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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12화 (112/136)

112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7)

라이너스는 요즘 내리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런, 라이. 오늘도 잠을 제대로 못 잤나 보구나.”

아침부터 식당에서 라이너스를 기다리고 있던 일리어스가, 저택에 온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형님.”

그래서 라이너스는 괜찮은 척하면서도 내리 신경을 갉아 먹히는 기분이었다.

라이너스는 그간 원로들과 가신들을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오벨리아가 살아 돌아왔고, 그녀와 단둘이 대면했던 이후로 라이너스는 제 여동생이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오벨리아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을 데려갔으니, 라이너스에게 훗날 타격이 오리란 것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라이너스는 제 가족들을 더는 믿지 않았다.

제가 아비를 죽인 마당에, 누가 누구를 믿는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일리어스가 돌아와 공작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우선, 황제인 알렉산드로가 라이너스의 편이었다.

게다가 현재 카테리안느의 기사단은 라이너스의 심복인 로빌로트가 이끌고 있었다.

거기에 가신들도 절반 이상은 라이너스의 편이었고, 정당한 후계자인 일리어스를 위해 부당한 공작위 승계에 대하여 정계에서 싸워 줄 카테리안느 공작도 더는 없었다.

그러니까 일리어스가 자신의 자리를 되찾겠다 수작을 부려도, 라이너스는 어떻게든 악착같이 제 자리를 지켜낼 생각이었단 말이다.

“아니기는, 아무래도 의원을 만나보는 게 좋겠다. 눈 밑이 시커멓지 않니.”

그런데 일리어스는 저택에 돌아온 지 일주일 째, 내리 이렇게 사람 좋은 형님 역할만 하고 있었다.

심지어 공작가의 일에 조언을 해 주겠다고 하더니, 일리어스는 진짜로 조언만 할 뿐이었다.

그는 마치 공작의 일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더는 라이너스의 결정에 참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리어스의 조언은 정말 잘 가르치는 선생님 같아서, 실제로 라이너스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라이너스의 편을 들지 않았던 가신들도 얌전히 라이너스를 잘 따르고 있었고 말이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어쨌든 일리어스가 좋은 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으므로, 라이너스 또한 그에 장단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또 라이너스의 신경을 건드렸다.

서로 당장이라도 검을 겨누어도 모자랄 판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서로 염려하는 척이나 주고받고 있어야 하는지 짜증이 치밀었다.

잠자리에 들 때조차, 날이 잘 선 칼을 머리맡에 세워 두고 자는 것처럼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일리어스는 라이너스보다 무력으로 한참 위였다.

그런 일리어스가 언제 밤에 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곤두선 라이너스가 푹 잠에 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어쩌면 일리어스가 자신을 말려 죽이려고 이러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라이너스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형님, 아버지의 묘에는 언제 가 보실 예정이신지요.”

그래서 라이너스는 일부러 일리어스를 도발했다.

차라리 일리어스가 대놓고 공작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면 라이너스도 그를 쳐내기 훨씬 쉬웠다.

도덕적인 부분을 중시하는 척하면서도 결국 패배자가 아닌 권력자를 따르는 것이 대다수 사람의 심리였다.

또한 한 가문의 가주쯤 되면, 비정한 것보다 무능한 것이 더 비웃음을 사기 마련이었다.

제 권위에 도전하는 일리어스를 공작인 라이너스가 찍어누른다고 해도 결국 라이너스가 이기기만 한다면, 사람들의 평판을 되돌릴 시간은 훗날에도 많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리어스는 라이너스를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편인 양 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를 이기려고 아등바등해 봤자, 정식 후계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없어 치졸하게 군다는 소리밖에 듣지 못할 터였다.

즉, 일리어스가 같이 싸워 주질 않으니 라이너스는 그를 이길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라이너스는 자꾸만 일리어스에게 싸움을 붙이려고 했다.

“라이너스, 네가 바쁘지 않을 떄 같이 가자꾸나.”

그러나 일리어스는 부드러운 대답으로 이번에도 싸움을 피해갔다.

라이너스가 이를 아득 악물었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라이너스는 일리어스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기라도 하고 싶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간 쌓였을 분노들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지 모조리 토해내게 하지 않고서는 라이너스의 속만 계속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라이너스가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라고 해도, 그런 짓을 대놓고 저지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럼 내일 함께 가시지요.”

그래서 라이너스는 오늘도 좋은 형님인 척하는 일리어스의 장단에 맞춰 좋은 동생을 연기했다.

물론, 라이너스는 이 연기를 계속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의 두 눈이 섬뜩하게 번뜩거렸다.

마차가 교외로 벗어나 숲길을 지나면- 그곳에서 사람을 시켜 일리어스에게 무슨 짓을 하든, 아무도 모르게 덮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

당연하지만, 라이너스도 홧김에 열이 받아 급하게 생각해낸 책략이었으므로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었다.

공작 부인이 기사단의 호위가 필요하다면서, 카테리안느 기사단 중에서도 라이너스를 따르는 주요 실력자들만 쏙쏙 빼갔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리어스를 상대할 기사들이 없어 일을 벌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라이너스는 일리어스와 함께 얌전히 카테리안느 가의 묘지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이너스는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를 발견했다.

“오랜만이에요, 오빠들.”

오벨리아가 웬일인지 미소하며 일리어스와 라이너스에게 인사했다.

오는 길 동안 일리어스와 라이너스를 호위했던 기사들은 묘지의 입구를 지키고 있을 뿐,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카테리안느 가문에서 관리하는 카테리안느 일가 전용 묘지였으므로,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니 묘지에 라이너스와 일리어스 단 둘뿐이라고 생각했기에 굳이 기사들을 함께 들일 필요가 없던 것이다.

어차피 단 둘뿐인 묘지에서 둘 중 하나가 돌연 다친다면, 나머지 하나가 의심받을 게 뻔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 안도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게, 이제는 힐켄테데의 이름을 단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묘지에 이미 와 있던 것이다.

“네가 여길 어떻게……!”

라이너스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리어스와 오벨리아, 에크하르트는 한편이다.

그런 반면 라이너스는 혼자였다.

그는 등줄기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자칫하면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쉿, 조용히 해요. 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시끄럽게 굴다니…… 그렇지 않아도 불효한 자식인데 말이에요.”

불효한 자식.

그건 콕 집지는 않았으나 분명 라이너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라이너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힐켄테데가 멋대로 카테리안느의 공간에 들어오다니 오벨리아, 너야말로…….”

탁.

그러나 일리어스에게 뒤에서 어깨가 잡힘으로써, 라이너스는 도망가려는 시도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라이너스가 소리를 내지르기도 전에, 오벨리아가 그의 앞에 양피지 한 장을 내밀었다.

“멋대로라니요. 어머니가 말씀해 주지 않으시던가요?”

오벨리아의 손에 들린 것은 카테리안느 공작가의 묘지 출입 허가증이었다.

“적어도, 아버지는 보고 싶을 때 뵈라고 써 주셨는데.”

물론, 라이너스는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이었다.

“……하, 하하……!”

라이너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완전히 놀아났다.

일리어스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 그리고 오벨리아.

세 사람은 이런 식으로 라이너스를 남들 없는 곳에서 고립시킬 때만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들을 믿지도 않았고 배신도 한 주제에, 라이너스의 안에서는 도리어 배신감이 차올랐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아무도 없는 곳에 나를 데리고 와 이런 일을 벌인 거지?”

“무슨 짓이라니, 서운하구나. 내게 먼저 같이 아버지를 뵈러 가자고 한 것은 라이너스, 네가 아니더냐.”

일리어스가 라이너스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정말로 서운한 것만 같아 보였다.

탁.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이 손 치워. 진짜 카테리안느도 아닌 주제에 감히 어딜 내 형인 척하는 거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자, 라이너스가 본색을 드러냈다.

갑작스럽게 궁지에 몰리게 되자 그는 겁을 먹어 몸을 부풀린 복어처럼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에, 카테리안느의 가족이 아닌 사람은 일리어스 오빠가 아니라 다른 사람 같은데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벨리아가 조곤조곤 라이너스를 비웃었다.

누구라고 콕 집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지레 찔린 라이너스가 발끈했다.

“나는 카테리안느야! 카테리안느가 아닌 놈한테 홀려서 나를 홀대하는 건 오벨리아, 너와 어머니고!”

“그러다가… 밖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들키겠구나, 라이너스. 네 평판이 엉망이 되겠어.”

그런 라이너스를 일리어스가 자중시켰다.

그럴수록 라이너스의 두 눈에는 더욱 불이 붙었다.

오벨리아가 돌연 말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기사들이 라이너스의 큰 소리에 놀라 쫓아들어올 때까지 고함을 내질렀을지도 몰랐다.

“너무 흥분하지 마, 오늘은 당신에게 해 줄 말이 있어서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뿐이니까.”

방금까지 오빠라고 불렀던 것은 거짓인 것처럼, 오벨리아는 라이너스를 타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가 매정한 호칭에 어떤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충격이었다.

“요즘, 식사를 잘 못 한다지.”

오벨리아가 그 고운 손을 뻗어 짐짓 상냥한 태도로 라이너스의 어깨를 톡, 톡 털어 주었다.

“그러면 안 되지-. 잘 챙겨 먹어.”

오벨리아가 미소했다.

“그래야, 빨리 죽지.”

그 순간, 라이너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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