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1)
아그네스가 혼절 후 깨어나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레베카였다.
아니, 정확히는 황후의 방에 어울리지 않게 레베카 한 명만이 아그네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에필로나 영애. 내 시녀들은?”
아그네스가 자신도 모르게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봤다.
어쩐지 불길함이 등골을 타고 내달렸다.
그녀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안나! 엘시아! 마리안나!”
아그네스가 제 측근 시녀들의 이름을 불러 외쳤다.
그러나 황후의 부름에 재빠르게 달려와야 할 이들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아그네스는 오늘따라 황후궁이 더욱 싸늘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에필로나 영애, 오벨리아는…… 아니, 힐켄테데 대공비는 어떻게 되었지? 나와 우리 황손을 해칠 뻔했으니 감옥에 있겠지?!”
아그네스가 레베카에게로 달려와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물었다.
탁!
어쩐지 그 말투에는 광기조차 느껴져, 레베카가 움찔하며 털어내듯 아그네스를 떼어냈다.
“우리 대공비 전하께서 감옥에 왜 있어요?”
레베카가 눈꼬리를 치켜세운 채 아그네스에게 앙칼지게 대답했다.
아그네스는 입 안에 혀처럼 굴던 레베카가 갑자기 달라졌다는 점과 오벨리아가 감옥에 있지 않다는 점 중 무엇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어쨌든 아그네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오벨리아였기 때문에, 그녀는 레베카를 추궁하듯이 오벨리아에 대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벨리아가 해친 건 무려 황족인 황후와 황손이다! 그런데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니! 그럴 순 없어!”
아그네스가 반사적으로 제 배를 감싸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그녀가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까지 걸어가면서 위험을 감수한 까닭이 무엇이던가!
그 모든 게 오벨리아를 끌어내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레베카의 말은 지금, 그게 아무 효과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체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건 무엇인가!
심지어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조산할지도 모르는 지경까지 왔는데 말이다.
아그네스가 분노와 경악에 차서 비틀거렸다.
그러나 레베카는 그런 아그네스를 부축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아그네스는 그제야 레베카가 방금 ‘우리’ 대공비 전하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 너!”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아그네스가 화가 치밀어 레베카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방금 혼절했다가 깨어난 몸이었고, 임신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레베카는 아주 건강했으므로 그런 아그네스를 피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체통을 좀 지키세요. 꼴이 이게 뭡니까.”
레베카가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듯이 아그네스를 쳐다봤다.
“너! 오벨리아의 끄나풀이었던 거지! 그년이 날 감시하라고 한 거야!”
아그네스가 온몸으로 발악했다.
그녀는 뒤늦게야 레베카가 자신이 황후로서 연 첫 티파티에서 했던 모든 말들이 사실 오벨리아와 미리 맞추었던 것이라는 점을 눈치챘다.
“나한테 접근한 것도 오벨리아 때문이었던 거야?!”
“그럼 내가 뭐 하러 정부 따위나 하면서 수치도 모르는 당신 같은 사람의 곁에 다가갔겠어?”
레베카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오벨리아는 혹시나 아그네스가 레베카에게 해를 끼칠까 봐, 기사를 따로 붙여 준 것 외에도 레베카가 간단한 호신술도 배우게 했다.
그 가르침이 제법 혹독했던 터라, 레베카는 아그네스 같은 건 무섭지도 않았다.
“남의 남편이나 뺏어서 정부가 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우리 대공비 전하한테 그따위로 구는지.”
레베카가 혀를 끌끌 찼다.
오벨리아와 함께하다 보니, 레베카는 자연스레 그녀가 죽었다고 알려진 오벨리아 카테리안느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오벨리아는 힐켄테데 대공비 자리에 아주 잘 어울렸다.
사교계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릴수록, 레베카는 오벨리아만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레베카 또한 북부인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서, 힐켄테데가 북부의 주인이라는 것은 그녀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레베카의 자부심이 되기에 차고 넘쳤다.
아그네스를 이멜리언으로 만들어 준 사람이 오벨리아라는 것은 제국 내에서 조금만 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레베카는 아그네스가 싫었다.
짐승도 은혜는 안다.
레베카의 기준에서 아그네스는 짐승보다도 못했다.
다만 레베카는 오벨리아에게 가르침 받은 대로, 제 속내를 꽁꽁 숨겼을 뿐이었다.
오벨리아가 자신을 필요하다고 해 줬으니까.
북부인 특유의 맹목적인 충성심이 자신도 모르게 레베카에게도 발휘된 결과였다.
“아아악! 너……! 너……!”
아그네스가 발끈하여 재차 레베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레베카는 이번에도 아그네스를 쉽게 피했고, 도리어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은 것은 아그네스였다.
“몸을 아끼는 게 좋을걸? 당신 배 속에 있는 그 아이라도 없었으면, 지금 이렇게 황후궁에 머물지도 못했을 테니까.”
레베카가 빈정거리는 소리에 아그네스의 두 눈이 커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 모르는구나? 당신이 잠든 사이에, 당신이 임신 사실을 알고도 우리 대공비 전하를 겁박하기 위해서 황손을 해할 수 있는 얼음꽃 차를 일부러 마셨다는 사실이 모두 밝혀졌거든.”
레베카는 오벨리아가 아그네스에게 전달하라고 한 사실들을 아그네스에게 털어놓았다.
레베카는 아그네스에 대한 존칭을 생략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어차피 아그네스를 모시던 측근 시녀들은 제 주인의 몰락을 알자마자 각자의 패물을 챙겨 휴가를 핑계로 모조리 궁을 떠난 지 오래였다.
“내가…… 스스로, 나와, 내 아이를…… 해쳤다고?”
아그네스가 레베카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그네스는 알렉산드로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레베카의 말은 마치 아그네스가 스스로 모든 일을 꾸민 것처럼 들렸다.
“매관매직을 저지르고, 대공비 전하에 대한 투기로 제 아이까지 해치려 든 악독한 여자. 지금 그게 당신 평판이야, 아그네스 이멜리언.”
레베카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조목조목 사실을 짚어 주었다.
“이건……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시작한 게 아니라고!”
아그네스가 자신도 모르게 억울하여 소리쳤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분명히 알렉산드로였다.
심지어 처음에 거부하는 아그네스에게 얼음꽃 차를 마시기를 억지로 강요한 것 또한 알렉산드로였다.
그런데 왜 알렉산드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아그네스만이 악독한 여자가 되어 있단 말인가.
아그네스는 그저 억울했다.
오벨리아를 이기기 위하여 자신 또한 결국 알렉산드로의 선택에 동조했던 것은 아그네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나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다! 똑바로 불…….”
“아, 맞다. 당신 이것도 모르지?”
레베카가 아그네스의 발악을 다소 연극적인 어조로 끊어냈다.
아그네스는 또 다른 무언가가 남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혼절했다가 깨어난 이후로 내내 그랬듯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라이너스 카테리안느가 당신을 파문했어.”
“뭐……!”
“황제가 당신의 아이를 평민의 아이로 만들 수 없다며, 당신을 이멜리언 백작가에 다시 입적시켰고.”
론체스터는 다른 나라처럼 노예 제도도 없었고, 이멜리언 백작이 급사해 버리면서 사건도 급하게 마무리된 덕에 이멜리언 백작가는 그 성만은 귀족 계보에서 지워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성만 남아 있다 뿐이지, 모든 재산이 국고에 압수당하였고 황실에 지은 죄로 100년간 정계 출입도 금지되었다.
사실상 알렉산드로는 한 가문을 잔인하게 몰락시켰다는 말을 피하면서, 이멜리언 백작가가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도록 만든 셈이었다.
그런 판국에 아그네스를 다시 이멜리언 백작가로 입적시켰다는 것은 알렉산드로가 공식적으로 그녀를 버리겠노라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말도 안 돼! 아냐! 난 카테리안느야! 나는 이멜리언이 아니라고! 나는 이 나라의 황후고, 나는 아그네스 카테리안느야!”
와장창! 쾅! 쿵!
아그네스가 협탁과 테이블, 장식장 등을 가리지 않고 마구 쓸어 던졌다.
그녀는 혼절하는 순간, 알렉산드로의 말대로 드디어 오벨리아를 완전히 끌어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는 사이에 끝장이 난 것은 아그네스, 바로 자신이었다!
이딴 사실을 어떻게 당연하게 받아들이겠는가!
“황후는 황후지. 당신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어쨌든, 당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의 집행을 미루기로 했거든.”
레베카가 조곤조곤하게 사실을 늘어놓았다.
그 우아하고 유려한 말씨가 짐짓 오벨리아를 연상시켰다.
“비록, 당신의 아이는 정부 시절 가진 사생아라는 게 증명되어서 황위 계승권은 절대 못 갖겠지만 말이야.”
“아아아악! 오벨리아!”
아그네스의 광기 어린 눈이 순간 레베카를 향했다.
그녀의 눈에 레베카의 모습이 마치 오벨리아처럼 보였다.
손짓, 말투 하나하나 레베카의 품행이 오벨리아와 비슷하게 보인 탓이었다.
“으윽……!”
그러나 레베카에게 달려들던 아그네스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는 수밖에 없었다.
아그네스가 깨트린 수많은 것 중 하나의 조각이 그녀의 두 발에 파고들어 피가 흘렀기 때문이다.
“죽여 버릴 거야.”
아그네스가 고통으로 인해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중얼거렸다.
레베카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아그네스의 두 눈은 정상적인 사람의 것이 아니라, 광인의 것이었다.
“그래 봤자, 당신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이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뭐…… 아이를 낳고 나면, 이 궁에도 못 있겠지만 말이야.”
전해야 할 말을 다 전달한 레베카가 방을 나섰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탁.
레베카가 나가고 문이 닫힌 뒤에도, 아그네스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홱, 고개를 든 아그네스가 순간 안광이 번뜩이는 두 눈으로 닫힌 문을 노려봤다.
“오벨리아, 알렉산드로, 라이너스……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와장창!
바닥에 떨어진 찻잔을 아그네스가 닫힌 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끝내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