이 늘 황궁을 감시하고 있으니, 적어도 이곳에 황제가 있을 확률은 없었기에 열 수 있는 회동이었다.
그러나 비밀 회동에 참석하는 귀족들은 혹시라도 추후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외부로 발설될 경우를 대비하여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대로 황제 폐하의 만행을 두고 봐야 합니까?”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이건 엄연히 우리를 우습게 아는 행동입니다.”
붉은 가면을 쓴 여자가 대답했다.
그러자 가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의 말에 동조했다.
“결론적으로 황제 폐하께서는 이멜리언 백작가를 이용만 하고 버리셨습니다. 그것도 저희 귀족들에게는 동의도 없이, 멋대로 칼을 휘둘러서요!”
“맞습니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고 하실지라도 중앙 귀족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시다니요!”
“우리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이멜리언 백작가가 운영한 불법 도박장에서 돈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특히나 이 일에 황제가 관련됐다는 것에 대하여 더욱 분노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번 일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탕! 탕!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탁상을 가볍게 몇 번 내리쳤다.
“우선 황후 폐하의 매관매직 사건부터 처리하도록 하죠.”
알렉산드로와 이멜리언 백작가 사이의 일은 알렉산드로의 발뺌 탓에 그 잘못을 묻기가 까다로웠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로는 서류에 남은 그 인장들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증거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제를 추국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아그네스가 이멜리언 백작가를 통해 황궁 관리직을 사고판 것은 이멜리언 백작가의 황후궁 후원 내역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과 이멜리언 백작이 관리들에게 받아먹은 돈과 그 날짜를 대조하면 황후의 죄를 입증하는 것도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내일 곧바로 귀족원을 통해 황후 폐하의 부도덕한 행동에 대한 청문회 일정을 잡도록 하죠.”
“이멜리언 백작가는 황후 폐하의 친정이 아니었습니까? 카테리안느 공작가로 적을 옮기시기는 했지만, 불법 도박장에 관한 건은 그 전에 일어난 일이었고요.”
“그렇죠. 황후 폐하께서도 전혀 무관하시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귀족들 간의 대화는 착착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붉은 가면의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황후 폐하께서 상당히 허술하시더군요. 그쪽을 파 보면 불법 도박장에 관한 또 다른 증거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회의장의 모든 이들이 눈을 번뜩였다.
이제부터 귀족들은 더욱 감시의 시선에 불을 켤 터였다.
검은 가면을 쓴 남자와 붉은 가면을 쓴 여자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내걸렸다.
***
알렉산드로는 황후궁, 아그네스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이미 단단히 벼르고 왔던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요즘 대체로 아그네스와 알렉산드로 사이에는 고함만이 오갔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즉위한 지 얼마나 됐다고 매관매직을 해! 미쳤어?!”
다짜고짜 이어지는 알렉산드로의 추궁에 아그네스가 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철광석 사업에 대한 지분을 그녀가 더 가져오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아그네스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알렉산드로와 라이너스 몰래 철도 사업에도 차명으로 투자했다.
그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로 탓에 황후궁의 권력은 온전히 아그네스의 것이 되지 않았다.
황후의 인장으로 신용 보증을 서는데도 한계가 있었고, 내탕금도 앞으로 황후 노릇을 하면서 들어가야 할 꼭 필요한 비용들을 빼고는 거의 다 끌어다 썼다.
그러니 아그네스로서는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 결과 그녀가 택한 것이 매관매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그네스가 이런 일을 해 봤을 리가 없었다.
이멜리언 백작가 또한, 불법 도박장의 일은 결국 알렉산드로의 명령하에서 처리되었기에 이런 경우 해야 할 은폐에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그네스가 들키지 않았던 것은 결국, 알렉산드로가 그녀를 굳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과했다.
“말해, 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쓴 건지!”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를 다그쳤다.
오는 길에 그는 이미 이멜리언 백작가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황궁의 관리직을 사고팔았는지 이미 확인한 터였다.
알렉산드로가 굳이 신경 쓰지 않는 자잘한 관리직들은 무수히도 오갔다.
그것은 이멜리언 백작가가 관리직을 파는 도중에, 그들이 필요한 관리직을 다른 이에게서 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그네스는 비어 있는 관리직을 판 것도 모자라, 시녀나 시종 자리까지 바꿔치기를 서슴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챙긴 차익도 상당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아낼 방법은 무수하게 많아. 그러니까 빨리 말해!”
알렉산드로가 재차 소리쳤다.
아그네스가 크게 움찔했다.
그러나 그의 추궁대로 모든 사실을 토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알렉산드로가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들 테니까.
“……너를 믿을 수 없었으니까!”
분주하게 머리를 굴리던 아그네스가 마침내 말을 토해냈다.
“뭐?”
“외부에서 의원을 사서 진찰을 받았어. 너는 우리 아이가 죽든가 말든가 전혀 상관없었잖아!”
아그네스가 그간의 불안함과 불신, 그리고 그로 인한 분노를 담아 외쳤다.
그녀는 얼음꽃 차를 마시라고 하던 날, 알렉산드로가 어떤 눈을 하고 있었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것은 아이의 아버지가 보여야 할 눈이 아니라, 정치꾼의 비정한 시선에 불과했다.
알렉산드로는 순간 뜨끔했다.
그러나 아그네스의 말에 곧이곧대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그네스, 그건 네 오해야.”
그래서 알렉산드로는 한발 늦게 아그네스의 말을 부정했다.
“나도 우리 아이에 대해 신경 쓰고 있어.”
그러나 아그네스의 얼굴에 불신이 지속되자, 도리어 알렉산드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만 부모야?! 나도 부모야! 너만 아이를 위하는 게 아니라고!”
아그네스가 곧바로 반박하지 못하자, 알렉산드로는 일부러 더더욱 큰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많은 돈을 겨우 의원을 부르는 데 썼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 돈이면 사람 하나가 아니라 수십은 부릴 돈이야! 바른대로 말해!”
아그네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의 말에서 변명을 생각해냈다.
“그래, 황궁 내에 내 사람을 만드는 데 썼어! 황후궁의 시녀들조차도 일부는 널 위해 움직이는데, 나도 황궁 내에 믿고 부릴 수 있는 사람쯤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물론,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관리직을 팔면서 황후의 권한으로 그들의 편의를 봐주었다.
제 사람을 얻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애초에 아그네스에게 관리직을 사간 이들은 그 가문부터가 상당히 부유한 편에 속했다.
그들은 돈이 궁하지 않았고, 그러니 오히려 돈보다는 황후의 호의를 보여 주는 편이 좋은 관계를 쌓기에 더 쉬웠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차츰차츰 제 사람을 늘려가는 중이었다.
“……하, 네가 이렇게 권력욕이 많은 줄 알았다면, 널 황후로 들이지 않았을 거야!”
알렉산드로가 버럭 화를 냈다.
오벨리아와 권력을 양분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끌어내렸다.
그런데 그렇게 대신 택한 아그네스조차도 권력을 노리다니.
알렉산드로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 말은, 인제 와서 나와의 관계를 후회한다는 말이야?”
아그네스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물었다.
그녀의 안에서 억울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처음에 알렉산드로의 옆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로 충분했던 만족감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아그네스는 오히려 자신이 무어를 얼마나 누리려 했다고,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는 알렉산드로에 대하여 화가 치밀었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오벨리아보다 나은 게 뭐가 있다고, 내가 너를 선택했겠어?”
알렉산드로가 서늘하게 빈정거렸다.
아그네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성적이지 못한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서, 알렉산드로는 자신이 충분히 그녀를 손에 쥐고 제멋대로 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아그네스가 그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그것에 대한 알렉산드로의 수치심과 분노는 그의 이성을 잡아먹기에 충분했다.
“네가 마음대로 황궁에 들여놓은 인사들은 모조리 잘라 버릴 거야.”
알렉산드로가 냉정하게 말했다.
“알렉산드로!”
아그네스가 기겁하여 소리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렉산드로의 결정은 앞으로 있을 그녀의 평판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정치판에서는 매관매직한 황후보다 황제의 뜻대로 휘둘리는 허수아비 황후라는 것이 더욱 큰 치명타였다.
그렇게 되면 귀족들은 정치적으로 아그네스를 따르지 않을 터였다.
“절대 안 돼!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아그네스가 일방적인 통보 후 제 방을 나서려는 알렉산드로의 앞을 막아섰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정치 생명을 끝낼 수는 없었다.
그러려고 황후가 된 게 아니었으니까.
“비켜!”
알렉산드로가 다소 거칠게 아그네스를 밀어냈다.
그녀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그네스가 돌연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윽……!”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가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대로 방을 나서려고 했다.
“알렉, 배가…… 나, 배가……!”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배를 부여잡고 앉은 아그네스의 드레스 아래로, 피가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