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9)
똑똑똑.
라이너스는 아주 오랜만에 제 어머니의 방문을 노크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카테리안느 공작이 죽고 나서 공작 부인과 라이너스의 사이는 아주 소원해졌기 때문에 오랜만이라는 감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라이너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라이너스의 어투가 유독 정중했다.
하긴, 매달릴 곳이 이제는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네가 어쩐 일이니?”
그리고 의외로 공작 부인의 방문은 쉽게 열렸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라이너스에게 감시당하기 싫다면서 저택 내의 시녀들을 제 방에서 모조리 물려 둔 터였다.
그 탓에 공작 부인은 직접 문을 열고 나와야만 했다.
“……우선 들어가도 될까요? 오래간만에 어머니께 드릴 말씀도 있고…… 또, 그간 저와 어머니 사이에 쌓인 오해가 많지 않습니까.”
라이너스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서늘한 눈빛은 나아지질 않았다.
“어머니, 저도 어머니의 자식이잖아요.”
제 어머니의 반응이 좀처럼 온도가 달라지지 않자, 라이너스가 공작 부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한 번쯤은, 마지막으로 한번은…… 제 말을 들어주셔도 되잖아요.”
오벨리아든 일리어스든, 그들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어머니뿐이었다.
그러니 라이너스는 어떻게든 자신의 어머니를 설득해야만 했다.
“어머니, 엄마.”
라이너스가 머리가 어느 정도 큰 이후로 부르지 않았던 호칭을 입에 담았다.
그만큼이나 그는 절박했다.
잠시 그런 제 아들을 지긋이 내려다보던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결국 몸을 비켜섰다.
“……일단, 들어오렴.”
“고마워요, 엄마.”
라이너스가 감동이라도 먹은 것처럼 울먹일 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이제 되었다는 생각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오벨리아나 일리어스가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든, 하나 남은 부모의 뜻을 무시하지는 못하리라.
***
“앉으렴.”
라이너스를 방 안으로 들인 후,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손수 차를 끓였다.
그러자 라이너스가 안절부절못하는 척하며 말을 걸었다.
“시녀를 시키시지 않고요.”
사실, 라이너스에게 차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당장 제 어머니를 시켜 오벨리아와 일리어스를 어떻게든 멈추고 싶었을 뿐이니까.
“됐다. 내가 이곳의 시녀를 어떻게 믿고.”
그러나 공작 부인의 대답은 상상 이상으로 싸늘했다.
“어머니……! 그럼 제가 어머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는 말씀이세요?”
라이너스가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차를 끓인 후 트레이에 찻잔과 찻주전자를 챙겨온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라이너스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꾸했다.
“네 아버지께도 무슨 짓을 했는데, 나한테 하지 말란 법이 있니?”
라이너스의 잘못을 망설임 없이 꼬집는 말에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티낼 수는 없었다.
“어머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현재 이 상황에서 라이너스에게는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꼭 필요했으니까.
“괜한 사설은 집어치우고 내게 할 말을 하도록 해라.”
소리도 없이 능숙한 솜씨로 찻잔에 차를 따라낸 공작 부인이 잔 하나를 라이너스의 앞에 놔주었다.
그녀의 태도는 마치 차 한 잔쯤은 주겠지만, 그 이상은 바라지도 말라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초조해진 라이너스가 입을 열었다.
“오벨리아와 일리어스 형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라이너스가 일부러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손을 떨며 말했다.
그는 제 어머니의 동정심을 한껏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불쌍한 척을 했다.
“……오벨리아와 일리어스가 너를?”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되물었다.
오벨리아는 마치 그들의 어머니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공작 부인의 태도만 봐서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라이너스는 그게 사실이 아닐 거라고 여겼다.
어쨌든, 설령 자기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더라도 제 부모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자각쯤은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너스는 오만하게도 자신했다.
어머니는 결국 자신을 버리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해서 라이너스가 제 아버지와 일리어스를 모두 밀어내고 카테리안느 공작이 될 기회를 잡은 것이니까.
“그래서, 나보고 어떻게 해 달라는 거니?”
어머니의 말에 입꼬리가 찢어지게 올라갈 뻔한 것을 라이너스는 애써 참았다.
어머니가 일리어스와 오벨리아를 말려서 자신에게 아무 짓도 못하게 하면, 자신은 차근차근 준비하여 두 사람이 두 번 다시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훗날에라도 그 싹 자체를 밟아버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방금 전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물음이 자신이 원하던 바임을 들켜서는 안 되었다.
“오벨리아나 일리어스 형이 그렇게 나오면, 저도 저를 지키기 위해서 두 사람과 맞서는 수밖에 없어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라이너스의 얼굴은 일견 무고한 사람의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말만 듣고 있노라면, 라이너스는 싸움을 원하지도 않는데 저를 적대하는 오벨리아와 일리어스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제발 오벨리아와 일리어스 형을 설득해 주세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도 그간 있던 모든 일을 잊을게요.”
그렇게 일리어스를 형으로 인정하기 싫어했으면서, 필요한 순간에는 잘도 라이너스의 입에서 형이라는 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심지어 라이너스는 카테리안느의 비극을 만든 시발점이 어떻게 보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제가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쾅!
그러니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녀가 화를 참지 못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잊어? 누구 마음대로!”
“어……머니?”
라이너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언컨대,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도저히 그냥 들어줄 수가 없는 말들을 하는구나! 네 아버지를 죽여 놓고 네가 뭘 잘했다고 잊어! 두고두고 기억하거라. 두고두고 괴로워해!”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입에서 그간 쌓아 뒀던 분노와 원망이 터져 나왔다.
저런 게 제 아들이라고, 어떻게 끝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지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제가 아니었으면, 알렉산드로에 의해 카테리안느는 그대로 멸문했을 거예요! 알고나 계세요?”
라이너스가 울컥하여 소리쳤다.
그는 알렉산드로가 카테리안느를 쳐내려고 하던 것을 자신이 구해냈다고 생각했다.
그 어이없고 뻔뻔한 생각에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말을 잃어버렸다.
“……네 아버지가, 왜…… 그날 마차를 타셨는지, 정말 모르느냐?”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라이너스가 구제불능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가 자식을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키워냈으리라고 누가 상상하고 인정하기 쉽겠는가.
“네 아버지만 살아서 제때 황궁에 도착하셨다면, 오벨리아가 폐궁을 불태우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그 아이를 구하셨겠지!”
쾅!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욱 분노한 탓에, 그녀의 손바닥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럼 오벨리아는 불행해지지 않았을 거고 알렉산드로 그놈 따위는 진작 막았어!”
선황은 알렉산드로보다 카테리안느의 편이었다.
황실이 배신하지 않는 한, 현존하는 카테리안느가 절대적인 황실의 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 카테리안느 공작만 그렇게 급사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라이너스가 제 욕심에 아버지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오벨리아도, 가문도 무사했으리라는 것이었다.
“네 아버지가 알렉산드로가 그런 놈임을 돌아가시는 순간, 몰랐을 것 같으냐?”
똑똑한 사람도 사랑하면 눈이 먼다.
영민한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를 사랑하여 그의 속내가 얼마나 시꺼먼지 몰랐듯이, 카테리안느 공작과 공작 부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작 부부는 라이너스의 욕망을 눈감아 주었듯, 제 딸의 행복을 깨지 않았다.
무엇이 쉽고 위험하지 않은 길인지 알았지만, 그들은 부모로서 제 자식들을 너무 사랑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부가 모든 것을 알 만큼 전지전능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알렉산드로가 얼마나 욕심 많은 작자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오벨리아가 사랑한다고 하니, 알렉산드로를 제거하지 않고 카테리안느의 힘으로 제어하는 데서 그친 것이다.
카테리안느 공작의 사후, 그것을 굳이 오벨리아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딸아이가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영민한 오벨리아는 어쩌면 알고 있겠지만.
그러니까 라이너스의 행동은 카테리안느를 구한 것이 아니라 카테리안느를 진창에 처박은 것이었다.
“아무리 내 아들이라지만…… 멍청해도 이리 멍청할 줄이야!”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대놓고 한탄했다.
“너는 욕심만 많을 뿐, 정말로 공작 자리에 오를 자격 따위 하나도 없구나. 너 같은 사람이 카테리안느라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면, 상대적인 약자들이 피해를 입는 법이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어조는 언제 흥분했냐는 듯 우아하고 싸늘해졌다.
“네 스스로 내려오거라. 그러면 오벨리아와 일리어스가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것쯤은 막아 줄 테니.”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꿰뚫는 듯한 두 눈이 라이너스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는 제 어머니가 자신을 정말로 한심한 종자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가 뭔데, 날 그렇게 봐……?”
그리고 그것은 아까부터 신경이 최고조로 곤두서 있던 라이너스를 건드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됐어, 누구의 도움도 난 필요 없어.”
라이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빌로트!”
라이너스가 신경질적으로 카테리안느 가문에서 현재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 심복의 이름을 목소리 높여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그리고 로빌로트가 빠르게 제 앞에 나타나자마자, 라이너스가 검지로 제 어머니를 가리키며 외쳤다.
“대부인을 구금해라!”
라이너스는 제 어머니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이렇게라도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