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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11화 (111/136)

111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6)

응접실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 오벨리아는 확신했다.

그 사람은 그녀가 찾던, 아그네스의 신분을 밝혀 줄 완벽한 증거 그 자체였다.

“……!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있던 상대가 오벨리아를 발견하고 놀라 자리에서 바르게 일어났다.

누가 봐도 아그네스의 아비라고 할 만큼 똑같이 닮은 얼굴이 오벨리아를 향해 바닥까지 고개가 닿을 만큼 허리를 숙였다.

“앉게. 내게 해 줄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다고.”

오벨리아가 자리를 권하며 남자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에크하르트 또한 그녀를 따라 옆에 앉았다.

오벨리아가 비쩍 마른 남자를 위해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그에게로 밀어주었다.

“먹으면서 이야기해도 되네. 그대, 이름은 무엇인가?”

남자는 그간 제대로 먹고 다니지 못했는지, 오벨리아의 눈치를 보다가 허겁지겁 음식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마티어스라고 합니다. 성은 평민이라 없고요.”

마티어스는 아예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닌지, 먹고 있는 것을 대공비의 쪽으로 튀게 하지 않으려 조심히 말을 꺼냈다.

“그러면 아그네스를 아는가?”

“아그네스요……?”

마티어스는 아그네스의 이름을 듣고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아그네스가 이름까지 바꾼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오벨리아가 준비해 둔 초상화를 내밀었다.

쾅!

“제 딸년입니다!”

마티어스가 순간 분노가 차오른 얼굴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 고얀 년이 병든 아비를 버리고 달아나서는……!”

“언행을 신중히 하도록.”

마티어스의 거친 언사에 에크하르트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오벨리아의 앞에서 욕설이라니.

에크하르트의 시선이 짓누르듯 마티어스를 향했다.

그러자 곧바로 움찔하며 수그러든 마티어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것이, 불효막심한 딸을 보니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서 그만…….”

마티어스가 다급하게 변명했다.

에크하르트는 매서운 기색을 거둬냈지만, 제가 수하를 시켜 데려오긴 했어도 어쩐지 눈앞의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지?”

“매리라고 합니다.”

마티어스가 힐끔힐끔 에크하르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매리.

평민 중 열에 셋은 있을 만큼 흔한 이름이었다.

“매리, 고것이 무슨 일을 벌인 모양이지요? 하여간 그건 옛날부터 잔꾀와 욕심만 많아서…….”

마티어스의 말투에서 아그네스를 향한 애정이라고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벨리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가 아그네스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보통의 부모가 딸을 이렇게 여기던가를 생각해 보면 무언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오벨리아나 에크하르트에게 비굴하리만치 정중하던 것과는 달리, 마티어스의 말투에는 아그네스를 향한 업신여김이 담겨 있었다.

“아그네스, 아니…… 매리는 자신을 망국의 왕녀라고 했다. 실제로 왕녀의 표식을 지니고 있기도 했고. 이게 왜 가능했을지, 그대 아는 것이 있나?”

오벨리아는 애써 싸한 감각을 밀어놓고 마티어스에게 물었다.

“……그것이.”

그런데 지금까지 말을 잘만 있던 마티어스가 갑자기 말 끝을 흐렸다.

“제게 왜 이런 질문들을 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돌연 부성애가 들기라도 한 것일까?

마티어스가 주저하며 오벨리아에게 물었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말을 덧붙였다.

“저는 그저, 따라와서 묻는 말에 답을 해 주면 사례를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지라…….”

마티어스의 두 눈이 힐끔힐끔 여기저기를 살폈다.

마치 오벨리아나 에크하르트의 손 혹은 주머니 등에 무언가 들린 게 없는지를 살피는 모양새였다.

그로 인해 마티어스의 의도를 파악한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에크하르트가 설렁줄을 당겨 시종을 불러들였다.

“금화를 챙겨 오도록 해.”

에크하르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티어스의 두 눈이 반짝이며 빛났다.

동화나 은화도 아니고 금화였다!

마티어스의 입꼬리가 주체할 줄 모르고 씰룩거렸다.

그는 오벨리아나 에크하르트의 앞이 아니었다면 크게 웃어 젖히기라도 했을 모양새였다.

그것을 보는 오벨리아의 기분은 점차 기묘해졌다.

낯선 타인이 아그네스에 대해 묻는 데도 순순히 따라올 때부터, 사실 마티어스가 어떤 인간인지는 정해진 셈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딸을 팔아넘기며 돈을 챙기는 것에 대한 행위에 전혀 거부감도 없고 오히려 좋아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자니…… 속이 썩 좋지는 못했다.

“네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내놓을 때마다 하나씩 주지.”

곧, 집사가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잔뜩 들고 왔다.

에크하르트가 그것 중 하나를 집어 들어 마티어스의 쪽으로 건네며 말했다.

마티어스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주머니는 하나하나가 모두 제법 묵직해 보였다.

어림잡아도 한 주머니당 만 골드는 넘어 보였다.

주머니 하나만 해도 마티어스가 스스로 벌어서는 평생을 만질 일 없는 거금이란 뜻이었다.

“그년, 아니…… 매리가 평민치고는 제법 똑똑한지라…… 어느 날 제게 상의도 없이 왕실의 하녀로 들어가는 시험을 본 후 합격하여 짐을 싸 들고 도주했습니다.”

마티어스가 그때의 일을 떠올렸는지, 다시 약간의 분노에 찬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내가 지를 위해 특별히 남작님의 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손까지 써 놨건만…… 은혜도 모르는 년 같으니…….”

남작의 첩, 은혜.

우연치 않게 들려오는 단어들에 오벨리아는 또다시 기분이 불편해졌다.

아그네스가 미운 것과는 별개로 어느 한 여자의 삶에 겨우 그런 것이 은혜가 된다니.

모두가 자신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오벨리아는 그저 그러려니 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아그네스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남작님께서 매리의 그 반반한 얼굴을 아쉬워하셔서 직접 수소문하셨으나, 찾지 못하신 것으로 아니까요.”

오벨리아는 그 남작 또한 그다지 대단한 귀족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고작 이름 하나 바꾼 것으로 사람을 찾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왕국에서 평민들의 출생이나 이름을 일일이 깐깐하게 관리하지도 않았으니, 관리들에게 조금만 돈을 쥐여 주면 이름을 바꾸는 건 쉽거든요. 고것이 번 돈은 모조리 제게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어떻게 빼돌린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아그네스의 왕국이 평민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전쟁에 차출할 인력이 필요할 때뿐이었다.

아마 론체스터 제국의 황위 전쟁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도, 왕국은 언젠가 필연적으로 망했을 터였다.

높은 자들은 때로는 그 세상에 자신들만 있으면 되는 줄 알지만- 사실 나라를 아래에서부터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것은 그들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었으니까.

“그 후에는…….”

마티어스가 또다시 말끝을 늘어트렸다.

정보 하나를 전달했으니, 그 다음 대가를 달라는 것이었다.

에크하르트가 혀를 차며 금화 주머니를 마티어스의 쪽으로 던졌다.

마티어스가 말하는 내내, 그 딸을 얼마나 착취해 먹었을지가 드러났다.

그 때문에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져 마티어스와는 손끝 하나 닿고 싶지 않았다.

“큼, 크흠…… 그 후에는, 왕실의 하녀로서 꽤 일을 잘해 특별히 시녀로 승진하기까지 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그대가 어떻게 알지?”

오벨리아가 물었다.

남작 또한 사라진 아그네스의 소재를 알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평민인 마티어스가 아그네스의 일을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의심할 만했다.

“그……것이…….”

마티어스가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말을 망설였다.

그가 대가를 더 원한다고 생각한 에크하르트가 냉정하게 말했다.

“지금도 지나치게 후한 대가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과한 욕심을 부리지 마라.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모르니.”

“그것이 아니오라……!”

마티어스가 화들짝 놀라 부정했다.

확실히, 그는 에크하르트를 무서워했다.

“……매리, 고것의 방에서 왕실의 하녀 시험을 준비하던 흔적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남작에게 고하지 않았지? 평민이 남작을 상대로 거짓 혼인을 말하는 것 또한 벌을 면할 수 없었을 텐데, 협조라도 하지 않고.”

“저희 왕국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일부일처제이고, 첩을 들이는 것은 불법인지라 남작님께서 저를 대놓고 벌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또 저를 벌주시기에는, 남몰래 첩을 들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남작 부인에게 들켜 눈치를 보고 계셨고요. 천만다행이지요. 무엇보다 남작 부인이 일을 크게 만들지 않길 바라셨으니까요.”

귀족 중에는 체면을 중시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남편이 첩을 몰래 들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굳이 그것이 밝혀져 가문의 체면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귀부인은 얼마든지 많았다.

“무엇보다…… 왕실의 하녀를 고작 지방 남작의 첩으로 보내기에는 아깝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론은, 아그네스를 더 비싼 곳에 팔아먹기 위하여 남작에게 입을 다물었다는 소리였다.

왕실에 드나드는 귀족들은 지방의 한미한 남작보다 훨씬 뛰어난 이들이 많았으니까.

그런 이들에게 아그네스를 팔아넘기듯 시집보냈다면, 마티어스가 받을 수 있는 돈은 당연히 더 커졌을 테고.

마티어스에게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는 정말 절대 좋은 아비가 아니었다.

그에게 아그네스는 한낱 장사 밑천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그네스가 매리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나?”

오벨리아는 더는 마티어스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졌다.

아그네스에게 아무리 불우한 과거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녀가 오벨리아에게 저지른 짓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오벨리아는 이 이상 아그네스에 대하여 괜한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있습니다.”

마티어스가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이 금화 주머니로 향하자, 에크하르트가 다시 금화 주머니를 던져 주었다.

그러자 마티어스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매리의 오른쪽 종아리에 커다란 화상 자국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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