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주인(9)
황후가 임신했다.
그 사실은 황후가 하혈함으로써 알려졌다.
그리고 모든 것은 순식간에 제국에 널리 퍼졌다.
그 후, 힐켄테데와 황실의 대치가 벌어졌다.
“황후 폐하의 음독 사건에 대하여 대공비 전하께서 참고인 조사를 받아주셔야겠습니다.”
힐켄테데로 황실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이유인즉, 황후의 하혈에 오벨리아가 건넨 얼음꽃 차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실 기사단은 감히 힐켄테데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힐켄테데의 기사들이 굳건히 타운하우스의 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황제 폐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겁니까!”
황실 기사들은 분노했다.
아무리 힐켄테데라지만, 이것은 그들의 월권행위라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지존인 황제가 소환하겠다는데, 감히 대공비가 그것을 전면으로 거부하다니.
의기양양하게 쳐들어왔다가 문전 박대당한 황실 기사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고 하실지라도, 죄 없는 귀족을 정식적인 고발도 없이 잡아가실 수는 없으십니다.”
그러나 힐켄테데의 기사들은 단호했다.
그들은 타운하우스의 입구를 모두 둘러싼 채로, 황실 기사들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단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았다.
단순히 참고인 조사였다면 이렇게 다짜고짜 기사들을 들이닥치게 하진 않았을 터였다.
아무리 황실이라고 할지라도, 단순히 참고인이라면 소환장을 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태도는 황실이 오벨리아를 대번에 황후 시해 사건의 범인으로 몰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힐켄테데는 이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물론, 힐켄테데의 병력은 주로 북부에 있었으니 황실이 밀고 들어오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힐켄테데의 기사들이 보이는 태도가 워낙 흉흉했다.
황실 기사단이 밀고 들어왔다가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향해 검을 뽑으리라.
그렇게 되면 완전히 난전이었다.
대륙은 평화에 젖어 있었고 그리하여 무력을 행사하는 일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대륙이 전시 상황에 익숙했더라면, 알렉산드로가 이멜리언 백작을 즉결 처분한 것에 대하여 귀족들이 그토록 분노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또 다시 여럿의 피를 흘렸다가는 황실도 더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북부는 힐켄테데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괜히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복수의 동반자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힐켄테데의 피를 보면, 북부가 피의 대가를 받으려 할 터였다.
그러니 결국 황실 기사단도 억지로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로 밀고 들어올 수는 없는 것이었다.
“비키십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십시오.”
한동안 계속해서 황실과 힐켄테데의 기사들이 입씨름하며 대치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창가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기가 빠른데.”
오벨리아가 말했다.
아그네스가 몰래 불러들인 외부의 의원을 통해 알아낸 결과, 아그네스가 섭취한 얼음꽃 차의 양에 따르면 앞으로도 일 주에서 이 주는 더 있어야 효능이 나타날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아그네스의 몸에 이상 신호가 나타날 줄이야.
에크하르트가 혹시라도 황실 기사단이 쳐들어올 때를 대비하여 북부에서 힐켄테데의 기사들을 더 불러놓았기에 대처는 충분히 가능했으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긴 했다.
“황제와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
“하긴, 알렉산드로의 성격에 아그네스가 벌인 짓을 알았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매관매직해서 벌어들인 돈의 출처도 캐물었을 거고.”
임산부에게 스트레스는 독약과도 같았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의 다툼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멍청한 알렉산드로.”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를 비웃었다.
그는 지금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착각하고 있을 터였다.
이게 오벨리아를 칠 좋은 기회라고 여겼고, 그렇기에 저렇게 성급하게 황실 기사들을 보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게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가 작당한 결과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계획이 성공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더욱, 그들이 오벨리아를 속이는데 한 번 성공한 전적도 있으니 더욱 그런 생각을 했을 터였다.
당장에 폐궁이 불타,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의 만행을 증명할 증인이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랬듯이 이번 일도 증인과 증거만 없으면 되니까, 알렉산드로가 쉽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에게 속은 것은 그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벨리아가 그들을 사랑하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는데, 황후의 티파티에서 일이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오벨리아가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을까?
설마, 하면서도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라면 어쩌면 저들의 아이를 내걸 수도 있다는 가정도 세워 보았다.
그랬기에 그들이 오벨리아가 혹시나 하는 선택을 했을 때, 빠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벨리아로서는 증거와 증인을 수집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똑똑똑!
그리고 마침, 에크하르트의 그림자 기사가 문밖에서 노크했다.
들어오라 허락하자, 기사는 오벨리아가 기다렸던 말을 전해 왔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원하시던 답변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기사의 말을 들은 오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의 패착이 있다면 단 하나였다.
그들은 자신의 주제 파악을 할 줄 몰랐고,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했다.
본인들이 어떻게든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를 이기리란 생각을 은연중 품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지 않았을 테니까.
“가자,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오벨리아가 기쁘게 에크하르트의 손을 잡았다.
그들을 태울 마차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그들이 갈 방향 역시 정해져 있었다.
***
“아직도 대치하고 있다더냐!”
알렉산드로가 기사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오벨리아를 끌고 오라고 한 지가 언제인데, 에크하르트가 언제 북부의 기사들을 불러온 것인지 시간만 지연되고 있었다.
그럴수록 알렉산드로가 초조해진 것은 당연했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미리 대비하지 않고서야, 황실 기사단을 막을 병력을 타운하우스에 미리 배치해 놨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폐하!”
그러나 알렉산드로가 기사를 재촉한 보람도 없이, 그의 염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의 시종장이 재빠르게 뛰어와 숨을 헉헉거리며 외쳤다.
“힐켄테데 대공가를 필두로 귀족원에서 긴급 황실 회의를 요청했습니다!”
귀족원에서는 처리해야 할 사항이 급할 경우, 모든 중앙 귀족을 대신하여 황실에 긴급회의를 요청할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는데, 긴급회의에서 의결을 표할 중앙 귀족 2/3 이상이 참여해야 회의에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회의만 열렸다가 무산되기 마련이었다.
“귀족들은! 중앙 귀족들은 누가 참석했더냐!”
알렉산드로가 다급하게 외쳤다.
참석자가 적다면, 회의를 무산시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그것이…….”
시종장이 말끝을 흐렸다.
그것만으로도, 알렉산드로는 대답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부정하듯이 시종장을 재촉했다.
“빨리 말하래도!”
“……중앙 귀족, 전원이 참석했습니다!”
알렉산드로의 불안이 뚜렷한 형체를 가진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회의장에는 시종장의 말대로 온 중앙 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힐켄테데의 편을 드는 자들만 있으면 몰라도, 모든 중앙 귀족이 이렇게 갑작스러운 회의 소집에 모이다니.
이건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오래전부터 귀족들에게 언질한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는 자신이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인제 와서 빠져나갈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이 자리에 빠진 중앙 귀족은 라이너스, 딱 한 명뿐이었다.
“예고도 없이 황실의 기사들을 보내 힐켄테데에 무력을 행사하신 점에 대하여 해명해 주셔야겠습니다, 폐하.”
알렉산드로가 들어서자마자 에크하르트가 말했다.
피해를 입거나 겁을 먹기는커녕 황실 기사들과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치한 주제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저렇게 구는 에크하르트가 알렉산드로로서는 속이 뒤틀릴 만큼 얄미웠다.
“대공비가 황후와 황손에게 해를 입혔다. 그것만으로도 대공비는 문책 받아 마땅함을 모르는가?”
알렉산드로가 에크하르트의 말에 맞섰다.
자신이 불리한 입장이라고 하여, 황제가 대공의 앞에서 지고 들어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 폐하, 제가 황후 폐하께 해를 입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오벨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황실 기사단에 끌려갈 뻔한 당사자로써 당연히 회의에 참석했다.
“제가 들은 것과는 다르군요.”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오벨리아가 말을 꺼냈다.
“황후 폐하께서 일부러 얼음꽃 차를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자중하여라, 대공비! 그럼 황후가 임신 사실을 알고도 황손을 일부러 해하였다는 것인가? 감히 일국의 황후를 모함하다니!”
알렉산드로가 불안함에 목소리를 높였다.
어떻게든 오벨리아의 말을 막아야만 했다.
“저도 그 말이 거짓이기를 바랍니다만…….”
오벨리아가 애석하다는 듯이 말끝을 늘어트렸다.
“제 무죄는 그래도 입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벨리아가 연극적인 어조와 태도로 문을 가리켰다.
“그래서, 제 말을 증명해 줄 증인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불허…….”
알렉산드로는 증인 따위 회의실에 발도 디디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황제 폐하, 대공비는 현재 황후 폐하를 모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증인을 심문하여 황후 폐하의 억울함을 밝히소서.”
돌연, 일리어스가 나서 충신인 척 알렉산드로가 거부할 수 없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