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2)
아그네스가 유폐된 후, 황실은 매우 난감해졌다.
조만간 건국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건국제를 맞아 제국의 영지 중 네 곳을 시찰하고 사절들을 맞이해야 했으므로, 건국제의 준비는 대체로 다른 황족이 맡는 편이었다.
그리고 주로 그 역할은 황후가 했다.
론체스터 제국에서 황제와 황후의 즉위가 항상 같이 이루어졌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황실의 안살림을 도맡아야 할 황후가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알렉산드로에게 다른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황제가 맡기에는, 선황제가 황제를 보조하는 꼴이 되어 자칫하면 황실이 우스워질 수 있었다.
물론, 그간 론체스터 황실에 이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럴 때는 주로 귀족 가문 중에서도 고위 귀족에 해당하는 귀부인이 건국제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수도에서 가장 지위와 명성이 높은 귀부인은 단 한 명이었다.
오벨리아.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던 셈이었다.
그에 대하여 알렉산드로는 고민이 많았다.
오벨리아가 무슨 수작을 벌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건국제의 책임자로 오벨리아를 발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크하르트를 위시한 귀족들이 모조리 오벨리아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를 불러들였다.
그녀를 책임자로 임명하는 것과 동시에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오벨리아의 정체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알현실 안의 모든 이를 물려 둔 터였다.
그래서 알렉산드로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벨리아, 혹시라도 내가 황궁을 비우는 동안 허튼짓을 할 생각이라면 접어 두는 게 좋을 거야.”
“허튼짓이라니. 무슨 소리이신지 모르겠군요, 황제 폐하.”
그러나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의 말을 모른 척 시선을 내리깐 채 조곤조곤히 말을 이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황실에서 노골적으로 힐켄테데를 견제하셔 봤자, 좋을 것이 없을 텐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오벨리아는 선황제가 전 힐켄테데 대공을 버린 것이 선황제가 한 가장 멍청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전 힐켄테데 대공의 일기장을 보며 알게 된 것인데, 그녀는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사람이었으니까.
힐켄테데 사변이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도, 적어도 에크하르트 또한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지 않았을 터였다.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어머니를 많이 사랑했으므로.
“그렇지 않아도 북부의 장로와 가신들이 당장에라도 귀족원을 통해 황실을 고발하겠다는 것을 제가 애써 무마시킨 것을 황제 폐하께서도 모르시지 않겠지요.”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에크하르트의 추천을 끝내 거부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
‘황실에서 영광된 일을 맡겨 주신다면, 제 아내의 서운함이 조금은 가시지 않겠습니까.’
오벨리아를 추천하며 에크하르트가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은 즉, 황실에서 신뢰를 보임으로써 오벨리아를 황족 시해죄로 몰아가려던 것이 황후의 독단이었음을 증명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알렉산드로는 그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후의 매관매직과 자작극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수도의 모든 티 룸은 오벨리아의 손아귀에 있었고 그곳의 고용인들과 귀족들은 귀가 밝고 입도 가벼운 자들이 많았다.
레베카는 일이 끝난 후 북부로 돌아가, 이 사실을 북부의 사교계에 풀어놓았다.
수도와 북부에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니 남부와 동부, 서부에도 이야기가 닿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애롭고 완벽했던 전 황태자비, 오벨리아 카테리안느가 죽고 나서 기껏 그녀의 사촌 자매를 황후에 올리더니, 그 황후가 저 지경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는 제국이 알렉산드로보다도 사랑하던 황태자비가 아니었나.
알렉산드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 황실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모두 오벨리아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수치도 모르고 제 죽은 사촌 자매의 남편을 탐한 아그네스를 욕하는 것은 그저 귀족들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아그네스가 백성들의 호감을 얻도록 황후 즉위식 때 청렴한 황후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수를 썼으나, 그조차도 실패하지 않았던가.
황실에 대한 나라의 민심이 흉흉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 판국에 북부가 황실을 고소한다?
이때다 싶어 황실을 같이 뜯어먹으려고 들 하이에나들은 언제나 득시글거렸다.
그러니 자리 하나를 내어줌으로써 북부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다면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짐이 노파심에 괜한 말을 했다면 미안하군.”
결국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더없이 굴욕적이었다.
이것은 그가 그리던 황제의 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제왕은 후안무치라고 하지 않던가.
근데 이게 어딜 봐서 제왕의 모습이란 말인가!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가르디아와 엔키에테르, 로후아칸 그리고 르디미엘라를 시찰하시게 되었다지요.”
오벨리아는 황제의 사과를 가볍게 넘겨 버렸다.
사과조차도 무시당한 알렉산드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제법 거리가 있는 곳들이니, 아무래도 일찍 출발하셔야겠군요.”
오벨리아가 말한 영지들은 각각 남부와 서부, 동부 그리고 북부에 있는 것이었다.
대체로 그간 론체스터의 역대 황제들이 고생하지 않기 위해 수도 근처 영지 5곳만 대충 돌던 것과는 달랐다.
영지들은 각 지방의 끝자락에 위치했다.
즉, 아무리 빠르게 길을 간다고 해도 결국 각 지방을 한 번씩은 가로질러야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알렉산드로의 일정은 건국제의 시작 전날에나 수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오벨리아가 미소하며 감히 황제의 허락도 없이 고개를 들어 알렉산드로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간이 제법 기니…… 황제 폐하께서 다녀오시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테니까요.”
순간, 알렉산드로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흘렀다.
단순히 건국제를 준비하고 꾸미느라 그로 인해 바뀐다는 이야기일 리는 없었다.
오벨리아가 말하는 변화는 분명, 그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은 방향일 터였다.
“저는 꼭, 그 모습을 폐하의 두 눈으로 확인하셨으면 좋겠군요.”
오벨리아의 웃음은 더없이 아름답고 우아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것은 알렉산드로가 사고 따위로 편안하게 죽는 일 따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섬뜩한 선언이었다.
“……황궁에 선황 폐하께서 계실 터이니, 혹시라도 대공비가 힘든 점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뵈어도 좋다.”
알렉산드로는 제 아버지를 끔찍이 싫어했으나, 결국 그가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선황제뿐이었다.
선황제가 황궁에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가 제멋대로 행동할 일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폐하의 사려 깊은 말씀, 감사히 되새기겠습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마치 알렉산드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눈앞의 그녀가 지긋지긋하게 미웠다.
그러나 동시에, 알렉산드로는 생각했다.
아그네스가 아니라 오벨리아가 황후였더라면, 자신이 이 지경에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실제로 알렉산드로의 권력은 도리어 황제인 지금보다 오벨리아가 있던, 황태자 시절이 더욱 공고했다.
선황제가 괜히 일찍 알렉산드로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오벨리아에게 더 말을 걸고 말았다.
“근래 들어 대공과 대공비의 사이가 꽤 좋더군.”
내내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던 오벨리아의 표정이 처음으로 이상해졌다.
알렉산드로가 자신을 불러들이리라는 것쯤은 그녀도 예상한 터였다.
그 이유에 견제와 경고가 있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왜 갑자기 에크하르트와 자신의 사이를 알렉산드로가 언급한단 말인가.
“대공과 그대 사이는 정략혼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야.”
커티스를 걸러내기 위한 연극이 끝난 이후,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는 쭉 일부러 그들의 사이가 좋은 것처럼 굴어왔다.
둘 사이의 다툼이 있어도, 그것을 단 한 번도 외부로 티낸 적은 없었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강제로 휴식을 권했던 일주일도, 오히려 그가 그녀를 전보다 더욱 자주 찾았기에 흉흉한 소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알렉산드로가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에크하르트와 저는 연애 결혼을 했습니다만, 폐하.”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의 말을 부정했다.
진실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모두가 대체로 대공 부부가 연애 결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그러나 알렉산드로 역시 오벨리아의 말을 부정했다.
“힐켄테데 대공은 그대의 취향이 아니지 않나?”
순간 오벨리아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머리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말 그대로 뇌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알렉산드로가 스스로를 염두에 두고 저딴 말을 꺼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 탓이었다.
에크하르트와 알렉산드로는 두 사람 다 검은 머리칼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단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생김새로만 봐서는 어떻게 에크하르트를 선황제의 사생아로 착각할 수 있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다만 외탁하는 경우도 있었고, 정황상 의심할 여지도 충분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알렉산드로는 근육이 있더라도 늘씬한 느낌이지만, 에크하르트는 그 뼈대부터가 남달랐다.
에크하르트는 여자나 남자를 구분할 것 없이 키가 크고 제법 체격이 있는 북부인 중에서도 더욱 뛰어나게 눈에 띄는 편이지 않던가.
또, 알렉산드로는 피부가 하얬고 반면에 에크하르트는 피부톤도 어둡고 전장을 도느라 많이 탄 편이었다.
심지어는 미성에 가까운 알렉산드로의 목소리와 달리 에크하르트는 중저음이었다.
두 남자는 여러모로 달랐고, 사실 그래서 알렉산드로가 이상형이라면 에크하르트는 그 정반대에 있는 것이 맞았다.
“폐하, 무언가를 착각하시나 봅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