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10)
일리어스는 카테리안느 저택에 들어서는 것을 거부당했다.
만약, 일리어스의 곁에 에크하르트가 붙여 준 기사들이 없었더라면 그 역시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랐다.
그리하여 일리어스는 기사들과 함께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로 오게 되었다.
“……어머니를 인질로 잡은 거네.”
일리어스가 타운하우스로 오자마자 상황 파악을 끝낸 오벨리아가 말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의 거취를 알아본 결과, 그녀는 오늘 저택을 나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일리어스만을 저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 저의가 뻔한 일이었다.
“예상대로야.”
일리어스가 한숨을 삼켰다.
그들이 도발하면 라이너스가 지레 겁을 먹고 어머니에게 매달리라는 것도, 어쩌면 어머니를 구금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예상 범위 안의 일이었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 또한 그 점을 알면서도 이 한 편의 연극에 동참한 것이었으니까.
저택 내에 일리어스가 있거나, 혹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쉽게 라이너스를 따라갔다면 라이너스는 절대 경계를 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은 한 번 라이너스의 말을 거절했다가, 일리어스 때문에 라이너스의 저택에 머물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공작 부인은 라이너스에 의해 일리어스와 강제로 떨어지게 되었다.
심지어는 구금까지 당했으니, 남매의 어머니가 어떤 수작을 부리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 하리라.
“어머니께서 무사하셔야 할 텐데.”
오벨리아가 다소 초조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라이너스만을 공작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훗날 철도 사업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라이너스에게 온전히 떠안고 가게 할 수 없었다.
라이너스의 섣부른 투자 판단으로 인해 카테리안느가 손해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라이너스가 공작 자리에서 내려올 때는, 그가 애초에 카테리안느 공작이 될 자격이 없었다는 게 증명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카테리안느가 피해를 최대한 덜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라이너스를 단순히 공작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작위 수여 자체를 무효로 만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파문.
그에게서 가문의 성을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파문을 하는 데는 카테리안느의 원로와 가신들 과반수의 동의가 필요했다.
“……어머니를 믿고 기다리자. 어머니께서 원하셨잖아.”
일리어스가 근심에 빠진 제 여동생을 달랬다.
그 많은 원로와 가신의 동의를 이뤄낼 방법은 하나였다.
라이너스가 본래의 카테리안느 공작을 죽였다는 증거를 잡아내는 것.
물론, 증거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증거가 숨겨져 있을 만한 원래의 카테리안느 저택은 이미 훨훨 타 버린 뒤였으니까.
그래도 오벨리아는 라이너스에게 아직 죄의 증거가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얼마 전,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카테리안느 공작이 죽던 날, 마부의 사망 추정 시간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끝내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마부는 카테리안느 공작보다 무려 30분을 일찍 죽었다.
마부의 시신을 수습하던 장의사의 아들이 하필 의원이었고, 그들은 마부의 사인이 사고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곧바로 도주했다.
그 덕에 살아남은 이들을 에크하르트의 수하들이 찾아낸 것이다.
그렇다는 건, 카테리안느 공작이 마차에 오를 때만 카테리안느 가의 마부가 마차를 몰았다는 이야기였다.
중간에 본래의 마부를 죽이고, 마부를 바꿔치기했다.
그 후 사고 현장에 다시 마부의 시신을 공작과 함께 죽은 것처럼 던져 놓은 것이다.
여기서 오벨리아는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바로, 라이너스가 아버지의 출발 전에 마차에 손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던 차였다.
카테리안느 공작가의 마차는 관리인이 여럿인 데다가, 그 관리인 모두가 카테리안느에 은혜를 입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리인들은 모두 마음속 깊이 카테리안느 공작을 어려워하면서도 존경했다.
그런 그들이 공작을 버리고 라이너스를 택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차는 마부가 뒤바뀐 뒤 망가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달리는 마차를 망가트린 자는 누구인가?
분명한 건, 달리는 마차 위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평범한 사람은 아닐 터였다.
마차를 외적으로 봤을 때 사고사라는 결론이 날 수 있을 만큼 마차에 대해 잘 알면서도, 달리는 마차 위에서 무언가를 할 실력자.
기사들은 주로 말을 타고 다녔기에 마차에 관해 잘 알 리가 없었다.
그건 카테리안느 안 라이너스의 기사나 알렉산드로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는 건 결국, 라이너스가 이 일에 외부 인사를 끌어들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에크하르트의 수하가 조사에 착수했으나, 도통 그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경우는 단 하나였다.
라이너스가 암흑가의 인간들과 결탁한 것.
암흑가의 인간들은 사람을 속이고 이용해 먹는데 도가 텄다.
따라서 언제, 어떻게 카테리안느 공작의 죽음에 관한 일로 라이너스의 뒤통수를 치려 할지 몰랐다.
그러니 추측이 사실이라면 암흑가의 이들한테 일방적으로 당해 골수까지 빨아 먹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라이너스는 그들과의 계약서를 불태울 수 없었다.
암흑가의 이들에게도 자신들이 그 카테리안느 공작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건 난감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즉, 계약서는 암흑가와 라이너스 사이 서로의 목줄인 셈이었다.
그리고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홀로 라이너스의 저택에 남아 찾으려는 게 바로 그 계약서였다.
카테리안느 공작을 죽였음을 증명할, 유일한 증거.
“내가 라이너스의 저택에 사람을 심어 놨으니, 위기의 상황이 될 경우 공작 부인을 도울 거다.”
에크하르트 또한 오벨리아의 손을 붙잡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제야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사람이라면, 제 어머니를 충분히 지켜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 모습을 일리어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봤다.
“……오빠가 말할 때는 반응도 하지 않더니, 대공 전하께서 한마디 하셨다고 안도하는 거야? 이거 서운한 걸, 비아.”
그가 장난스레 제 여동생을 타박했다.
서운함을 토로하는 일리어스의 행동에 오벨리아는 잠시 당황했다가, 그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기에 곧 장난임을 알아차렸다.
그 사소한 장난에 그제야 그녀의 입가에도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부러우면 오빠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했어야지.”
오벨리아가 일리어스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듯이 역으로 제 오빠를 타박했다.
그러자 일리어스가 더욱 과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와- 비아, 이제는 오빠가 혼자라고 놀리기까지 하는 거야? 너무하네-. 그래, 너 결혼해서 좋겠다.”
“오벨리아와 결혼해서 좋은 건 나 같은데.”
남매의 그 장난 사이로, 에크하르트의 진지한 말 한마디가 끼어들었다.
오벨리아의 허리에 팔을 감아, 그녀를 뒤에서 껴안으며 내뱉은 그의 말에 순간 남매가 벙진 채로 에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와 일리어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끄러운 기색 따위 없었다.
오직, 진심을 말했다는 것이다.
“와…… 아니……. 진짜…… 좀…….”
장난이 아니라 실제로 말을 잃은 일리어스가 한없이 말끝을 늘어트렸다.
오벨리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에크하르트가 이런 말을 이렇게 대놓고 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래도 그게 기분 나쁘지는 않아서, 결국 그녀는 자신을 안은 그의 팔을 떼어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일리어스가 혀를 찼다.
“나, 왠지 지금 눈치 없이 여기 끼어 있는 기분이야.”
일리어스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곧, 그가 환히 미소하며 제 여동생에게 말했다.
“그래도- 네 이번 결혼은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다, 비아.”
모든 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오벨리아의 건강은 아직도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순간 제 오빠가 하는 말에 울컥했다.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던 날에는, 두 번 다시 이런 순간이 오지 않으리라 여겼으니까.
이제는 죽은 줄 알았던 제 오빠에게 이런 이야기도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점차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었고, 다시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서 빨리-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어.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오벨리아가 갑자기 벅차오르는 감정에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에크하르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기필코, 그렇게 될 거다.”
그 단호한 목소리가, 오벨리아로 하여금 의심 없이 행복할 미래를 그리게 만들었다.
***
라이너스의 일을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는 여전히 바빴다.
건국제의 주관을 그녀가 맡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오벨리아 혼자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주축일 뿐, 그녀의 손으로 다른 귀부인이나 영애들을 뽑아 함께 축제를 준비하는 것이 방식이었으니까.
그래서 오벨리아는 북부에 갔다가 수도로 돌아온 레베카를 포함하여, 몇몇 영애를 골라 자신의 일을 돕게 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로이안 후작가의 엘라사나도 있었다.
황후 간택 때, 알렉산드로에 의해 완전히 물을 먹은 그 엘라사나 말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오벨리아가 엘라사나에게 맡긴 일은 단 하나였다.
엘라사나는 건국제에서 황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아그네스는 유폐 당한 상황이었으므로, 그녀가 건국제 연회나 행사에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 또한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엘라사나에게 황후의 일을 맡긴다는 것의 의미는 자명했다.
엘라사나가 황후의 건국제 준비를 돕는다는 이유로 황후의 궁을 드나들면서부터, 황후의 궁에서는 신경질적인 소음이 끊이질 않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아그네스가 아무리 패악을 부려 봤자, 모두 쓸모없는 노릇이었다.
황실은 로이안 후작가와 이 이상의 척을 지고 싶지 않아 했고, 심지어 알렉산드로는 자리를 비웠으니 선황이 아그네스를 도울 리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건국제 준비는 순조롭게 되어가는 듯했다.
아그네스가 엘라사나에게 컵을 깬 유리 조각을 휘두르기 전까지는.