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8)
“……욱, ……우욱!”
자신이 언제 점심을 먹고 나왔더라?
라이너스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는 속에 든 것을 당장이라도 게워내고 싶었다.
라이너스가 허리를 숙인 채 웩웩거렸다.
‘잘 챙겨 먹어. 그래야, 빨리 죽지.’
오벨리아의 그 말은 라이너스의 음식에 독이라도 탄 것처럼 들렸다.
세상에 무색무취에 맛조차 느껴지지 않는 독은 수도 없이 많았고, 은에 반응하지 않는 독도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나 오벨리아가 먹었을 바실리스크의 독 같은 건 조금만으로도 인간을 쇠약하게 만들 수 있었다.
라이너스의 머릿속에 그 순간 무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일러어스가 라이너스의 저택으로 들어온 것이 독을 먹이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풋.”
그 순간, 작게 비웃는 소리가 라이너스의 귓가에 들렸다.
오벨리아가 입가를 가리며 노골적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웃음.
그로 인해 자신이 속았음을 순식간에 깨달은 라이너스의 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오벨리아……!”
일리어스의 앞에서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분노한 라이너스가 오벨리아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지키듯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라이너스는 주춤하고 말았다.
단언컨대 에크하르트는 라이너스가 본 것 중 가장 커다란 사람이었다.
일리어스보다도 커다란 체격과 키는 라이너스를 주눅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방금, 무서웠지? 우리가 진짜 네 음식에 독이라도 탔을까 봐.”
오벨리아가 라이너스의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라이너스는 그런 사람이다.
저보다 강해 보이고, 저보다 똑똑한 사람에게는 덤비지 못하는.
그렇기에 자신을 믿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최악의 방법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이룬 게 아니던가.
“이전이었다면 이런 걱정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오벨리아가 웃음기를 거두고 나직이 말했다.
라이너스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동생을 배신하지 않고, 또 형의 자리를 빼앗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오늘날의 이런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어도 되었다고.
그건 오롯한 사실이었다.
라이너스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아, 그래.
그는 어쩌면 마주하지 않았어도 될 순간을 겪고 있었다.
라이너스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가족을 버렸다는 게 이런 의미라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불안해해.”
그 말은 저주와 닮아 있었으나 라이너스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저주를 현실로 만든 것은 그였으니까.
“언제 아버지처럼…….”
오벨리아가 말을 잇다가 잠시 멈추었다.
아버지.
그 단어 하나에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아버지처럼, 갑자기 죽게 될지…… 꼭, 두려워해.”
오벨리아의 말에 라이너스는 그제야 일리어스가 카테리아는 저택 내에서 내내 숨죽이고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로, 라이너스를 말려 죽일 셈이었다.
“웃기지 마……! 내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을 거 같아?”
라이너스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일리어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테리안느 공작 자리에까지 앉았는데, 그냥 당하고 있으면 안 되지. 라이너스, 네가 그렇게 한 보람이 없잖니.”
일리어스가 다정하게 라이너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라이너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네가 원하던 그 자리를 끌어안고, 네가 그 자리 하나를 가지기 위해 무얼 버렸는지 끝까지 지켜봐야지.”
조곤조곤한 일리어스의 어투는 오벨리아와 닮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라이너스가 그토록 카테리안느의 이방인이라 일컫던 일리어스는 오히려 오벨리아와 더욱 닮아 보였다.
이곳에서 이방인은 라이너스뿐이라는 듯이.
라이너스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카테리안느가 아닌 에크하르트조차 이 공간에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거늘, 라이너스는 어쩐지 자신만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라이너스는 자신도 모르게 돌아섰다.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없었다.
결국, 라이너스는 도망치듯이 등을 돌려 묘지에서 벗어났다.
그 걸음이 매우 조급하고 빨랐다.
오벨리아와 일리어스는 그런 라이너스를 쫓지 않았다.
묘지 입구에서 기다리던 기사들은 일리어스와 라이너스가 따로 행동하자, 일리어스를 따라 묘지에 남아야 할지 라이너스를 따라 돌아가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그것을 보며 일리어스가 자신은 괜찮다는 듯 손짓을 해 주었다.
그제야 기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라이너스를 쫓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묘지에는 오벨리아와 일리어스 그리고 에크하르트만이 남았다.
에크하르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오벨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다.”
에크하르트가 느낄 수 있는 기척이 세 사람 외에 없다면, 적어도 그들의 근처에 목소리를 엿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이 분명했다.
그제야 오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아그네스가 사실은 평민이었다는 증거와 증인을 확보했어.”
이번 일까지 터지고 나면, 라이너스는 무사히 공작 자리에 있을 수 없을 터였다.
카테리안느에서 혈통에 얽매이는 것은 공작 부인이나 일리어스, 오벨리아를 제외한 라이너스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라이너스를 지지하여 공작 자리에 올릴 만큼의 가신과 원로들이 카테리안느에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이 제국도 아니고 왕국의 평민을 카테리안느 공작가에 들인 것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물며, 카테리안느가 친척 가문에서 입양한 일리어스조차도 그 피를 문제 삼는 꼬장꼬장하고 답 없는 이들이 아니던가.
“당장 터트릴 건 아니지?”
일리어스가 물었다.
어차피 그는 공작 자리에 하루 빨리 올라야 된다는 욕심 같은 건 없었다.
오벨리아가 그랬듯이, 일리어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카테리안느 공작인 게 좋았다.
남매의 아버지는 카테리안느 공작으로서 무언가를 할 때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돌연 사라져 버린 자리에, 성급하게 앉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얌전히 공작 자리에서 내려오는 건 라이너스에게 너무 쉬운 벌이었다.
“당연하지. 라이너스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도저히 못 견딜 지경이 될 때까지 몰아붙일 거야. 제발 내려오게 해 달라고 빌도록.”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라이너스가 받아야 할 벌이었다.
***
라이너스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사를 향해 소리쳤다.
“당장 주방장부터 갈아 치워!”
“예……?”
이전의 집사는 라이너스의 명으로 인해 죽은 터였다.
그리하여 새로 오게 된 집사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혹시 그가 공작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렸는지요? 말씀해 주시면 그에 따라 합당한 처벌을…….”
집사가 다급하게 라이너스의 비유를 맞추려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사에게 라이너스는 모시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권위적이고 예민했다.
카테리안느 공작 저택에 사람을 들이는 기준은 빡빡했고, 동시에 그 사람은 그 분야에서 최고 중에 최고여야만 했다.
그러니 사람을 들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중에서 말단도 아니고, 주방의 최고 권위자인 주방장을 갑자기 자르면 당장 오늘 저녁부터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차라리 집사의 입장에서는 라이너스를 어떻게든 달래는 게 나았다.
“자르라면 자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아니면 네가 잘릴 건가?!”
그러나 라이너스에게 집사의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집사는 물론 주변의 고용인들도 모조리 놀라 라이너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앞으로 식기는 무조건 은 식기만 쓰도록 해. 티타임에도 마찬가지야!”
은 식기가 모든 독을 걸러 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라이너스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오벨리아가 무슨 독을 쓸지도 모르고, 혹시라도 그 은 식기가 한 번쯤은 제 목숨을 구해 줄지도 모르지 않은가.
“예……? 전부요?”
정찬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식기를 쓰는 것은 귀족가의 미덕이었다.
그러니 집사로서는 이 또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예? 예? 거리는 거야! 넌 예? 밖에 할 줄 몰라?!”
그러나 그 어리둥절함은 방금 전 오벨리아와의 대화로 신경이 잔뜩 곤두선 라이너스의 심기만 더욱 건드릴 뿐이었다.
“머저리 같은 놈! 뭐 이딴 걸 집사라고……!”
라이너스가 화풀이하듯 집사의 정강이를 차며 소리쳤다.
현재 그들이 서 있는 곳은 1층 홀의 정중앙이었다.
수많은 공작가의 고용인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모욕을 당한 집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빨리 안 움직이고 뭐해!”
그러나 라이너스는 그런 집사의 모습에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버럭 소리쳤고, 집사는 뒤돌아서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그러나 라이너스에게 보이지 않은 집사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온갖 성질을 내고 제 방으로 돌아온 라이너스는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심이 되지 않았다.
저택 내에는 모조리 새로운 고용인들뿐이었다.
이전 카테리안느 저택의 고용인들이라면, 엄격히 교육받았으니 카테리안느 공작을 위해 완벽한 태도로 충성을 다할 터였다.
그러나 새로운 고용인들은 라이너스가 생각하기에 제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지나치게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과 일리어스를 좋아했다.
일리어스가 사람 좋은 얼굴로 고용인들에게 독을 다른 것인 양 챙겨 주면, 그들이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솔직히 독을 사용하자면, 꼭 먹는 게 아니어도 일상에서 침투시킬 방법은 또 얼마나 많던가.
라이너스는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뜸 일리어스나 자신의 어머니가 저를 독살하려 든다고 들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 라이너스에게 아무 일도 없다면, 그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지도 몰랐다.
지금의 라이너스에게는 좋지 않은 소문 하나하나가 모두 치명적이었다.
“방법이…… 방법이 필요해…….”
라이너스가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라이너스는 뚜렷한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하나였다.
라이너스의 발걸음이 제 어머니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