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3)
“착각?”
알렉산드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물론, 오벨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제 남편은 완벽히 제 이상형에 부합합니다만.”
제 남편.
당연히 그것은 에크하르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이제는 오벨리아와 알렉산드로가 생판 남에 불과하며, 그녀의 사람이 에크하르트와 알렉산드로 중 누구인지를 명확히 구분 지었다.
쾅!
알렉산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옥좌의 손잡이를 내리치며 일어났다.
알현실이 시끄럽게 울렸다.
“하……? 그럴 리가……!”
알렉산드로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부정했다.
그는 오벨리아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며 어떻게 자신을 사랑했던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의 이상형이 에크하르트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올곧고 그른 것을 외면하는 법이 없으며 제 사람들을 쉽게 버리지 않고 누군가를 속여 이득을 취할 생각도 하지 않지요.”
오벨리아의 말에 알렉산드로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귀족쯤 되면, 본인의 외모에도 상당한 관리와 돈을 들이게 된다.
시간과 자금이 넘쳐나는 이들이 대체로 외모를 가꾸기 더 쉬운 것은 당연했다.
오벨리아는 그중에서도 귀족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카테리안느 가에서 태어나 사랑받아 온 막내딸이었다.
그 막내딸이 얼마나 예쁜 것들만 보며 살아왔겠는가.
솔직히 그녀에게 외모 취향을 논하라고 한다면, 그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휘황찬란한 것투성이인데, 그 중 예쁘기만 하고 속은 빈 것과 예쁜데 속까지 완벽히 찬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후자가 아니겠는가.
“누구와 달리, 제 남편은 완벽한 제 이상형이랍니다.”
오벨리아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알렉산드로가 아득 이를 가는 소리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알현실에 선명했다.
그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분노한 얼굴만을 하고 있든 말든, 오벨리아는 제멋대로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제 남편이 저를 기다려서요.”
실제로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를 황제궁 밖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알렉산드로가 무슨 짓을 할지 걱정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잠깐……!”
알렉산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벨리아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단상 아래로 빠르게 내려왔다.
그러나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제게 닿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추태를 보이지 마십시오, 폐하.”
오벨리아의 두 눈은 한없이 싸늘했다.
그녀의 시선이 알렉산드로로 하여금 그 자리에 못 박히게 만들었다.
침착하게 경멸하는 그 두 눈.
그것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던 그녀로부터는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오벨리아는 그대로 알렉산드로를 멈춰 놓은 채 소리도 없이 우아하게 걸어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조용히 알현실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알렉산드로에게 새삼스럽게 한 가지 사실이 와 닿았다.
그를 향한 오벨리아의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그럴 리가 없어.”
그리고 어쩐지 알렉산드로는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오벨리아가 떠난 뒤, 알렉산드로는 선황제에게 불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분명 그가 유폐를 명했던 아그네스가 이미 와 있었다.
“아그네스, 네가 어떻게……!”
알렉산드로가 두 눈에 불을 켜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오벨리아와의 일로 기분이 확 나빠져 있던 터였다.
그런데 아그네스가 또 제멋대로 황후궁을 탈출했다고 생각하니 알렉산드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것 같았다.
“내가 불렀다.”
그러나 아그네스가 어떤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선황제가 먼저 알렉산드로의 분노를 끊어 놓았다.
“선황 폐하……! 아무리 폐하시라지만……!”
알렉산드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제 명령을 둘이서 작당하여 어기다니.
이 나라의 황제는 자신이었다.
선황제도 아그네스도 아니고, 자신이 가장 높은 권력자여야 했단 말이다.
그러나 선황제는 또 다시 알렉산드로의 말을 끊을 뿐, 그의 분노 따위 개의치 않았다.
“이 내가 아그네스 이멜리언 하나 불러들이지 못할 위치더냐?”
선황제의 어투는 그다지 높지도 않았고 차분했으나, 그 안에는 분명 싸늘함이 들어 있었다.
선황제는 말 한 마디로 알렉산드로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감히, 제게 덤비지 말라고.
알렉산드로의 입이 다물렸다.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황제는 알렉산드로에게 모든 권력을 물려주지 않았다.
게다가 근래 일어난 여러 일을 통해 현 황제와 황실에 대한 귀족과 백성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권력인 선황제와 맞설 힘이 알렉산드로에게는 없었다.
선황제에게서 떨어지는 권력의 콩고물이라도 더해야, 그나마 위태로운 황제 자리가 멀쩡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야기만 끝나고 나면 금방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 괜한 감정 소모는 하지 않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제 폐하.”
아그네스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말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마치 그것이 아그네스가 더욱 자신을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래서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의 쪽을 일부러 바라보지 않고 선황에게 물었다.
노골적인 무시였다.
그는 제 권력이 흔들리는 이 모든 상황이 그녀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그네스가 한 매관매직 때문에 그사이에 황궁에 첩자가 많아졌다.
그녀의 진짜 주치의가 누구였는지 새어나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엘라이던의 증언에 신빙성을 더해 준 패물들 또한, 아그네스가 직접 외부로 유출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는 그녀가 그딴 짓들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은 완벽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황후가 할 말이 있다더구나.”
황후.
선황제의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오는 순간, 알렉산드로는 비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그네스를 단 한 번도 황후로 존중한 적이 없는 선황제였다.
그런데 대체 그녀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길래 돌연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황제가 고갯짓하자 마침내 아그네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알렉산드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스스로 황후 자리에서 내려오겠습니다.”
아그네스가 스스로는 절대 하지 않을 것 같던 말을 입 밖으로 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녀가 악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어쨌든 아이까지 가진 알렉산드로의 아내였다.
그는 그런 여자를 폐위시켜서 매정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아그네스가 스스로 황궁을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황후 자리를 알아서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알렉산드로도 이야기조차 꺼내 보지 않은 것이었다.
‘저 욕심 많은 여자가 어쩐 일로.’
순간 놀라서 커졌던 알렉산드로의 표정이 재빠르게 갈무리되었다.
그의 안에 의심이 무럭무럭 싹틔웠다.
아직은 아그네스가 무슨 수작으로 저러는지 알 수 없었으니, 놀라거나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 탓이었다.
“단, 제 요청 하나만 들어주신다면요.”
“그럼 그렇지.”
아그네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알렉산드로가 빈정거렸다.
제 예상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그가 불신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제 요청은 황실에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가 방금 전 그러했듯이, 아그네스 또한 그를 철저히 무시했다.
“건국제에 마지막으로 황후로써 그 자리에 서게 해 주십시오.”
“허튼소리……!”
알렉산드로가 단박에 아그네스의 말에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그녀가 또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공식적인 석상에 아그네스를 세운단 말인가!
“알렉산드로!”
그러나 이번에도 선황제가 알렉산드로를 강제로 자중시켰다.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알렉산드로의 이름을 외친 선황제의 시선이 아그네스에게 향했다.
알렉산드로의 반응 따위 개의치 말고 말을 이으라는 것이었다.
“대신, 건국제에서 제 손으로 오벨리아를 처리하지요. 제 시녀가 자신이 과한 충성심으로 그런 짓을 했다고 자백할 것이며, 저는 아랫사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것에 책임감을 느껴 스스로 물러나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그네스의 말이 이미 준비해 온 것처럼 매끄럽게 이어졌다.
알렉산드로는 그제야 선황제가 아그네스를 유폐된 궁에서 꺼내 준 이유를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아그네스가 이런 말을 할 줄 선황제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아그네스는 일부러 이 이야기를 알렉산드로가 아닌 선황제에게 흘렸을 테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이미 선황제와 아그네스 사이 짝짜꿍이 전부 이루어진 상태에서, 알렉산드로를 이 자리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만 하게 한 것이다.
“널 위해 그렇게 움직일 시녀가 있다고? 지금 네게 뭐가 남아서? 그리고 네가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가 있는데?”
알렉산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따지듯이 말을 쏟아냈다.
선황제와 아그네스가 자신이 없는 사이 이미 말을 끝내 놓은 것부터, 아그네스가 오벨리아를 죽이기로 했다는 것까지 모조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를 죽이든 살리든 그것은 제가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제 것이었으니까.
“오벨리아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에 대한 복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아그네스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것은 일종의 광기였고 증오였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는 크게 틀린 것이 없었다.
아이조차도 황위 계승권을 못 받게 생긴 판에, 아그네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선황 폐하와 황제 폐하는 제 마지막 발악을 그저 모른 척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그네스가 조곤조곤히 말을 덧붙였다.
선황이 더는 토를 달지 말라는 듯, 알렉산드로에게 손짓했다.
“너는 건국제 준비나 제대로 하도록.”
알렉산드로가 아무리 다른 말을 꺼낸들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결국, 그 자리는 그의 의견은 단 한 점도 들어가지 않은 채 마무리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